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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7) (36/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7)

유리 황녀는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말을 내가 들었다는 걸 알고서 무척 당황해하고 미안해했다.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놀라 멍하니 바라본 것뿐인데, 그녀는 내가 화가 났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황급히 그녀를 진정시키며 내가 전혀 화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런데도 유리 황녀는 한동안 내게 계속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네와 오히려 내가 더 그녀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는 언니 그림이 훨씬 더 좋아요. 빈말이 아니고 진짜로요.”

유리 황녀가 울상이 된 얼굴로 내 팔을 꼭 붙잡아왔다. 혹시라도 내가 화가 난 게 아닐까 불안한 눈동자로 내 표정을 살피는 유리 황녀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정말 괜찮은데. 어차피 둘 다 내가 그린 거니까, 비슷하다고 여기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닌데. 그렇게 말해줄 수 없는 현실이 조금 답답하고, 슬펐다.

유리 황녀를 달래가며 나머지 아르가디아들에도 색을 입혀가는데, 1/3 정도의 꽃밭을 완성했을 무렵 해가 저물고 말았다. 빛을 내는 마력구를 가져와 계속 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유리 황녀가 너무 피곤해 보이기도 했고, 나 역시도 처음 도전하는 벽화가 생각보다 어렵고 체력을 깎아 먹는 작업이라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손이며 얼굴, 팔과 옷 여기저기에 안료가 묻어 엉망진창인 상태로, 나도 유리 황녀도 저녁 식사고 뭐고 일단 침대에 쓰러져 쉬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채로 제4궁에 돌아왔다. 그리고 이제 정말로 푹 쉴 수 있겠구나, 생각했으나 뜻밖의 귀여운 방해꾼이 있었다.

“오늘 알렌 빼고 둘이서만 탐험해쬬!”

쉬익쉬익.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알렌 4황자가 오늘 하루 자기만 따돌린 것에 대해 항의를 해온 것이다.

“알렌 네가 오늘 낮잠 잔다고 가버려서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알렌 4황자의 우는 얼굴에 쩔쩔매는 나와 달리, 유리 황녀가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에서 깬 뒤로 계속 우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알렌 4황자는 그런 제 누님의 반응에 상처를 받은 듯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알렌도 누님하고 형슈님하고 같이 탐험하고 싶었는데…….”

아예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한 알렌 4황자를 보며 나는 유리 황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제발, 이 사랑스러운 황자님이 울지 않게 해주세요. 유리 황녀는 나의 간절한 시선을 읽고는 더 피곤해 보이는 눈으로 제 동생을 돌아보았다.

“알았어, 알았어. 내일 또 하면 되잖아. 울지 마, 뚝.”

“그럼 오늘 형슈님이랑 갔던 데 똑같이 가줄 거예요?”

“그런데 언니랑 다르게 넌 맨날 지겹게 보던 황성 안인데 또 가야겠어?”

“녜!”

유리 황녀가 제 소매를 들어 알렌 4황자의 얼굴을 벅벅 문지르듯 닦으며 말하자, 알렌 4황자가 여전히 코를 훌쩍이면서도 기대 어린 눈동자로 나와 유리 황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내일도 어마마마 궁 같이 탐험하자, 됐지?”

유리 황녀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알렌 4황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그리고 내일 엄청 멋진 것도 보여줄게. 기대해도 좋아.”

“멋진 게 모에요?”

“그건 내일 알려줄게.”

그리고 다음 날 우리는 셋이서 손을 꼭 잡은 채 정말 어제와 똑같이 카롤리나 황후궁을 돌아다녔다. 여전히 카롤리나 황후궁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였다는 사실에 긴장해 굳어있는 나와 달리,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유리 황녀도 어제는 싫은 기색이었지만 막상 셋이서 함께 돌아다니다 보니 즐거운 듯 웃음이 많아졌다. 알렌 4황자에게 온실 뒤의 벽화도 빨리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고.

“아, 저깄다!”

유리 황녀가 반가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가리킨 곳을 돌아보니 어제 함께 보았던 나의 아르가디아가 있었다.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황후궁의 한쪽 벽면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그림을 보며 나는 또다시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알렌 너도 이건 처음 보지?”

“와아아.”

퍼즐처럼 조각난데다 그림이 워낙 크다 보니 전체를 보려면 멀찍이 떨어져서 봐야 했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알렌 4황자를 질질 끌어와 멀리서 그림을 바라보게 하자, 어린 황자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며 별처럼 반짝였다.

“진짜 예뻐요.”

화려한 수식어구 하나 없이, 어린아이가 입을 헤 벌린 채 웅얼웅얼 내뱉은 예쁘다는 말이 그렇게 기쁠 줄이야. 그 말을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게 여전히 서글프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기쁘고 뿌듯한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아, 근데 진짜 장난 아니긴 하다. 봐도 봐도 감탄만 나오네. 어마마마가 경매에 매달리셨을만 하긴 해.”

유리 황녀가 뚫어져라 그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유리 황녀를 홀깃 바라보았다.

“흥! 그래도 우리 언니가 더 개쩔지만. 이 사람도 벽에 그리면 우리 언니처럼은 절대 못 그릴걸?”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혼자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개쩔지만은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 칭찬의 의미겠거니 생각했다.

‘맞아요, 벽에 그리는 건 생각보다 더 어렵더라고요.’

아마 지금 이렇게나마 웃을 수 있는 것도 전부 유리 황녀 덕분이겠지.

나는 어제 밤늦게까지 매달려 있었던 새하얀 궁의 벽화를 떠올렸다.

처음으로, 누군가의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처음으로, 익숙한 천이 아니라 딱딱한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다. 처음으로, 내가 그린 그림을 누군가에게 칭찬받았다.

처음으로,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행복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모든 게 다 처음이었다.

유리 황녀를 만난 이후, 빈민가의 뒷골목에서 죽은 쥐와 함께 뒹굴고 있다고 여겼던 내 인생도 조금은 가치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설령 내 착각일 뿐이라 할지라도,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던 삶이 변했다.

어젯밤 처음으로 눈을 감고 잠드는 게 아쉽다고 생각했다. 내일이 기다려지고, 가슴이 설레어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사람과 함께 황성 탐험을 하고, 온실 뒤의 궁에서 벽화를 이어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완성된 벽화를 본 유리 황녀가 기뻐해 주길 바랐다.

자신이 사랑받는 이유를 죽은 그 사람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고 말하던 무표정한 눈동자가 신경 쓰였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그런 유리 황녀를 위해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조심스럽게 낸 의견이 받아들여졌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내가 유리 황녀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기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웃고 있던 나는 찌릿 매섭게 날아드는 시선을 느끼고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어제 유리 황녀로부터 강제로 입막음을 당한 시녀장이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시선을 피했다. 시녀장 또한 나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 중 하나였기에, 내심 미안한 감정이 있었던 나는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죄송하다 사죄를 한다고 해서 좋아할 사람도 아니겠지,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거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였다.

덜걱.

걸쇠를 이용해 걸어둔 액자가 벽과 마찰하며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유리 황녀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있던 나는 의아한 눈으로 다시 그림을 돌아보았다. 시녀장과 유리 황녀 또한 나와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고, 어느샌가 혼자 액자 가까이에 다가가 있는 알렌 4황자를 발견했다.

보호자들의 무관심 속에 아직 어린 황자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림을 응시하며 액자에 손을 댔다.

“이거 진짜 꽃 가타요.”

“앗, 전하. 손을 대시면 위험……!”

다급한 시녀장의 경고가 떨어지기 무섭게, 벽과 연결된 걸쇠 부분이 덜걱하고 소름끼치는 소리를 냈다.

이곳은 카롤리나 황후의 거처였다. 모든 게 주인을 닮아 완벽하게 정돈되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장소였다.

그러나 허술하게 연결되었을 리 없는 걸쇠가 빠지면서, 액자들이 와르르 무너지듯 쏟아져 내렸다.

“알렌!”

유리 황녀의 비명이 들렸다.

나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걸쇠가 빠지는 걸 본 순간부터 난 이미 알렌 4황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미친 듯이 내달려 알렌 4황자의 자그마한 몸을 힘껏 끌어안고 나서야 겨우 정신이 들었다.

액자들이 쏟아지고 바닥에 부딪혀 깨어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나는 쏟아지는 액자를 전부 내 몸으로 받아낼 각오로 알렌 4황자를 끌어안고 있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등과 팔을 내리치고 예리한 뭔가가 살갗을 긋는 것만 같은 기분 나쁜 감각이 느껴졌다.

분명 아플 터인데, 아픈 것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품 안의 알렌 4황자가 무사한 건지 아닌지, 내 신경은 전부 거기에만 쏠려있었다.

“저, 전하. 4황자 전하…….”

목소리가 무참히 떨려 나왔다. 쿵쿵쿵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몸이 벌벌 떨렸다.

늦은 건 아닐까.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나 몸 어딘가를 다친 건 아닐까, 품 안의 아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조차 무서웠다.

“언니!”

유리 황녀가 다급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 어떡해. 어떡해. 아, 으, 어떡해. 진짜.”

유리 황녀가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눈물로 흐려진 눈을 겨우 들어 그녀를 돌아보려 했다. 알렌 4황자가 괜찮은지, 나 대신 봐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돌아보는 시야가 붉었다. 바닥에 깨어진 유리 파편들도 온통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붉은빛이 점점 퍼져갔다.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혀, 형슈님…….”

울음기 가득한 알렌 4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온통 붉은 바닥에서 시선을 돌려 알렌 4황자를 내려다보았다. 내 품 안에서 고개를 든 아이의 얼굴은 다친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에 안도한 나는 천천히 아이를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유리님, 알렌님, 이쪽으로 나오세요. 유리 파편 때문에 위험합니다!”

“이거 놔! 지금 그게 중요해? 언니가 다쳤단 말야아아!”

시녀장과 함께 시녀들이 유리 파편들을 피해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옆으로 멀찍이 끌어냈다. 시녀들에 의해 억지로 나와 떨어진 유리 황녀가 몸부림을 치며 내게 다가오려 했다.

시녀들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부서진 액자와 유리 파편들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나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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