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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6) (35/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6)

“아니에요, 오히려 그 사람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본 적은 없지만 이 몸이랑 꼭 닮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왠지 정이 가기도 하고요.”

다행히 유리 황녀는 불쾌한 기색 없이 쿡쿡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살짝 물러났다.

“나라면 내가 죽고 없어져도 남은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마다 슬퍼하지 않기를,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라게 될 것 같거든요.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곳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주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녀는 몸을 휙 돌려 궁 주위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그렇게 보면 아바마마도 참 잔인하지 않아요? 세상에, 이게 뭐야. 여기만 무슨 저주받은 마왕성 같잖아.”

나는 그녀를 따라 황제의 여동생이 살았다고 하는 궁과 그 주변을 돌아보았다.

황량한 황무지 그 자체인 땅과 그 중심에 솟아있는 먼지 하나 없이 새하얀 궁.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도 전부 무책임하게 방치해두고 있는 게 아니라, 일부러 이런 모양새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잡초가 자라지 않게 주기적으로 땅을 관리하고, 순백색의 궁 또한 더럽혀지지 않도록 매일 닦고 또 닦은 느낌이 났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새하얀 벽을 쓸어보았다. 궁의 본래 주인이 원했던 것인지, 궁의 외벽은 다른 궁들에 비해 지나치게 새하얀 느낌이었다. 처음 이 궁을 보았을 때 무심코 새하얀 캔버스를 떠올린 게 그런 이유였다.

여기라면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 찰나 머릿속에서 청은색의 아르가디아가 가득한 풍경이 그려졌다.

그릴 수도 있겠다, 생각한 마음은 어느새 그려내고 싶다, 로 바뀌어 있었다.

“꽃과 나무를 심는 게 안 된다면 궁 외벽에 벽화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살아왔던 곳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유리 황녀의 말이 시발점이 된 생각이었다. 나는 머뭇머뭇 말을 꺼내며 이미 궁의 외벽을 새하얀 캔버스처럼 여기며 머릿속으로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그분이 좋아하던 아르가디아를 잔뜩 그려서 꽃밭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요.”

유리 황녀를 똑 닮은 사랑스러운 사람이, 미처 다 피어나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한 어린 왕녀를 위해, 그녀가 짧은 생을 보냈던 궁에 그녀가 좋아했던 아르가디아를 가득 피워내 주고 싶었다.

“아, 하지만 역시 그것도 싫어……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호기롭게 의견을 내긴 했지만 막상 말을 내뱉고 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유리 황녀가 아까처럼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기에 더 그랬다.

또 괜한 말을 꺼낸 걸까.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멍하니 있던 유리 황녀가 퍼뜩 정신이 든 듯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헉, 아뇨! 그거! 완전 괜찮은데요?”

방금까지 넋이 나간 얼굴로 서있던 사람답지 않게 잔뜩 흥분한 그녀가 방방 뛰며 외쳤다.

“의외로 도전해볼 가치는 있겠어요.”

그러고는 살짝 장난기 섞인 얼굴로 그녀가 씩 웃었다.

“일단 몰래 그려놓고 안된다 그러면 살짝 혼나고 지우면 되죠. 내가 언니한테 억지로 시켰다고 하면 돼요. 으음, 어디 보자. 누구를 불러다 그리게 하는 게 좋을까. 궁중 화가는 절대 협력 안 해줄 거고……. 요즘 잘 나가는 화가들 중에 아바마마 눈치 안 보고 나한테 협력해줄 사람이 있으려나…….”

유리 황녀는 내 제안을 무척 흡족해하며 벽화를 그릴 사람이 누가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저.”

혹시 거절당하거나 나를 못 미더워하는 눈동자를 마주하게 될 각오를 다진 채, 나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 제가…… 그리면 안 될까요?”

“네? 언니가요? ……아!”

예상대로 유리 황녀는 당황스러워했다. 하지만 잠깐 어리둥절해하더니 돌연 손뼉을 짝 마주치며 태도를 바꿨다.

“그러면 되겠네요! 헐, 맞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번엔 내가 당황스러워할 차례였다. 거절당했을 때, 그림을 눈앞에서 그려 보인 후 실력 테스트라도 받고서 허락을 받아낼 준비까지 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그녀가 대환영의 기색을 보이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유리 황녀에게 내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말한 적이 없으니, 그녀가 그런 사실을 알 리도 없을 텐데.

아마 워낙 다정하고 마음 씀씀이가 고운 사람이니, 혹시 내가 상처받을까 봐 무턱대고 허락을 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씁쓸했지만 지금은 뭐라도 좋았다. 그리고 싶은 걸 그릴 수만 있다면.

한번 그리고 싶다고 생각하자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괜찮다면 지금부터라도 가능해요.”

때마침 유리 황녀도 잔뜩 들뜬 얼굴로 내게 묻기에 나는 당장이라도 그릴 수 있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자 유리 황녀가 어딘가로 토다닥 달려가더니 작은 양피지 조각과 만년필을 들고 와 내게 내밀었다.

“언니, 여기 필요한 거 뭐든 다 적어요!”

양피지와 깃펜을 받아 당장 생각나는 대로 벽화를 그리는데 필요한 것들을 적어주자 유리 황녀가 다시 그걸 들고 어디론가 바쁘게 달려갔다. 그 자그마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나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유리 황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덩치 큰 기사들을 앞에 세워둔 채 허공에 위협적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한 마음에 다가가니,

“알았지? 어마마마나 시녀장한테는 비밀이야. 누구 하나가 일부러 가서 이르거나 들키면 전부 다 좌천이야. 셋째 오빠한테 보내버릴거야. 북부는 엄청 춥고 무시무시한 거 알지? 아니다, 이번에 데르카샤 해에 네 번째 문이 열렸다던데 원한다면 그쪽으로 보내줄 수도 있어. 거기 지금 장난 아닌 거 알지? 그러니까 다들 처신 잘하고, 빨리 가서 여기 적힌 거 다 구해와. 황성 안에서 말고 밖에 가서 구해와야 해. 자, 빨리빨리 움직여!”

어딘가 협박에 가까운 유리 황녀의 명령에 그녀의 호위를 맡아 늘 곁에 있는 기사들의 표정이 하나 같이 울상이었다. 유리 황녀의 말대로 하자니 차후의 뒷감당이 걱정되고,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자니 그건 또 그거대로 뒷감당이 걱정인 듯했다.

나는 내가 괜히 일을 벌여 저 사람들에게도 못 할 짓을 시키게 된 것 같아 미안해졌다. 혹시 내게 비난과 원망의 눈초리가 날아들까 일순간 두려워진 나는 기사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뒷걸음질을 쳐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만 진심을 담아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 * *

“절대 안 됩니다. 당장 그만둬 주십시오.”

유리 황녀의 철두철미한(?) 계획과 달리, 안타깝게도 우리의 계획은 금세 들통이 나고 말았다.

시간이 지나도 유리 황녀가 제4궁으로 돌아오지 않고, 온실 쪽에서는 왠지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니 눈치 빠른 시녀장이 찾아와 우리 계획을 저지하고 나섰다. 그녀는 그 어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을 듯한 냉철한 얼굴을 하고서 유리 황녀 앞에 섰다.

“황후 폐하께서도 황제 폐하께서도 무척 노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황녀 전하라 하셔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실 겁니다. 지금이라도 그만두신다면 두 분께 고하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대략적인 구상을 끝내고 벽에 스케치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유리 황녀의 명령에 재깍 재료들을 구해온 기사들 덕분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시작할 수 있어 기뻐했던 것도 잠시였다.

유리 황녀의 기사들과 달리 쉽게 회유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대의 등장에 유리 황녀도 골치가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시녀장, 잠깐 나랑 얘기 좀 해.”

나를 도와주겠다며 기사들과 함께 안료와 전색제를 열심히 섞고 있던 유리 황녀가 벌떡 일어나 시녀장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은 무척 심각한 얼굴로 나란히 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뭔가 대화가 잘 풀린 듯 유리 황녀만이 활짝 웃으며 걸어 나왔다. 반대로 시녀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와 보는 이를 걱정스럽게 했다.

또 저 안에서 무슨 협박…… 아니, 얘기를 하신 걸까.

내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자, 유리 황녀가 다가와 걱정 말라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얘기가 아주 잘 됐어요, 언니.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요.”

시녀장은 마치 유리 황녀에게 강제로 목소리를 빼앗긴 양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더니, 자신은 이만 가보겠다며 비틀비틀 사라져버렸다.

“저 사람이 어마마마의 눈은 가려주기로 했으니 더 안심하고 일낼 수 있게 됐어요. 아바마마한테만 안 들키면 될 것 같아요.”

유리 황녀는 무시무시한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더니 다시 안료를 섞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녀장을 포섭하는데는 성공한 듯하지만, 황제와 황후의 뜻을 거역하고 허락도 없이 일을 벌이고 있는 현 상황이 그리 마음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애초에 내가 시작한 일. 점점 일이 생각보다 커지는 것 같아 불안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관둘 수는 없었다. 나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다시 목탄을 쥔 채 벽에 스케치를 계속해 나갔다.

“언니 대단해요. 완전 멋있어. 더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꽤 긴 시간에 걸쳐 스케치를 완성하고 시험 삼아 아르가디아 한 송이에 색을 칠해 보았다. 완성된 스케치가 뭔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커다란 붓을 이용해 여러 색을 조합하고 입혀 한 송이를 완성해냈다. 청은색을 표현하는 게 생각보다 더 어려워 진땀이 났다.

곁에서 그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유리 황녀는 눈을 반짝이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유리 황녀의 과장된 칭찬에 기쁘면서도 쑥스러운 마음에 수줍게 웃고 있는데,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도 오오, 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오오, 정말 멋있습니다.”

“실력이 대단하시군요.”

“제가 본 벽화 중에 단연코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리는데 집중하느라 유리 황녀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기사들까지 나를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나였다. 뒤늦게 이 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내가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밀려드는 창피함에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런데 왠지 어마마마 궁에 있던 아르가디아와 조금 느낌이 비슷한 것 같기도…….”

내가 그린 아르가디아 한 송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리 황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도망치듯 황성을 뛰쳐나갔을지도 몰랐다.

“헉, 아니. 제가 말을 좀 거지같이 했네요. 아르가디아 외형으로 알려진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당연히 비슷할 수밖에 없죠! 기분 나쁘셨죠.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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