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2)
한참 자던 도중 부드러운 실타래가 코 끝을 간질거리고, 묵직한 뭔가가 내 팔과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하고 부스스 눈을 뜨자 언제 방에 들어왔는지 모를 알렌 4황자가 내 품에 쏙 안겨 잠들어있었다. 색색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있는 아기천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놀란 눈을 깜빡이며 사태 파악에 나섰다.
방안에는 알렌 4황자와 나, 둘뿐이었다. 아마 알렌 4황자가 아침 일찍 인사를 하러 와서는 그때까지도 잠들어있던 나를 보고는 옆에 누워 같이 잠든 게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이대로 계속 있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럼 안 되겠지.’
나는 생각보다 곤히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고민하다 알렌 4황자의 몸을 살며시 흔들었다.
“알렌님, 알렌님.”
“으응.”
아이는 단잠을 자고 있는데 깨우는 손길이 못마땅한 듯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내 품에 더 깊이 얼굴을 묻어왔다. 이대로 아기천사를 꼭 끌어안고 다시 쿨쿨 자고 싶은 욕망과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이성의 줄다리기가 잠시 이어졌다.
“알렌님, 일어나셔야 해요.”
나는 이성의 힘을 발휘해 유혹을 이겨내고는 알렌 4황자를 깨웠다. 알렌 4황자는 몇 번 칭얼거리다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아이는 잠이 덜 깬 눈으로 나를 멍하니 응시해오더니 눈이 마주치자 천사처럼 웃었다.
“형슈님.”
심장에 해로울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에 나도 얼굴이 다 풀어져선 헤벌쭉 웃고 말았다. 밤새 잠도 못 이룰 만큼 고민이 많았었건만, 알렌 4황자의 미소 한 방에 바보처럼 헤실거리는 내가 좀 웃기기도 했다.
“안녕히 주무셔써요!”
“좋은 아침이에요, 알렌님.”
“형슈님도 조은 아침이에요!”
“네에, 같이 일어날까요?”
“조아요!”
나는 살짝 까치집이 진 알렌 4황자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손으로 빗겨주었다. 얌전히 내 손길을 받고 있던 아이는 자기도 내 머리를 빗겨주겠다며 내 긴 머리칼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워낙 내 머리카락이 길다 보니 손에 엉켜 아이가 울상을 지을 때는 나도 모르게 쿡쿡 웃어버렸다.
알렌 4황자 덕분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형슈님, 형슈님.”
알렌 4황자를 침대에 앉혀둔 채 드레스룸으로 가 잠옷을 갈아입는데, 문 너머에서 알렌 4황자가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님은 오늘도 할 일이 이써서 같이 못 논대요. 그럼…….”
힘없이 축 처진 아이의 음성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울적해졌다.
유리 황녀가 어젯밤 평소와 태도가 달랐던 건, 역시 나 때문인 게 아닌가 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게 진짜라면, 나로 인해 괜히 어린 황자님까지 쓸쓸하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함이 앞섰다.
“형슈님이랑 알렌이랑 두리서 황성 탐험해요!”
통통통. 문을 조그맣게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알렌 4황자가 밝고 활기차게 외쳤다.
빨리 준비를 하고 나오라는 듯 드레스룸의 문을 통통 두드리는 소리마저도 잔뜩 신이 난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에 얼른 머리만 대충 빗고 후다닥 밖으로 나가자, 문 바로 앞에서 알렌 4황자가 평소처럼 해맑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도 알렌이 형슈님을 독차지하는 날이에요!”
헉, 독차지한다는 말도 알고 있어. 우리 황자님 정말 너무 똑똑해.
뭔진 몰라도 자신에게 다 맡겨두라는 듯 꼭 쥔 주먹을 제 가슴에 올리며 당당하게 외치는 알렌 4황자가 너무 의젓하고 귀여워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처음 유리 황녀와 만났을 때도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잠시나마 고민하게 된 것도 전부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러운 황자님 때문이었다.
이렇게 예쁘고 멋지고 귀엽고 다정한 황자님과 매일 티타임을 즐길 수 있다니,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손에 쥐는 것보다 더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이 어린 황자님을 좋아하게 되어, 지금은 정말 무엇을 내어주고서라도 이 황자님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알렌님.”
“형슈님.”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는 건 이런 거겠지. 우리는 바보처럼 마주 보며 헤헤 웃었다. 손을 잡아달라며 내미는 자그마한 손을 꼭 잡은 채로 우리는 제4궁을 나섰다.
그러나 제4궁을 나선 이후 내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는 빠르게 사그라졌다. 궁을 나서자마자 나와 알렌 4황자에게로 몰려드는 시선이 따가운 탓이었다.
‘유리 황녀가 있을 땐 이렇게까지 노골적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처음엔 알렌 4황자와 함께 어제 그리다 만 벽화를 보러 갈까 생각했으나 지금 상황을 보니 무리일 듯했다. 애초에 유리 황녀도 없이 전부터 나를 못마땅해하던 시녀장을 뚫고 거기까지 갈 용기도 없긴 했지만.
알렌 4황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둘만의 시간을 즐기지 못했다. 들리진 않지만 나를 두고 수군거리는 목소리며, 시선들이 신경 쓰였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자꾸만 등이 굽고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 불편한 시선들을 피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점점 인적이 드문 길로 걸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 안을 돌아다니는 시녀들과 병사들이 거의 보이지 않을 즈음, 정신을 차려보니 제4궁과 꽤 떨어진 곳까지 걸어와 있었다.
“형슈님?”
뒤늦게 제4궁과 너무 멀어진 걸 알고 당황해 멈춰 서자 알렌 4황자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기가…… 어디지.”
순간 곁에 있는 알렌 4황자의 존재도 잊은 채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른이고, 보호자인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말을 중얼거린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는 찰나였다.
“여긴 주로 제국을 방문한 귀빈들이 머무는 궁이라고 하더라고요.”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타인의 음성과 함께 청은색의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미 한 번 만난 적이 있음에도, 한순간 눈앞의 존재가 꽃의 정령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다. 어쩜 저렇게 아름다운 색을 가지고 있는 걸까. 새하얀 백합을 한 아름 품에 안고서 눈앞에 불쑥 나타난 그녀는 정말 인간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우리 구면이죠?”
멀뚱히 인사도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하는 내게 성녀 아리아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예쁜 눈동자를 휘며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점점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게 되었다.
“작은 황자님도 반가워요. 황자님과는 처음 뵙는 것 같네요.”
왜 성녀가 나타난 거지, 왜 내게 저렇게 웃으며 말을 거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동안 성녀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선 알렌 4황자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녀는 예쁜 얼굴로 예쁘게 웃으며 몸을 낮춰 알렌 4황자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저는 성국에서 온 아리아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알렌 4황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다 그녀가 말을 걸어오자, 갑자기 아이답지 않게 무척 근엄한 얼굴을 하고선 손가락 다섯 개를 쫙 펼쳐 보였다.
“난 알렌 스위티 카지스라고 한다. 올해 다섯 짤이다.”
혹시 누가 말을 걸면 저렇게 답하라고 한 걸까. 평소 해맑고 순진무구한 알렌 4황자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위엄(?)있는 태도에서 유리 황녀의 향기가 풍겼다.
“어머, 아직 다섯 살밖에 안 되셨는데 정말 의젓하시네요.”
“헤헤.”
성녀가 당당하게 자기 소개를 하는 알렌 4황자를 칭찬하자, 아이가 수줍은 듯 웃으며 내 팔에 살짝 매달려왔다. 그 모습에 성녀가 “수줍어하시는 모습도 귀엽네요.”라며 짧게 웃었다.
“클레어 헤더…… 영애 맞죠?”
어느새 알렌 4황자와는 인사를 끝내고 내 쪽을 돌아본 그녀가 불쑥 물어왔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가 민망한 듯 웃으며 답했다.
“황성에 오래 머물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들이 귀에 자꾸 들어와서 알게 됐어요.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아, 아뇨.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성녀가 내 이름을 알고, 또 그걸로 그녀에게 사과까지 받을 줄은 몰랐던 나는 허둥대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갑자기 손을 뺀 게 불만인 듯 알렌 4황자가 금세 다시 내 손을 낚아채 갔지만.
“일전에 연회에서 무례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어요. 황녀 전하께 조금…… 당황스러운 말을 들어서, 그땐 저도 모르게 그만.”
“아뇨, 정말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겐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나는 알렌 4황자에게 손을 꼭 붙잡힌 채로 대신 고개를 열심히 내저었다.
“애초에 저는 성녀님께 사과를 받을 만한 위치도 아니고요.”
내 입으로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고 현실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의 사과 자체를 거절하는데, 돌연 성녀가 화가 난 듯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
“네?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헤더 영애가 어디가 어때서요? 제가 무례를 저질렀으면 사과를 하는 게 당연한 거죠. 거기에 위치고 뭐고 그런 게 어디 있나요!”
성녀는 보기보다 격정적인 면이 있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갑자기 흥분해선 펄쩍 뛰며 예쁜 얼굴을 들이미는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나였다.
“앞으론 그런 말하기 없기에요, 알았죠?”
내가 대답할 때까지 절대 물러나 주지 않을 것 같은 그녀의 강압적인 태도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그걸로 부담스러운 시선 공격이 끝날 것이라 여겼건만,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음에도 그녀는 쉽게 비켜서지 않고 여전히 한 뼘 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내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해왔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내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있던 알렌 4황자마저 안절부절 못할 정도였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 한없이 신비롭고 신성한 존재라고 여겼던 사람이, 지금은 그 환상을 와장창 깨부순 채 평범하디 평범한 여자애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묘하게 유리 황녀와 비슷하다는 듯한 느낌도 받았고.
“그런데 헤더 영애…….”
이번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긴장된 침을 삼키는데 그녀는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어 또 나를 당황케 했다.
”가까이서 보니 진짜 미인이네요. 완전 내 취향……이 아니고,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또 순간적으로 그녀의 분위기나 말투가 바뀌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이나 말투가 기이했다. 마치 여러 사람이 그녀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전부 가면을 뒤집어쓰듯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거나.
‘괜한 비약인가.’
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털어내곤 그녀가 내게 건넨 말에 주의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