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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0) (39/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0)

갑자기 성국 중심부에 하급 마물이 나타나는 거며, 하필이면 그 마물을 성녀가 마주하게 되는 거며. 개연성이라고는 밥 말아먹은 에피소드였지만, 작가는 엑스트라 하나를 잔인하게 불구로 만드는 잔혹한 전개로 부족한 개연성을 덮어버렸다.

[난 그 애를 지키고 싶었어.]

여자애는 작고, 귀엽고, 착한 아이였다. 아리아는 벌레 하나 쉽게 죽이지 못하는 선하디선한 그 애가 다치길 바라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성국에서도 있을 곳이 없어지고, 평생 지팡이 없이는 혼자 힘으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로 살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애가 다치지 않도록 이야기를 바꾸기로 했지.]

아리아는 에피소드가 나올 즈음부터 마물과 마주치지 않도록 제 거처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처 밖으로 나올 일이 있으면 반드시 성기사들을 대동했고, 시중을 드는 아이들은 일절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

[결과가 어땠을 거 같아?]

잠시 말을 끊은 아리아의 청색 눈동자가 한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고통스럽게 눈을 감는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유리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아리아의 다음 말을 기다렸고,

[죽어버렸어.]

후회했다.

[물론 그날은 죽지 않았지. 하지만 그다음 날 나를 죽이려고 침입한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어.]

듣는 게 아니었는데.

모르는 게 나았는데.

[다시 말해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아리아가 잠시 텀을 두고 짧게 내뱉은 말에 유리는 숨을 멈췄다.

[지금 네가 하려는 거, 전부 의미 없단 뜻이야.]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발버둥을 치든, 변하지 않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걸.]

머릿속이 새까매졌다.

더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네가 멋대로 이야기를 바꾸거나 하면 그 애만 더 위험해질 거다.]

그 순간 떠오른 건, 클레어 헤더가 처음으로 이 황성에 왔을 때의 기억이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게 분명한 상처가 그녀의 뺨에 있었다. 입술은 터져서 피가 굳어있고, 얼굴은 퉁퉁 부어선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후에 그때의 상처가 한 집에 살고 있던 사촌에게 폭행당한 상처라는 걸 알고 억지로 그녀를 황성으로 데리고 왔다.

클레어 헤더가 갑자기 혼자 사라졌던 밤에, 무릎과 다리에 상처를 안고 돌아왔던 기억도 떠올랐다.

[실제로 원래 에피소드엔 없었는데, 영향이 갈 만큼 큰 사건이 생겼지?]

원래는 그 상처들도 존재하지 않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 내가 멋대로 이야기 전개에 관여해서 클레어 헤더가 다친 건 아닌가?

그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니었으면 정말 위험하지 않았어?]

그리고 이틀 전, 자신이 흘린 피로 범벅된 바닥에 무력하게 주저앉아있던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여자, 원래 에피소드가 나오기도 전에 죽을 뻔한 거 아니야?]

쿵, 하고 뭔가에 세게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이 몸을 감쌌다.

[그런데 그 여자 뭘 했기에 그 정도로 심하게 다쳤던 거야?]

완전히 얼이 빠져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유리를 향해, 아리아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때 당시엔 워낙 상황이 다급하기도 했고, 다들 일일이 제게 그걸 설명해줄 분위기가 아닌지라 조용히 상처만 치유해주고는 물러났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본 에피소드가 시작되기도 전에 뭘 하면 그렇게 심하게 다칠 수 있는 건지 궁금했다. 여자의 오른팔의 살이 너덜거리고 뼈가 드러날 만큼 심각한 상처의 원인이.

[설마 제국의 황성 안에 마물이나 자객이 들어왔을 리도 없고?]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기댄 채 아리아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였다.

제 질문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상대는 영 정신을 못 차리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이, 괜찮아?]

[어, 뭐?]

보다 못해 테이블을 탁탁 두드리며 묻자, 그제야 제 목소리가 들린 듯 초점이 돌아오며 시선을 맞춰왔다.

아리아는 귀찮지만 어쩔 수 없이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그 여자 왜 그렇게 다쳤던 거냐고.]

[아아…….]

유리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중얼중얼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렌이 벽에 걸린 액자를 건드렸는데……. 그게 와르르 떨어지는 바람에 다쳤어.]

말을 꺼내고 보니 그때의 상황이 다시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괴로운 얼굴을 했다.

유리의 대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리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한쪽 입꼬리를 당겼다.

[거봐, 이상하지?]

[…….]

[애가 좀 건드렸다고 액자가 떨어지고, 고작 액자가 좀 떨어졌다고 그 여자가 그렇게까지 심하게 다치다니.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잖아.]

냉정하게 상황을 내려다보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다. 귀를 틀어막고 그럴 리가 없다며 소리를 빽 질러대고 싶었다. 유리…… 아니, 김유리는.

[그게 바로 이 세계가 그 여자를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야.]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을걸.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그 여자는 죽을 테니까.

[주연이 아닌 존재가 원작을 무시하고 멋대로 무대 위에 오르는 걸 용서할 수 없다는 거지.]

눈앞의 상대가 아닌, 손에 닿지 않는 존재가, 이 거대한 세계가 제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결국 너도, 그 여자도 퍼즐을 완성하기 위한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만 깨닫게 되겠지.]

머릿속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제자리가 아닌 곳에 조각을 맞춰봤자 퍼즐은 완성되지 않으니까.]

실컷 웃음을 터뜨린 목소리가 진영에게 나직이 속삭여왔다.

네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클레어 헤더의 죽음을 앞당길 뿐이야, 하고.

* * *

나는 아주 부담스러운 눈빛 공격을 받고 있었다.

유리 황녀가 잠시 자리를 비우고, 그녀가 따로 말을 해둔 것인지 황실의 의원이 들어와 내 상태를 간단히 살피고 나갔다. 한차례 우르르 쏟아지듯 들어온 시녀들이 땀에 젖은 내 옷을 갈아 입혀준 후, 알렌 4황자를 위한 달콤한 케이크와 과자들도 테이블 위에 가득 채워놓고 갔다.

나는 의원이 꼭 챙겨 먹어야 한다며 주고 간 쓰디쓴 약을 억지로 마시고, 기운이 없어 다시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러자 그런 내 움직임을 꼼짝 않고 지켜보던 작은 인기척이 조심스럽게 움직여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알렌 4황자였다.

알렌 4황자는 유리 황녀가 방을 나간 이후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내 곁에 머물렀다.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도, 약을 마실 때도, 약이 너무 써서 물을 마시려 할 때도,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을 때도. 얌전히 내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각인된 새끼 오리처럼 나를 졸졸 쫓아다녔다.

뭔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싶어서, 몇 번인가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게 전부라, 반대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어디 몸이라도 안 좋은 건 아닐까, 나는 줄곧 걱정스러운 눈으로 알렌 4황자를 지켜보았다. 마찬가지로 알렌 4황자도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계속 눈을 들여다보고 있는 상태라, 결국 내가 괜히 딴 곳을 바라보는 척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래도 신경은 쓰여서 슬쩍슬쩍 옆눈으로 아이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살폈다.

“형슈님…….”

한참 만에야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몇 번을 들어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었지만, 나를 부르는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얼른 대답했다.

“앗, 네!”

알렌 4황자는 먼저 말을 꺼내고도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바닥에 앉은 채로 침대의 시트만 만지작거리며,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오물거리는 게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혹시…….”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자 겨우 용기를 낸 듯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알렌 시러요?”

나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잠시 당황했던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네? 그럴 리가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왜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하지만 알렌 때문에 형슈님 다쳐짜나요.”

아이는 침대 시트를 당겨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가린 채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피가 진짜 마니 나써요. 알렌 무서워써요. 엉엉 울어써요.”

“말했잖아요. 저는 알렌님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리고 이제 하나도 안 아프니까 괜찮아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유리 황녀가 있을 때도 몇 번이나 했던 대답을 똑같이 반복해줬지만, 알렌 4황자의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제 딴엔 울음을 참느라 딸꾹질까지 하는 모습이 점점 더 마음 아팠다.

“이거 봐요. 상처도 하나도 없죠.”

나는 아예 오른쪽 팔의 소매를 둥둥 걷어 매끈한 팔을 보여주며 이젠 괜찮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애썼다.

알렌 4황자는 일부러 더 씩씩하게 팔을 붕붕 휘두르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머뭇거리며 내 쪽으로 조금 더 다가왔다.

“알렌이 만져봐도 돼요?”

“당연하죠.”

나는 혹시라도 아이가 다시 침대 시트 뒤로 숨어버릴까, 잽싸게 팔을 내밀었다.

알렌 4황자는 먼저 눈으로 한참 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내 피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내 눈치를 잠깐 보고는 작고 하얀 손을 천천히 뻗어왔다. 마치 깨어지기 쉬운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이 상처가 있었던 자리에 닿았다.

보이는 그대로 매끄러운 피부가 만져지자 안심한 듯 아이의 손이 다시 떨어졌다. 나는 따스한 체온이 멀어지는 것에 묘한 아쉬움을 느끼며 알렌 4황자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나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슬픔, 걱정과 두려움으로 물들어있던 눈동자가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밝아졌다.

그에 나도 한결 안도했으나, 방심하기가 무섭게 알렌 4황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알렌 이제 조심하께요. 절때 아무꺼나 함부로 만지지 않을 거예요. 형슈님 다치게 하지 않을 거예요!”

피를 쏟으며 주저앉아있던 나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이틀간 죽은 듯이 잠들어있던 나를 보며 얼마나 괴로웠을까. 이 작은 몸으로 그 모든 걸 견뎠어야 할 아이가 가엾고 또 가여웠다.

분홍빛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안타깝게 응시하던 나는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라는 위로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알렌님, 안아봐도 될까요?”

전혀 예상에 없던 말이 나와 놀랐는지, 알렌 4황자가 눈물 젖은 눈으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겨우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인식한 듯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외쳤다.

“저, 저도 그래도 돼요?”

커다란 금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너무나 순수하게 기뻐하는 표정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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