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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1) (40/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1)

나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상체를 알렌 4황자에게로 기울였다. 갑자기 내가 다가가자 움찔 긴장하는 아이의 몸을 두 팔로 가만히 끌어안았다. 아무리 본인이 허락했다고는 해도, 한 나라의 황자님을 이렇게 멋대로 끌어안아도 되는 걸까, 하는 머뭇거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 작은 천사를 꼬옥 끌어 안아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알렌님, 정말 좋아해요.”

내 가슴에 가만히 기대어오는 작은 몸을 끌어안은 채 다정하게 속삭였다. 홀로 괴로워하고 슬퍼했을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기를 바라며.

“저는 절대 알렌님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런 내 마음이 전해진 걸까, 품 안에 있던 아이의 몸에서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눈물을 떨구며 흐느끼는 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알렌 4황자가 고개를 들어 내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붉게 물든 눈동자를 예쁘게 휘며 웃었다.

“알렌도요. 알렌도 형슈님 정말 정말 조아해요. 계속 가티 있고 시퍼요. 그리구 이짜나요.”

알렌 4황자는 갑자기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살짝 뒤로 몸을 물렸다.

하지만 채 거리를 벌리기도 전에 알렌 4황자가 내 옷깃을 힘껏 붙들어오는 통에 거리 벌리기는 실패했다.

“형슈님은 알렌의 생명의 은인이에요!”

벌써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도 아는구나, 너무 장하고 너무 귀여워, 라고 생각한 찰나.

“형슈님께 보답을 하고 시퍼요!”

보답이라는 어려운 단어까지 나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너무 똑똑하고, 너무 귀여운 황자님의 외침에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띠고 말았다.

“저는 알렌님이 다치지 않고 건강하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나는 내 옷깃을 생명줄처럼 쥐고 있는 알렌 4황자의 손등을 토닥이며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지 싶었지만 알렌 4황자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보답…… 하고 시퍼요.”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어깨까지 축 늘어뜨리고는 그렇게 말하는데, 도저히 그 애타는 눈빛과 몸짓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 작은 천사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바라는 대로 보답을 할 수 있도록, 뭐든 적당한 걸 찾아서 말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어, 어떡하지.’

당황한 나는 초조하게 머리를 굴렸다.

“아, 저, 저기, 그럼…….”

일단 급하게 말을 던져놓고,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든, 뭐라도,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알렌 4황자가 내게 줄 수 있을 만한 걸 찾아야 했다.

내가 뭔가를 말하려 하자 아이가 다시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 반짝이는 눈을 모른 척 아이의 기대를 배신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부담스럽고도 사랑스러운 눈을 마주하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다, 우물쭈물 겨우 말을 꺼냈다.

“제가 조금 더…… 생각해봐도 될까요?”

“생각나면 바로 말해줘야 해요?”

알렌 4황자는 기대했던 것과 다른 말이 나오자 살짝 실망한 듯 귀여운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렸다.

“누님이 오면 오늘도 가티 황성 탐험해요! 저번에 알렌은 잠들어버려서 못 가짜나요.”

“네, 그렇게 해요.”

다행히 아이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밝게 웃어주었다. 함께 황성 탐험을 하자는 말에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성 탐험 얘기를 하니 자연히 어제 그리다 만 벽화가 떠올랐다. 온실 뒤의 벽화도 계속 그리고 싶었고, 그걸 알렌 4황자에게 보여주었을 때 아이의 반응도 궁금했다. 좋아해 줄까? 기뻐해 주면 좋을 텐데, 얼른 그리고 싶다.

아이를 조금 놀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직접 말을 하진 않고, 혼자 들떠선 근질거리는 손을 가만두질 못했다.

알렌 4황자와 나는 둘이서 머리를 맞댄 채 오늘은 어디로 탐험을 갈까 고민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시간이 꽤 지나도 유리 황녀가 돌아오지 않았다.

살짝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있으니 알렌 4황자가 기다리다 지쳐선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누님이 안 와요.”

“그러게요, 조금 늦어지시나 봐요.”

“알렌이 가볼까요?”

“중요한 얘길 하고 계시면 곤란해하시지 않을까요?”

히잉.

아직 어린 아이다보니 가만히 기다리는 게 힘든 듯, 알렌 4황자가 내 팔에 매달린 채로 칭얼거려왔다.

“누님이 빨리 왔으면 조캤어요.”

“금방 오실 거예요.”

나는 어린 황자를 달래다 아직 멀쩡하게 티 테이블 위에 있는 케이크를 발견하고는 얼른 그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저기 있는 케이크라도 드시면서 기다리시는 게 어떨까요?”

“형슈님도 가티 머거요!”

딸기가 올라간 달콤한 케이크를 보고는 조금 마음이 풀린 알렌 4황자가 다시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씩씩하게 말했다. 나는 의자 두 개를 질질 끌어다 다시 티 테이블 옆에 두고 알렌 4황자가 의자에 앉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알렌 4황자는 내가 혼자 의자를 옮긴 것에 살짝 불만이 있는 기색이었지만, 케이크를 한 입 먹고는 금세 또 마음이 풀린 듯했다.

사이좋게 케이크를 나눠 먹으면서도 나는 계속 시계를 확인했다. 셋이서 함께 황성 탐험도 하고, 어제의 그 벽화도 완성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계속 안절부절 못했다.

알렌 4황자보다 내가 더 기대에 부풀어선 계속 문가를 돌아볼 때였다.

문이 열리고, 드디어 유리 황녀가 돌아왔다.

“누님!”

“유리님, 다녀오셨어요?”

나와 알렌 4황자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가 유리 황녀를 반겼다. 그런데 밝은 미소를 돌려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유리 황녀는 그녀답지 않게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네…….”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성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유리 황녀의 표정을 살피던 나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춰 섰다.

나는 나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또 어떤 식으로 나를 밀어내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다가갈 수 없었다. 내 눈을 피하는 유리 황녀를 불안하게 지켜보기만 할뿐.

“누님, 누님! 오늘도 가티 황성 탐험해요!”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한 알렌 4황자만이 유리 황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외쳤다. 얼떨결에 알렌 4황자에게 끌려오던 유리 황녀가 돌연 우뚝 멈춰 섰다. 어리둥절해하며 돌아보는 알렌 4황자의 시선마저 피한 채로 그녀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 난 빠질게.”

곤란해하는 눈빛이 그녀의 눈동자를 스쳤다.

곤란해한다? 아니, 그보다는.

꺼린다, 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 그쪽이 더 맞는 느낌이었다.

유리 황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알렌 4황자의 손을 밀어냈다.

“오늘은 제가 혼자 생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다른 방에서 잘게요.”

알렌 4황자나 내가 뭐라고 더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죄송해요.”

한 번 더 사과의 말을 남기고, 눈 한 번 맞춰주지 않고서, 유리 황녀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쿵, 하고 굳게 닫히는 문소리가 마치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알렌 4황자와 꽤 긴 시간 그녀를 기다린 것치고는 너무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민 것도, 그걸 거부당한 것도 처음이었다. 뭐, 이렇게 표현할 만큼 거창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리 황녀가 나를 거부한 건 사실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충격이 컸다.

“형슈님…….”

살며시 옷깃을 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알렌 4황자가 가지런한 눈썹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황성 탐험 못 해요?”

유리 황녀에게 거절당한 것이 알렌 4황자에게도 충격이었을 거라는데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유리님은 조금 피곤하신가 봐요.”

불안한 마음을 감춘 채 나는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몸을 낮춰 알렌 4황자와 눈을 맞추고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아쉽지만…… 시간도 늦었고 하니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 다 함께 가는 게 어때요?”

“네에.”

착하고 다정한 아이는 애써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떼 한 번 쓰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알렌 4황자가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이후에도 해가 완전히 기울 때까지 둘이서 계속 함께 가보고 싶은 곳들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실망하고, 나는 나대로 우울한 분위기를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어지러워.’

게다가 아무리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료했다고는 해도, 나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남은 미열에 머리가 뜨겁고 시야가 흐릿해질 즈음, 알렌 4황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유모를 불러 알렌 4황자를 부탁한 후, 적당히 주위를 정리했다.

알렌 4황자까지 내보내고 보니 커다란 방 안에 나 홀로 남겨진 느낌이 더 크게 와닿았다.

황성에 온 이후 혼자 이 방에 남겨진 건 처음이었다. 항상 유리 황녀나 알렌 4황자가 곁에 있었기에 이 방이 이렇게 크다거나, 너무 커서 위압감이 느껴진다거나,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이 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해서인지, 머리가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창가에 다가가 서늘한 유리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온도가 옮아와 그나마 열이 좀 식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느낌이라 아예 창을 열고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밤이 되어 서늘해진 바람이 피부에 닿는 게 무척 기분 좋았다.

가만히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으며 나는 오늘 평소와 달랐던 유리 황녀의 표정과 말투, 행동들을 떠올렸다.

내가 무심코 유리 황녀를 불쾌하게 할만한 말이나 행동을 했던 건 아닐까. 나도 모르게 실수를 했다던가, 거슬리게 했던 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당장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성녀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만 해도 셋이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그럼 혹시 성녀와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래서 단순히 기분이 안 좋았던 것뿐인 걸까.

하지만 그럼 왜 그렇게까지 나를 거북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걸까. 그때 분명 유리 황녀는 나를 피하고 싶어 했다. 그것만은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벌써 내가 싫어진 건 아닐까 하는, 괴로운 생각을 하게 되고 만다.

결국 밤새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 겨우 잠이 들었다. 잠깐만 자고 일어나야지 했는데 그새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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