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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3) (42/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3)

중간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도 섞여 있어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그건 분명 내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었다. 뜬금없게도.

이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혹시 날 놀리는 걸까. 자격지심이라 해도 할 말이 없지만, 그런 식으로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성녀님께 비하면 저 같은 건 지극히 평범하죠.”

“혹시 거울을 잘 안 보는 타입인가요?”

“타입?”

또다시 알아듣지 못한 단어가 등장해 고개를 갸웃하자 성녀가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보다 두 분은 여기에 어쩐 일이신가요?”

질문의 순서가 많이 늦은 듯하지만 그녀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와 알렌 4황자를 보며 물었다.

“지금 이쪽 궁에 머무는 건 저뿐인데, 저를 만나러 오셨을 리는 없고…….”

“우린 황성 탐험 중이야!”

지금껏 얌전히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알렌 4황자가 적절한 시기에 끼어들어 외쳤다.

“황성 탐험이요? 어머, 그거 재밌겠네요.”

알렌 4황자가 의기양양하게 외친 말에 성녀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빛을 띠며 반짝였다.

“혹시 저도 끼워주실 순 없나요?”

그러고는 설마했던 말을 내뱉으며 나를 놀라게 했다. 설마 성녀가 황성 탐험에 관심을 가질 줄이야.

나는 이걸 어쩌면 좋지 하는 눈으로 알렌 4황자를 내려다보았고, 알렌 4황자 역시 어떻게 하냐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렌님이 괜찮으시다면요.”

망설이던 나는 비겁하게도 어린 황자에게 결정을 떠맡기고 말았다. 알렌 4황자의 커다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 성녀에게 향했다.

“아리아도 가고 싶어?”

그 눈동자는 분명 나처럼 성녀를 딱히 달가워하지 않는 눈이었다. 아이는 솔직해서, 한눈에 보기에도 표정에 감정이 전부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성녀는 그마저도 개의치 않는 무적의 미소로 부딪쳐왔다.

“네, 부디 저도 끼워주세요.”

“으응, 그럼 할 수 없지. 같이 가.”

결국 알렌 4황자도 그녀의 미소에 지고 말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표정을 숨기려는 나와 달리 알렌 4황자는 대놓고 나와의 둘만의 데이트를 방해당한 것이 싫은 듯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아이의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도 성녀는 모른 척하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기뻐하며 손뼉까지 쳤다.

“와아, 정말 기뻐요! 그동안 황성 안에서 친구도 없이 정말 외로웠거든요. 성의 시녀들은 제가 어려운지 다들 피하기 바쁘더라고요. 함께 따라온 성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요. 방에 틀어박혀서 온종일 누군가와 말 한마디 못 해본 날도 있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두 분 덕분에 제국에 온 뒤로 가장 행복한 날이 될 것 같아요.”

그러나 뒤이어 성녀가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꺼낸 말에는 아무리 알렌 4황자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알렌 4황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왼손으로는 나를 붙잡은 채로 오른손을 내밀어 성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럼 오늘은 셋이서 재밌게 놀자!”

그러고는 평소와 같은 천사 같은 미소를 띠며 우리를 이끌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묘한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았다. 경계심 어린 눈으로 돌아보니 성기사로 보이는 남자 둘이 조용히 뒤를 따르고 있었다. 성녀가 혼자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아마 처음부터 계속 성녀 주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렌 4황자를 따라 걸으며 나는 성녀의 옆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녀는 기쁜 듯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성녀의 마지막 말에는 마음의 벽이 아주 조금 허물어지고 말았다. 연회장에서의 그녀는 모두가 사랑하는 인기인이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다시 말 걸어주는 이 하나 없는 이방인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건 아마 그녀를 만나고 싶은 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제국에서 그녀를 보호하기 위함의 이유가 더 컸겠지만 말이다.

어젯밤 잠깐 방에 혼자 남겨졌을 때도, 이 넓은 황성 안에 나 홀로 있는 것 같아 짙은 공허감을 느꼈던 나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였다. 물론 내 주제에 그녀를 동정할 처지가 아니긴 하지만.

사실 내게는 그녀의 존재 자체도, 그녀를 보고 있자면 원치 않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의 존재도, 모든 게 불편하기만 했다. 애써 감춰둔 상처가 욱신거리고, 괴롭고, 아프니까.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그리고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남자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 사람에겐 죄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그녀가 내게 순수하게 관심을 가지는 것뿐이라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나는 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착한 아이네요. 4황자 전하께서는.”

우리보다 한 걸음 먼저 토끼처럼 폴짝 폴짝 뛰어가는 알렌 4황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성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2황자 전하라면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셨을 것 같은데.”

그녀는 혼잣말처럼 내게만 겨우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동의를 구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굳어버렸다.

연회장에서 만났던 일을 얘기하는 걸까. 하지만 그걸 나한테 물어도 내가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그렇다, 아니다. 내가 감히 레이몬드 2황자에 대해 멋대로 짐작하고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굳어있으니 성녀 아리아가 빙긋 웃고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초부터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는 듯이.

“그런데 이짜나요.”

그때 알렌 4황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서며 나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왜 그러지?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은 걸까, 걱정스러운 시선을 가져가자 아이의 곤란해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비 와요.”

툭.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얼굴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그리고 마치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투두둑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해가 쨍쨍하게 떠 있었는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황당해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날이 이래서야 황성 탐험은 조금 힘들겠네요.”

다급히 소맷자락을 들어 알렌 4황자가 비를 맞지 않도록 애쓰는데, 곁에 선 성녀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알렌 4황자의 얼굴도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흐려졌다. 착한 아이라 떼를 쓰지도 못하고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침묵하는 알렌 4황자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떡하지, 일단 비부터 피해야 해. 알렌 4황자를 거의 끌어안다시피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였다.

“비가 잠잠해질 때까지 제가 머무는 궁에서 잠깐 쉬어가는 건 어떠세요?”

성녀가 알렌 4황자처럼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저 순수하게 도움을 주고 싶을 뿐이라는 듯이.

나는 반사적으로 알렌 4황자의 표정부터 살폈다. 귀빈들이 머무는 궁, 낯선 손님의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이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걸까. 어느새 흥미롭게 반짝이는 아이의 눈동자를 본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 당장이라도 저 멀리 그녀를 피해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누른 채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럼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성녀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얼마든지요.”

* * *

“어머, 잠드신 건가요?”

처음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성녀가 머무는 궁을 둘러보던 알렌 4황자는 얼마 가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고개를 꺾는 아이가 위험해 보여 반쯤 잠든 아이의 몸을 안아 올렸더니 알렌 4황자는 이내 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 아침 일찍부터 잔뜩 기대에 차선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게 제법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제가 머무는 방까지 안내하고 나서야 알렌 4황자의 잠든 모습을 발견한 성녀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쿡쿡 웃었다.

“곤히 자고 있으니 깨우기도 그렇고 일단 제 침대에 눕혀둘까요?”

나는 성녀의 말대로 조심조심 움직여 아이의 작은 몸을 그녀의 침대에 내려두었다.

“차 한 잔 드릴까요?”

알렌 4황자를 침대에 눕혀두고 돌아서는데, 성녀가 따뜻하게 데워진 물을 찻잔에 따르며 내게 물었다. 방의 주인답게 여유로운 그녀의 모습에 나는 내심 긴장되고 불편한 숨을 삼켰다. 알렌 4황자도 잠들어버린 뒤라 방 안에는 그녀와 단둘이 남아있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나는 그녀가 권한 티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직접 따라준 차를 가만히 입안에 머금었다. 향긋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너무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히 있으려고 노력했지만 완벽하진 못했나 보다. 성녀가 어딘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응시하는 그 눈동자가 왠지 묘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그녀는 내게 무척 미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상황상 헤더 영애가 오해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만 난 당신을 좋아하는 쪽에 가깝거든요.”

그녀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당신이 불행해지기를 바라지 않고요.”

나는 애써 긴장을 감추며 다시 찻잔을 입가에 댔다. 따뜻한 찻잔에 손을 대고 있어도 손끝의 냉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변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질문의 의도가 뭘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찻잔을 다시 내려놓을 때였다.

“당신은 원래 리하르트 아델을 사랑했잖아요.”

달그락.

손에서 놓친 찻잔이 받침과 부딪치며 소리를 냈다. 뜨거운 차가 소매와 손에 튀었지만, 뜨거움을 느끼지도 못하고 멍하니 성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괜찮아요?”

바보처럼 넋이 나가 있는 나를 대신해 성녀가 깜짝 놀라 손수건을 든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차가 튄 내 손을 닦아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표정이나 말투가 너무나 다정하고, 또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고 있어 더 혼란스러웠다.

“아, 죄송합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사과를 하며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이 있어 놀란 탓에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질문이 너무 직설적이었죠? 미안해요.”

미안함이 담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짧게 내뱉은 숨결이 입술 끝에 닿은 것 같았다.

신경 써줘서 고맙긴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 다가올 필요가 있는 걸까. 나는 거리감이라고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 불편함을 느꼈다. 눈살이 찌푸려졌다.

“헤더 영애는 운명을 믿나요?”

다행히 성녀는 손수건을 내 손에 쥐여 준 채로 몸을 바로 세우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맞은편 의자에 앉은 그녀가 던져온 질문에는 다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앗, 혹시 오해하지 마세요. 지금 이거 영애를 꼬시는 대사가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거예요.”

무거워진 분위기가 싫은 듯 그녀가 농담조로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지만 나는 조금도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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