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4) (33/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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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황녀가 주재하는 황성 탐험 1일차.

나는 떨고 있었다.

영웅의 일대기에서 존재한다고 알려진 드래곤의 레어를 침범해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속을 태평하게 거닐고 기분이었다. 혹은 신성불가침의 땅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고 벌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공포감이 몸을 감쌌다.

“언니, 이쪽으로 가면 어마마마의 서재가 있어요. 어마마마가 책을 좋아해서 거의 도서관 수준으로 책이 엄청 많아요.”

낮잠 시간이 되어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던 알렌 4황자는 유모의 품에 안겨 보냈고, 오른손을 유리 황녀에게 붙잡힌 채로 나는 카롤리나 황후의 황후궁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리 황녀의 존재 자체가 통행증이나 다름없어 경비병들을 간단히 뚫고, 우리는 황후궁을 무슨 산책로처럼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거긴 별로 볼 건 없으니까 대충 훑어보고 후원에 있는 온실 보러 가요. 어마마마가 특이한 걸 좋아하셔서 거기 가면 진짜 신기한 식물들 많거든요.”

유리 황녀가 너무 신이 나 있어 차마 그 분위기를 해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따라다니고는 있지만, 나는 황후의 허락도 없이 감히 황후궁에 다시 발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차후에 나만 따로 불려가 멋대로 황후궁을 들락거린 일에 대해 처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처벌보다는 카롤리나 황후를 다시 일대일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운 거였지만.

그래도 제 딴엔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까지 덧붙여주는 유리 황녀의 성의를 거부할 순 없었다. 나는 자꾸만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고 애써 관심 있는 척 열심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일전에 한 번 왔을 때도 생각한 거지만, 여전히 황후궁 안에는 벽 여기저기에 많은 수의 그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저번보다 더 그림 수가 늘어난 것 같기도 했다. 그 수가 너무 많은 탓에 단순히 취미를 넘어 강박적으로 수집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 이건 못 보던 건데?”

내 손을 잡은 채로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니던 유리 황녀가 우뚝 멈춰 서서 어딘가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유리 황녀를 따라 나도 멈춰 서서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돌아보았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의 왼쪽 끝에는 여러 개의 액자를 두꺼운 실로 연결해 하나의 그림으로 보이게끔 만든 구조의 그림이 있었다.

독특한 형태로 완성된 그림의 정체는 꽃이었다. 보이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색이 달라 보이는 청은색의 꽃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고 알려진 환상 속의 꽃이었다.

이름은 아르가디아. 어떤 이유에선지 오래 전 흔적도 없이 사라져 지금은 각종 역사서와 문헌 속에서만 작게 기록되어있는 꽃이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워 너무 많은 이들이 욕심을 내어 씨가 말랐다고 주장하는 이들과, 애초에 그런 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금까지도 대치하고 있을 만큼 아르가디아에 대한 현 시대의 사람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저렇게 큰 그림을 그리려고 했으면 애초부터 커다란 캔버스를 사용해도 됐고, 작은 캔버스 여러 개를 합쳐 하나의 액자에 넣어도 됐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여러 개의 액자를 실로 연결해 어그러진 퍼즐 조각처럼 보이게끔 했다. 그 연결도 불규칙하고 매끄럽지 않다. 멀리서 보면 완성된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결국 조각조각 난 일부이며 환상에 불과한 걸 보여주듯이.

아르가디아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아르가디아가 존재했다고 믿는 이들과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는 이들이 공존하는 시대를 그리고 싶었으니까. 처음 아르가디아라는 꽃의 존재를 알았을 때부터 줄곧.

황후궁의 복도에는 카롤리나 황후의 취향을 반영한 수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대부분이 과거를 비롯해 현 시대에서도 추앙받는 대단한 화가들의 이름이 새겨진 그림들이었다.

그 속에서 응접실의 바로 앞,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며 시선을 끌고 있는 내 그림을 본 순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감정들이 솟구쳐 올라 가슴을 어지럽혔다.

어째서 이게 여기에 있는 걸까.

멍하니 그림을 올려다보며 생각하는데, 지금껏 그림자처럼 조용히 우리 뒤를 따르던 시녀장이 유리 황녀의 질문에 공손히 대답해왔다.

“최근 황후 폐하께서 가장 빠져계신 화가의 그림입니다. 경매에서 손에 넣기 위해 애쓰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화가의 이름이…….”

쿵, 쿵, 쿵.

가슴 속이 시끄러워졌다. 카롤리나 황후가, 그렇게나 아름답고 대단한 사람이, 내 그림을 좋아해 주다니.

쉽게 믿기지 않으면서도 기뻤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을 만큼 커다란 감동이 전신에 내려앉았다.

“엘루크 왕국의 트뷔에 백작부인이라고, 최근 몇 년 사이의 작품들이 평론가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아 귀족들 사이에선 천재 화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듯합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나는 느리게 시선을 움직여 총 열두 개의 액자 중 가장 오른쪽 아래에 있는 액자를 바라보았다. 액자 속 아르가디아 꽃의 잎 옆에 크게 휘갈겨 써진 이름이 보였다. 벨린 트뷔에.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고 생각이 든 순간, 에젯트 헤더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트뷔에 백작부인이 저번 달부터 계속 재촉하고 있단 말이다. 이러다 거래가 끊기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에젯트 헤더는 웬만해선 자기 고객에 대한 정보를 쉽게 내게 발설하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내 그림이 어디의 누구에게 어떻게 팔려가는지도 모른 채 노예처럼 그리기만 했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얌전히 그림을 그려 내어놓지 않는 나로 인해 무척 초조해하고 있었고, 유독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나를 닦달하다 보니 무심코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었을 터다.

그때는 워낙 상황이 정신없이 흘러가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니 분명 그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가진 여자가 돈으로 산 내 그림으로 화가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 알게 되어 푹 빠지신 모양인데, 한동안 신작을 내지 않아서 기다리고 계시죠.”

카롤리나 황후에게 내 그림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도 잠시였다. 그 기쁨을 밀어내고 가슴 속에 자리하기 시작한 건 억울함과 슬픔이었다.

이 그림은 에젯트 헤더의 손에 넘어가 팔기 위해 그린 게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 한 번은 그리고 싶다, 완성하고 싶다는 내 소망을 이루기 위해 그린 것이었다.

그림을 판 돈의 일부를 받아 몰래 캔버스와 유화 물감을 사들여 그녀의 눈을 피해 그림을 그렸었다. 다른 그림을 그리는 척 몰래 몰래 그리던 그림은, 완성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든 헤더에게 들켜 에젯트 헤더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이 정도면 그동안의 몇 배는 받을 수 있겠다고 좋아하며 억지로 그림을 빼앗아 갔다. 그 후 나는 그림을 빼앗기고, 에젯트 헤더의 말대로 그동안 받았던 돈의 10배는 되는 금액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나는 이 그림을 잊기로 했다. 아니, 억지로 잊어버렸다.

빼앗겼다는 사실도, 내가 이걸 그렸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너무 억울하고, 너무 분하고, 너무 힘들어서.

내가 줄곧 꿈꿔왔던 아르가디아가, 내 영혼을 쏟아부은 그림이, 고작 금화 몇 개에 의해 다른 이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보여진다는 사실이 지독히도 끔찍해서.

“그림은 어려워서 잘 모르겠지만, 진짜 예쁘다. 지금까지 봤던 거 중에 최고인 거 같은데?”

시녀장의 얘길 들으며 가만히 그림을 응시하던 유리 황녀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말했다.

“이렇게 조각 조각 나뉘어 있는데도 진짜 살아있는 꽃 같아.”

일부러 몇 걸음 더 뒤로 걸어가 그림을 바라보다, 다시 또 가까이 다가가 보기도 하더니,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언니는 어때요? 이 그림 멋지지 않아요?”

그러고는 불쑥 내 쪽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어왔다. 그 물음에 반사적으로 이 그림은 제가 그린 거예요,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유리 황녀라면 그 말을 듣는 즉시, 이 그림의 원작자가 나라는 사실을 세상에 밝혀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잠깐 사이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젯트 헤더, 트뷔에 백작 부인, 헤더 자작 부부와 사촌 동생들. 내가 그 낡은 저택 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든, 실제로 난 그 사람들에 의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에젯트 헤더가 날 찾아내 주지 않았다면 난 일찌감치 눈이 내리는 산속에서 혼자 굶어 죽었을 터다. 이렇게 멀쩡히 어른이 되어 유리 황녀를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러니.

“네, 정말 멋지네요.”

결국 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적당한 대답을 골라내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난 지독한 바보에 겁쟁이니까.

나는 유리 황녀에게 시선이 닿지 않게 조심했다. 기쁘면서도 슬펐고, 슬프면서도 기뻤다.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들어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그림에 시선을 고정했다. 나의 아르가디아를 진지하게 감상하는 유리 황녀를 계속 보고 있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롤리나 황후가 내 그림을 인정해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보다 바로 곁에서 유리 황녀가 「예쁘다」고 말해주는 게 훨씬 더 기뻤다. 순수하게 내 그림을 좋아해 주는 마음이 느껴져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그림을 좋아해 준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행복해서.

“어마마마한테 부탁해서 제4궁으로 옮겨달라고 해 볼까? 안 되려나?”

다행히 유리 황녀는 그런 내 이상한 태도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림에만 계속 관심을 보였다. 옆에서 시녀장이 곤란한 얼굴로 쩔쩔매고 있었지만, 나는 제4궁으로 그림을 옮길 방법을 고심하는 유리 황녀를 더없이 애정이 깃든 눈으로 지켜보았다.

언젠가 유리 황녀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나는 그녀 본인보다 더 기뻐할 것이며, 유리 황녀에게 괴롭고 힘든 일이 생긴다면 내가 대신 그 고통을 전부 떠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 대가가 내 목숨이라 해도.

이미 그만큼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으니까.

“언니도 이 꽃 알아요? 이건…….”

“아르가디아, 맞죠?”

나는 유리 황녀의 말을 가로막고 먼저 그 이름을 꺼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내가 좋아하는 상대가 관심을 가져주는 게 기뻐서, 나도 모르게 알은 척을 하고 말았다.

시녀장이 불쾌한 듯 나를 노려보는 시선에 내가 너무 건방지게 말을 꺼냈나 금세 후회가 됐지만.

“앗, 언니도 알고 있네요. 하긴 어마마마 때문에라도 웬만한 귀족들은 다 알고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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