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5) (34/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5)

아르가디아.

신비로운 청은색의 꽃잎이 무척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으로,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이나 늪, 가파른 절벽 아래에서만 피어나며, 그 꽃잎을 삼키면 죽어가던 이들조차 살려낸다고 알려진 전설과 같은 꽃.

역사서나 고문헌을 살펴보면 분명히 존재했었다고 알려진 꽃이지만, 지금은 대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꽃이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음유시인들이 드래곤이나 요정의 존재를 지금도 실존한다는 식으로 흘리듯이, 그저 상상 속에서 만들어냈을 뿐인 환상의 꽃이라고.

처음 이 꽃을 보았을 때부터 줄곧 아르가디아라는 이름에 푹 빠져있던 나로서는, 지금도 이 꽃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계에 나타난 성녀 아리아처럼.

아르가디아와 성녀 아리아. 둘은 닮아 있었다.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외형과 타인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힘을 지니고있는 점이 그러했다.

아마 그래서였겠지, 그녀를 마주한 순간 다른 모든 걸 잊을 만큼 이 사람을 그리고 싶다고 갈망하게 된 건.

‘그 사람도 그랬겠지.’

욱신.

‘아마 내가 그 사람이었어도 나 같은 건 버리고, 그녀에게로 갔을 테니까.’

유리 황녀 덕분에 잊고 있던 둔탁한 통증이 가슴을 스쳤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이 통증은, 미련한 자신 탓이라는 걸 안다.

이젠 잊어야지, 잊어버려야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에게 세뇌라도 걸 듯 몇 번이고 다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 아리아.

어쩌면 나는 그녀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누구나 원하는 그런 존재.

마찬가지로 아르가디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집착하게 됐던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입안이 썼다.

“언니, 우리 이번엔 후원의 온실로 가봐요! 아르가디아는 없지만 진짜 예쁘고 신기한 꽃들 많거든요.”

유리 황녀는 나와 둘이서 황성 탐험을 한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내 어두운 분위기를 전혀 읽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내 감정에 짓눌려 그녀를 걱정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니까.

나는 미련한 감정들을 털어내고서, 유리 황녀가 내민 손을 꼬옥 붙잡으며 그녀를 향해 밝게 웃어 보였다.

“네, 어서 가요.”

* * *

유리 황녀의 말대로 카롤리나 황후의 온실은 온갖 진귀한 꽃과 나무들로 가득했다. 책으로만 겨우 접했던 희귀한 꽃들부터 시작해, 멸종 위기종으로 이제는 사고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나무들도 잔뜩 있었다.

온실 내부도 무척 관리가 잘 되어 있어 무척 쾌적했고, 어딜 봐도 화려하고 신기한 풍경들뿐이라 마치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평소에도 아르가디아를 포함해 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유리 황녀의 존재도 잊은 채 홀린 듯이 온실 안을 돌아다녔다. 눈으로 즐기고, 향기를 맡고, 가끔은 손으로 살며시 만져보기도 하면서 한참 동안 온실에 푹 빠져있었다.

내가 전에 없이 흥미롭게 눈을 반짝이며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유리 황녀도 딱히 내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나를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가끔 돌아보면 무척 흐뭇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어, 조금 쑥스럽긴 했지만.

점점 온실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막다른 유리벽이 보였다. 온실이 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여기까지 온 거면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그때까지도 유리 황녀는 까맣게 잊은 채 꽃과 나무들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궁은…… 뭐지?’

유리 황녀가 근처에서 보이지 않아 불안해하던 나는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처음 보는 궁의 모습에 시선을 가져갔다.

유리 황녀를 따라 최근 황성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녔지만, 저런 궁은 본 적이 없었다. 누가 일부러 감춰두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카롤리나 황후궁을 지나다닐 때도 저 궁은 보이지 않았다. 황후궁과 후원의 이 거대한 온실에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던 듯했다.

내 눈길을 끈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황성 안은 어딜 가도 항상 꽃과 나무들이 가득했다. 카롤리나 황후의 취향대로 황성 안은 온통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다는 느낌이었건만, 저 궁 주변만은 폐허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황량한 황무지였다.

일부러 감추고, 일부러 아무것도 접근하지 못하게 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사람도, 꽃과 나무도, 그 무엇도.

뭘 감추기 위해 이 넓은 황성 안에서 저 궁만을 저렇게 둔 걸까. 호기심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그때 등 뒤에서 터벅터벅 걸어와 곁에 선 유리 황녀가 내 시선을 따라 정면의 유리벽을 바라보았다.

“아아, 저건.”

유리 황녀는 보자마자 저 궁의 정체를 알아채고는, 내가 궁금한 게 뭔지도 대충 안 모양이었다.

“옛날에 내 고모님, 그러니까 아바마마의 여동생이 살았던 궁이에요.”

그리고 손을 들어 뺨을 한번 긁적거리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마마마와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거의 자매처럼 지낸 사람이라고 하는데, 딱 지금 제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생각보다 무거운 이야기가 나와 당황했지만 유리 황녀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잇고 있어 나도 애써 태연한 척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아바마마도 어마마마도 그 사람을 너무 아끼고 사랑했던 터라 두 분 다 상심이 컸다고 들었어요. 아바마마는 황제 위에 오르자마자 저 궁을 없애려고 하셨대요. 저 궁을 볼 때마다 그 아이가 생각나서 견딜 수가 없다면서요. 저 궁을 없애지 못하게 막은 건 어마마마였죠. 아바마마의 눈에 띄지 않게 하겠다고 하면서 지은 게 이 황후궁이고요. 원래 황후궁은 동쪽에 있어야 하는데, 어마마마의 궁만 남쪽에 있는 게 그 이유죠.”

유리 황녀가 손을 뻗어오더니 내 손을 덥석 붙잡아왔다.

“언니, 이리 와 봐요.”

그러고는 그대로 나를 이끌고 온실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온실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눈앞에 보이는 궁의 모습은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쓸쓸해 보였다. 왠지 이 주변만 시간이 멈추고, 바람도 멎어있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아바마마도 워낙 완강하셔서, 하나 더 조건을 건 게 고모님이 계실 때와 달리 이렇게 궁 주변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거였대요. 더는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자각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때와 똑같은 궁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그 아이가 저 궁 안에 뛰어나올 것 같으니까. 괴로웠던 거겠죠.”

유리 황녀는 계속 내 손을 잡은 채 궁 가까이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고모님께서 꽃과 나무를 좋아하셔서 궁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화사한 꽃나무들로 가득했다고 들었어요.”

탁, 유리 황녀의 손이 새하얀 벽에 닿았다. 마치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처럼 희고 깨끗한 벽이었다.

“어마마마가 아르가디아를 좋아하는 건 아시나요?”

갑자기 돌아온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유리 황녀가 답을 기다리지 않고 살짝 불평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좀 집착한다 싶을 만큼 아르가디아를 그린 그림들이나 관련된 고서들을 모으시는데, 진짜를 구할 수 없으니까 대체품 같은 거죠. 그것도 원래는 고모님이 좋아하는 꽃이었대요. 그래서 원래도 이 궁 주변에 아르가디아와 비슷한 푸른색 계열의 꽃들이 가득했다네요. 그리고…….”

잠깐 말이 끊겼다.

왜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까. 옆을 돌아보자, 새하얀 궁을 올려다보는 유리 황녀의 눈동자가 침잠하는 늪처럼 깊이 가라앉아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에 나는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춘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저를 많이 닮았다고 해요.”

냉랭하고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핏 들은 말로는, 제가 거의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난 것처럼 똑 닮았다고 하더라고요.”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처럼, 내가 아는 유리 황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과 목소리였다.

“아마 그 사람들이 내게 그토록 목을 매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진짜 아르가디아를 구할 수 없는 대신 아르가디아가 그려진 그림에 비정상적으로 집착하듯이. 그 사람과 닮은 존재를 통해 그 사람의 흔적을 찾고 있는 거예요.”

낯선 그녀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두고, 유리 황녀는 무심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마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이.

유리 황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조금도 슬퍼 보이지도, 괴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왜 순간 그녀가 엉엉 소리 내어 우는 것보다 더 안타깝고 애처롭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그럴 리가 없다고, 두 분은 분명 유리님 자체를 사랑하고 계실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분들의 감정을 감히 내가 함부로 판단할 순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저는 그분을 몰라요.”

대신 나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유리님이세요.”

나의 진심을 그녀에게 전하기로 했다.

가만히 궁을 올려다보기만 하던 유리 황녀의 눈동자가 그제야 내게 향했다.

“언니, 저 좋아해요?”

유리 황녀는 동그란 눈동자를 몇 번 깜빡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지만 딱히 기뻐 보이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그에 나는 살짝 기가 죽었다.

괜한 말을 꺼낸 걸까. 나 같은 게 좋아해 주는 게 뭐가 그리 기쁘다고. 황제와 황후의 내리사랑에 비하면 나 같은 사람의 마음 따윈 정말 아무것도 아닐 텐데.

유리 황녀가 나를 따르는 게 기뻐서 조금 우쭐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며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네.”

순간 와락 내 품에 안겨드는 자그마한 몸을 반사적으로 받아냈다. 너무 놀라 어정쩡하게 팔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있자,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나를 꼭 끌어안은 유리 황녀가 웅얼웅얼 말을 내뱉었다.

“헤헤, 완전 기뻐.”

다른 말은 더 없이 그것뿐이었지만 이번만은 유리 황녀가 진심으로 기뻐 보였기에 나도 조심스레 팔을 둘러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줘요?”

한참 서로를 가만히 끌어안고 있던 중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유리 황녀가 내 품에서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아! 혹시 내가 그 사람을 질투하거나 괴로워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나는 머뭇거리다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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