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9) (38/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9)

“저 그런데, 어떻게 제 팔이 이렇게 멀쩡한 거죠?”

유리 황녀를 진정시키고 셋이서 나란히 침대 머릿장에 기대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불쑥 물었다. 상처는커녕 핏자국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팔을 들어 보이며 묻자, 유리 황녀가 뭔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제가 성녀한테 거…… 아니, 부탁을 좀, 했거든요.”

그녀는 왠지 그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계속 말을 안으로 삼키다 억지로 내뱉는 식으로 말을 이었다.

“그, 신성력이 대단하긴, 하더라고요.”

말과는 달리 표정은 그 대단한 신성력이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유리 황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성녀가 나를 도와줬다는 사실에 상반되는 감정이 교차하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해야겠네요.”

“네? 아뇨! 언니가 그럴 필요 없어요! 어차피 그 인간도 다 원하는 게 있어서…….”

유리 황녀는 경기하듯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또 말을 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연회장에서의 일도 그렇고, 또다시 성녀와 대화를 나누긴 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로서는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뭔가 자꾸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유리 황녀가 신경 쓰였지만 내 입장에선 억지로 입을 열게 할 권리는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계속 내게 비밀이 많은 그녀를 오롯이 믿고 있는 나도 어차피 이상하긴 매한가지였고.

“어쨌든 언니는 그냥 무사히 깨어나 준 걸로 됐어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요.”

유리 황녀는 성녀가 나를 치유해준 것에 대해 더는 거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나는 이미 익숙해진 태도로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 황녀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납득해버렸다.

“형슈님, 이제 진짜 하나도 안 아파요?”

“네, 괜찮아요. 알렌님도 괜찮으세요?”

“알렌은 형슈님이 지켜조서 하나도 안 아파요!”

“알렌님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앞으론 둘 다 다치지 마.”

“누님도요!”

똑똑.

환자는 가만히 있으라며 유리 황녀가 떠다준 물도 마시고, 셋이서 알콩달콩 대화를 나누고 있을 즈음.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유리 황녀가 덤덤하게 왜! 하고 외치자 시녀 하나가 공손히 대답해왔다.

“황녀 전하, 아리아 성녀께서 만나 뵙기를 청해오셨습니다.”

곧바로 유리 황녀의 얼굴을 살피니, 그녀는 올 게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거절하고 싶은 욕구가 잔뜩 비치는 얼굴로 한숨까지 길게 푹 내쉬었다.

“응접실로 데리고 가 있어. 나도 곧 갈게.”

* * *

“아, 오셨네요.”

언제 봐도 참 예쁜 얼굴이긴 하다고 생각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존재감에 응접실 안도 평소보다 훨씬 밝은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헹, 유리는 코웃음을 쳤다.

겉은 저렇게 예뻐도 사실 저 속에 다리털이 수북하게 난 남자가 들어가 있다는 걸 안다. 어쩌면 가슴털도 수북하고, 배랫나루도 장난 아닐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우욱,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다들 나가 있어. 차도 필요 없으니까 부르기 전엔 아무도 들어오지 마.”

다른 시녀들이 들락거려도 어차피 대화 내용은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건 기분 문제였다. 유리는 시녀들을 물리고, 성녀를 따라온 성기사들도 복도로 몰아낸 후, 등 뒤로 문을 굳게 닫아버렸다.

성녀와 단둘만 남겨진 유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맞은편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좋은 아침이에요. 황녀 전하.”

둘만 남겨졌는데도 저딴 연기를 계속 할 참인가.

유리는 재차 코웃음을 치며 이 세계의 언어가 아닌 한국어로 치환해 말을 걸었다.

[할 얘기가 뭔데? 나 바쁘니까, 어설픈 성녀 흉내는 그만 내고 용건만 짧게 말해.]

다리를 꼬고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비적거리며, 너와 오래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팍팍 내비쳤다.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갈 때 태도가 이렇게 다른가.]

유리를 따라 소파에 앉은 성녀 아리아의 표정이 변했다.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무표정해지며 삐딱한 웃음을 흘렸다.

[이틀 전엔 나한테 그렇게 매달려서 울며 사정하더니? 그 여자를 치유해주면 뭐든 하겠다고 했던가?]

[아, 그래서 이렇게 나와줬잖아.]

순간적인 변화에도 유리는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이번엔 코가 아니라 귀를 후비적거리는 행위로 상대를 무시해주었다.

무표정하던 아리아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험악한 눈빛으로 유리를 노려보았다.

[너 근데 계속 반말할 거냐?]

[너도 하잖아.]

[너 급식이지? 내가 너보다 최소 2살은 많다?]

[나 열일곱 살이다.]

[야이씨, 미친 새끼네 이거. 4살이나 어린 게 반말 찍찍하고 있어? 학교에서 유교 사상도 안 배웠냐?]

[응, 안 배움~.]

한 마디도 안 지고 나오는 유리의 태도에 아리아의 표정이 점점 더 사나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는 소파에 두 팔을 척하니 걸치고선 아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 싶었던지, 흥분해 벌떡 일어섰던 아리아가 다시 소파에 털썩 앉으며 작게 이를 갈았다.

[이거 완전 또라이네 진짜. 뭔 말이 통해야 말을 하지.]

[또라이는 너지. 더럽게 뭔 남자가 여자 흉내를 내고 있어.]

[나라고 원해서 이러고 있는 줄 아냐!]

울컥해 버럭 소리를 지른 아리아의 고함에 유리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런 취미가 있는 거 아니었어?]

[미친, 정신 차려보니까 이미 이런 꼴이었다고. 선택권이란 게 없었단 말이다.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하긴, 나도 그렇긴 하지. 나도 원해서 차에 치인 거 아니고, 원해서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가 된 게 아니지.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살짝 동질감이 생긴 유리가 아까보다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난 트럭에 치였어.]

[헐, 너도?]

아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너도? 라고 묻는 시점에서 그도 트럭에 치여서 이 세계에 오게 됐다는 걸 알았다.

[환생 트럭 실화냐.]

새삼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당시에 느꼈던 어이없음과 허탈한 감정이 두 사람을 덮쳤다. 둘은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서로가 경험했던 상황들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우연히 이 유치찬란한 인소 느낌 낭낭한 판타지 소설을 발견하게 된 것. 트럭에 치이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대한민국이 아닌, 판타지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세계로 건너오게 되었다는 것. 처음엔 현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그러다 결국 원치 않게 이 세계가 자신이 읽었던 『이세계 소녀, 성녀되다?!』라는 소설 속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

[이건 그냥 내 추측인데, 아무래도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신」인 것 같아. 너도 봤지? 필명이 GOD이었던 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리아가 진지하게 꺼낸 말에 유리가 질렸다는 눈으로 멸시 어린 시선을 던졌다.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미친놈아, 지금 우리 상황도 말이 안 되긴 마찬가지거든?]

유리가 그렇긴 하지, 하고 무기력하게 대꾸하니 아리아가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었다.

[너, 성녀의 존재도 거짓말 같냐? 이 몸의 신성력을 봐놓고?]

이틀 전, 유리는 크게 다쳐 피를 쏟는 클레어로 인해 성녀에게 울며 불며 매달렸었다. 건국기념일이 끝나고도 아리아는 한동안 제국에서 머물 예정이라 얌전히 성 안의 거처에서 머물고 있었고, 덕분에 다친 클레어를 자신의 신성력으로 치유해줄 수 있었다.

아리아는 현존하는 모든 고위신관들과 교황의 힘을 합쳐도 성녀의 신성력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성국이 주장했던 사실이 진실임을 단번에 증명해냈다. 뼈가 드러날 만큼 심각했던 클레어의 상처들을 눈 깜짝할 새에 낫게 하고 힘든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유리는 그 모든 걸 옆에서 지켜보며 기절할 만큼 놀랐지만, 상대가 우쭐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싫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히 행동했다.

[참고로 난 진짜 신의 목소리가 들려.]

아리아가 다시 진지한 분위기를 끌고 와 말했다. 유리는 다시 코를 팠다.

[뭐, 그런 설정이긴 했지.]

[아니, 진짜 내가 들었다고. 제발 진지하게 좀 들어라.]

진심으로 열 받은 듯 저를 노려보는 시선에 유리는 코를 파던 손만 조용히 내렸다.

[너한테 전부 말해줄 순 없지만…….]

생각보다 분위기가 꽤 심각했다.

아리아가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유리를 다시 똑바로 응시해왔다.

[너, 소설 내용을 바꾸려고 하고 있지?]

움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유리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설마 그 여자랑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를 이어줄 생각이냐?]

그렇다, 아니다, 대꾸 없이 유리는 어디 한 번 계속 말해보라는 듯 아리아를 마주 노려보았다.

[관두는 게 좋을 거다.]

[니가 뭔 상관이야. 넷카마 새끼야.]

얌전히 말을 듣고 있던 태도를 바꿔 유리가 앞에 있던 테이블을 거칠게 발로 차 냈다. 신경질적인 그 반응에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아리아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누가 넷카마냐, 이 초딩 놈아.]

씩씩거리며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던 둘의 눈싸움은 아리아가 먼저 한발 물러서는 걸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잘 들어. 나도 처음엔 뭣도 모르고 너처럼 나댔어.]

[야, 진짜 제대로 나대는 거 보여줘?]

[성국에 침입한 마물 때문에 성녀가 죽을 뻔했던 에피소드 기억해?]

또다시 싸움을 걸어오는 걸 무시한 채 아리아가 차분히 소설 내용을 되짚으며 말했다.

유리는 소파에 푹 파묻히듯 기대어 그래서 뭐 어쩌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서 성녀의 시중을 들던 여자아이의 다리가 잘려 나가는 에피소드도 기억하냐?]

『이세계 소녀, 성녀되다?!』는 유치뽕짝 인소 로판 주제에 유독 주변 인물들을 많이 죽이는 소설이었다. 조연인 클레어 헤더부터, 그 외 지나가는 엑스트라들도 수도 없이 죽어 나갔다.

대부분이 주인공인 성녀 아리아와 리하르트 아델 공작의 주변에서 상황의 절박함을 드러내거나 주인공들의 감정선 변화를 위해 소모성으로 다치거나 죽어갔다.

그중 하나가 제일 초반부에서 성녀가 성국에서 지낼 당시의 에피소드인데, 어느 날 갑자기 하급 마물 하나가 성국의 중심부까지 왔고, 하필이면 그 마물이 성녀의 앞에 나타났었다.

그로 인해 성녀가 위험에 처했고, 그때까진 자신이 이세계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꿈이라고만 여기던 여주인공이 드디어 이 모든 게 현실이라는 걸 자각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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