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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8) (37/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8)

욱신.

오른쪽 팔이 욱신거렸다. 아니, 욱신거린다기보다는 뭔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나는 그제야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온통 붉은색이었다. 내 팔도, 입고 있는 드레스도, 황후궁의 복도 바닥도. 아까 스치듯 본 붉은빛은 전부 내가 흘린 피였다.

상처는 꽤 깊어 보였다. 피가 너무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검으로 길게 베어낸 것만 같은 상처였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언니!”

괜찮다고, 다가오시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려 했는데. 입술만 벙긋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뒤늦게 소란을 듣고 달려온 기사들이 무슨 일이냐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녀들의 외침에 그들도 유리 파편 가운데 있는 나를 발견한 듯했다. 하지만 기사들 역시 유리 파편과 피 웅덩이 속에 있는 나를 보고는 섣불리 움직이질 못하고 머뭇거렸다.

왠지 점점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분명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데, 귀가 먹먹하니 소리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느낌이 났다. 계속 나를 부르는 유리 황녀의 외침도 아주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소리가 희미했다.

시야도 안개가 낀 것처럼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어지러웠다. 피를 순식간에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몸이 휘청거렸다. 어떻게 팔을 뻗어 지탱할 새도 없이 몸이 기울었다.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 위로 얼굴부터 처박히려는 찰나, 콰지직, 망설임 없이 유리를 밟고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향이 코끝을 스쳤다. 다가온 팔이 피투성이가 된 내 팔과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들어왔다.

왜 매번, 이럴 때만 이 사람을 마주치는 것 같은 기분일까.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이 이상 귀찮고 성가신 계약 상대라고 여겨지고 싶지 않은데. 난 왜 항상 이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걸까.

“왜 또 이렇게 다쳐있어요.”

그러게요, 하고 바보 같은 대답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

분명히 마탑으로 떠났다고 들었던, 지금 이 황성에는 없어야 할 사람의 품에서.

* * *

다시 눈을 떴을 때 곁에는 알렌 4황자와 유리 황녀가 있었다. 알렌 4황자는 내 바로 옆자리에 얌전히 몸을 말고서 잠들어 있었고, 유리 황녀는 바닥에 앉아 머리만 침대에 기댄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혹시 내가 다친 일로 울거나 한 걸까. 지친 얼굴로 잠든 두 사람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있는 게 마음이 아팠다. 차가운 수건을 가져와 닦아주고 싶지만 내가 움직이면 그 움직임에 곤히 잠든 두 사람이 깰 것 같았다.

‘목말라.’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둘의 모습이 신경 쓰여 편한 자세로 바꿔주고 싶고, 나는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싶었다. 그러려면 일단 이 침대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저렇게 곤히 자는 아이들을 깨울 수도 없고 어쩌나 싶었다.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았다. 커다란 창을 통해 환한 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바깥이 환한 걸 보아하니 다행히 그리 오래 잠들어 있었던 건 아닌 듯했다.

잠들기 직전의 기억들을 천천히 되짚어보았다. 유리 황녀, 알렌 4황자와 함께 카롤리나 황후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황후궁 안에서 내 그림을 발견했고, 두 사람이 예쁘다고 칭찬해준 것이 기뻤었다.

액자가 알렌 4황자 위로 떨어졌고, 나는 그런 알렌 4황자를 감싼 채 바닥에 쓰러졌다. 떨어진 액자에 부딪힌 듯 등과 팔이 아팠고, 피가 많이 났던 것 같다. 그리고.

―왜 또 이렇게 다쳐있어요.

헛것을 들었던가, 내가 꿈을 꾼 게 아니라면 분명 그 자리에 레이몬드 2황자가 있었다. 유리 조각들을 밟고 지나와 피 웅덩이 속에 있는 나를 붙잡아 주었다. 그 당사자가 내가 아니라면,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의 등장 같은 로맨틱한 이야기다.

한숨이 나왔다.

‘또 폐를 끼쳤어.’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의식을 잃기 전 기억을 미루어 짐작해봤을 때 다친 나를 구해준 건 아마 레이몬드 2황자일 터다. 여기 이 침실까지 옮겨준 건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 당시에 내게 다가와 준 건 그가 유일했을 것이다.

나를 도와주지 않은 다른 이들을 원망하는 건 아니다. 그 사람들도 분명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뿐일 테니까. 애초에 난 그런 취급이 익숙하기도 했고.

“으음…….”

팔의 상처가 궁금해 몸을 살짝 틀었을 뿐인데, 그 미세한 움직임을 느낀 건지 유리 황녀가 작게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였다.

움찔거리던 눈꺼풀이 힘없이 올라가며, 잠에 취한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어, 언니!”

내가 깨어있다는 걸 알자마자 유리 황녀는 제가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언니, 괜찮아요? 나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어디 아픈 덴 없어요?”

갑자기 튕기듯 일어난 유리 황녀로 인해 침대가 크게 출렁였다. 덕분에 알렌 4황자도 잠에서 깨어나 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아기 천사도 나를 발견하고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내 가슴에 와락 안겨 왔다.

“형슈님! 갠차나요?”

거의 동시에 깨어난 두 천사로 인해 허둥대던 나는 일단 왼팔로 알렌 4황자를 안아주며 대답했다.

“네, 네. 괜찮아요.”

“진짜요? 팔도 안 아파요? 등 쪽은? 조금이라도 상처가 욱신거린다든가 하진 않나요?”

무서울 정도로 몰아붙이는 유리 황녀의 질문에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려 상처가 났었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잠옷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지만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든가, 붕대가 감겨 있다든가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상처가 아프다는 느낌도 없었고.

나는 냉큼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휴우우.”

유리 황녀가 그제야 안도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급한 마음에 덜컥 부탁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돌팔이]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돌팔이]가 뭔가요? 하고 묻는 대신, 나는 신기하게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오른팔을 슬며시 들어보았다. 지금은 마취약 덕분에 아프지 않은 것뿐이고, 혹시 꿰매놓은 상처가 벌어질까 무척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누워 있는 상태로 팔을 들어 올리자 잠옷의 소매 부분이 스륵 내려가며 피부가 드러났다.

흉측한 상처가 드러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팔은 깨끗했다. 상처 따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또 내가 악몽을 꿨던 것뿐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일단 겉보기에는 완벽하게 상처가 아물었는데, 그래도 혹시 언니가 아플까 봐 걱정했거든요.”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리 황녀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언니 이틀 내내 깨어나질 않아서요.”

귀여운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진 채 나를 빤히 응시해왔다. 나를 향한 걱정 가득한 눈동자 속에 초췌한 얼굴의 내가 비쳤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다니. 나는 내심 놀란 마음을 감췄다.

“나랑 알렌이 계속 언니 옆에 있었어요.”

이번엔 나 잘했죠? 하고 칭찬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오늘 새벽까지 둘째 오빠도 자주 와서 들여다보고 갔는데, 지금은 또 마탑에 불려가서 없어요.”

갑자기 화제가 레이몬드 2황자에게로 옮겨갔다.

“저 둘째 오빠가 그렇게까지 화내는 거 처음 봐서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유리 황녀는 말을 하면서도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평소에도 좀 사람 대하는 게 냉하다 싶긴 해도, 막 그렇게 소리 지르고 화내는 타입은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그때 막 주위에 멍청하게 서 있던 기사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한테 뭘 멍청히 서 있는 거냐고 소리지르고, 시녀장과 다른 시녀들한테도 이번 일은 그냥 보아 넘기지 않겠다 그래서 다들 벌벌 떨었다니까요. 괜히 옆에 있는 나까지 기가 죽어서 말 한마디 못하고 숨죽이고 있었잖아요.”

워낙 표정이 다양한 유리 황녀인지라, 그때 그때 바뀌는 표정만으로도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무겁고 심각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언니가 알렌을 감쌌을 때보다는 덜 무서웠지만요.”

한참 레이몬드 2황자가 무서웠다는 얘길 진지하게 하던 유리 황녀가 돌연 눈물을 글썽였다.

유리 황녀는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는 내 오른손을 꼬옥 잡아 오더니, 그 위에 엎드리듯 제 얼굴을 묻었다.

“언니, 알렌을 구해줘서 고마워요.”

유리 황녀가 붙잡은 손에 따스한 물기가 닿았다.

“하지만 난 언니가 언니 자신도 좀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울음을 억지로 참아내는 듯 말이 뚝뚝 끊어져 흘러나왔다. 내 손을 붙잡은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마치 나를 놓치기라도 할까 필사적으로 붙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미아내요. 알렌이 잘못해써요, 형슈님.”

유리 황녀의 영향인지 어느새 알렌 4황자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안쓰러운 두 천사를 토닥이며 달랬다. 알렌 4황자는 팔을 뻗어 등을 끌어 안아주고, 유리 황녀는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두 분 다 울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그때도 살짝 놀랐을 뿐이지, 별로 아프지도 않았고요.”

“아프지 않긴요! 아프지 않을 리가 있어요? 상처가 얼마나 심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유리 황녀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 난 그때 언니가 주, 죽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피가 너무 많이 나와서, 진짜…… 너무 무서웠어요.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진짜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고요.”

눈물로 범벅된 예쁜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나를 노려보다 다시 푹 고개를 침대에 묻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요. 부탁이에요. 난 언니가 없으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이유가 없단 말이에요.”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리는 통에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유리 황녀가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다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말한 부분은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아직 어린아이다 보니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극단적으로 말이 튀어나온 것뿐이리라 짐작했다.

“네, 죄송해요. 앞으론 저도 조심할게요.”

나는 더는 유리 황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가만히 그녀가 바라는 답을 내어주었다.

흐어엉, 유리 황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아예 내 위로 쓰러지듯 나를 끌어 안아왔다. 나와 유리 황녀 사이에 낀 알렌 4황자가 숨이 막혀 괴로운 듯 켁켁 소리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렇게 셋이서 끌어안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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