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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3) (32/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3)

“뭐야, 난 알렌이 나쁜 아이라도 좋아할 건데. 알렌은 내가 나쁜 사람이 되면 안 좋아할 거야?”

유리 황녀가 먹던 빵도 내려놓으며 실망 가득한 시선을 던지자, 말빨에서 밀린 알렌 4황자가 당황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 아, 으.”

알렌 4황자는 「후후, 나한테 덤비다니 아직 10년은 이르다. 애송이!」라고 말하는 듯한 유리 황녀를 피해 내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내왔다.

그 시선을 못 이긴 나는 얼른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리님, 그만 놀리셔요. 알렌님 우시겠어요.”

유리 황녀는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리곤 반가운 표정을 짓다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나는 긴장된 숨을 한 번 삼켰다.

평소에도 늘 이름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하던 유리 황녀지만 막상 내가 먼저 말을 꺼내니 살짝 자신이 없어졌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거부당하면 어쩌나 긴장되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 저……. 아까 알렌님이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하셔서……. 혹시 불쾌하지 않으시면 유리님도…… 그렇게 불러도 될까요?”

눈을 보고 말할 용기는 없어 테이블 끝에 시선을 둔 채로 우물쭈물 말을 끝맺었는데, 대답은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

아, 이젠 안 되는 걸까. 어떡하지. 괜한 말을 꺼낸 걸까. 거부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그 순간 타다닥 내 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작고 가냘픈 팔이 내 목을 힘껏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유리 황녀였다.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좋아.”

나를 힘주어 끌어안은 채 유리 황녀가 속삭이듯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행동이 계속 내가 그렇게 불러주기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고, 기쁘고, 행복했다.

“알렌도, 알렌도요!”

토다닥, 발소리가 하나 더. 그리고 이번엔 더 자그마한 팔이 내 팔을 꼬옥 끌어 안아주었다.

이 사랑스러운 천사들은 툭하면 이렇게 따스한 체온을 나눠주곤 했다. 고작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말이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유리 황녀의 팔에 기대어 살며시 눈가를 눌렀다.

* * *

“오, 완전 부러운 풍경이네.”

문이 열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이미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로이안트 3황자가 말했다. 데자뷔를 느끼게 하는 등장이었다.

“뭐야, 아직 북부로 안 돌아갔어?”

그의 등장에 유리 황녀는 씹던 빵을 억지로 삼키며 퉁명스레 말을 받아쳤다.

“성녀 일이 신경 쓰여서 며칠 더 있을까 고민 중이야.”

“그렇게 오래 비워둬도 되는 거냐고.”

“내 부하들이 하나같이 무척 우수하거든.”

로이안트 3황자는 일전에도 그랬듯 유리 황녀의 문전박대에도 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아침 식사에 끼어들었다.

나는 눈이 마주치기 전에 먼저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거의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유리 황녀가 옷깃을 당겨 강제로 앉히는 바람에 제대로 된 인사는 아니었지만.

“세째 형님!”

셋 중 유일하게 알렌 4황자만이 그를 진심으로 반겼다. 어린아이답게 해맑은 미소로 제 형님에게 달려가 안기는 모습이 귀여웠다.

“우리 막내, 오늘도 귀엽네.”

“형님두요!”

“엑, 그건 아니지 않을까.”

로이안트 3황자가 알렌 4황자를 제 무릎에 앉힌 채 내 옆자리에 와 앉았다. 팔꿈치가 살짝 스쳤다. 나는 티 나지 않게 그와 거리를 벌리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우리 막내, 아~아.”

“세째 형님두 아~아!”

그리고 로이안트 3황자와 알렌 4황자가 서로 음식을 떠먹여 주는 우애 좋은 풍경이 잠시 펼쳐졌다. 유리 황녀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도 못마땅한 듯 불쾌한 얼굴이었다. 정확히는 이번에도 로이안트 3황자의 등장이 반갑지 않은 것 같았다.

“언니, 그냥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아예 나더러 자리까지 제 옆자리로 옮기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내심 나도 우애 좋은 두 사람의 옆자리가 부담스럽긴 했기에 못 이긴 척 유리 황녀의 옆자리로 가 앉을 때였다.

“유리, 너. 어젯밤 말했던 거, 그게 다가 아니지?”

알렌 4황자의 몸을 안고 자는 인형처럼 끌어안은 로이안트 3황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

“뭐가?”

“성녀에게 네가 했던 말, 그거 말고 더 있지? 뭐라고 했기에 그 여자가 그렇게 흥분해서 소리를 질러댄 건지 궁금해서 못 견디겠어.”

유리 황녀는 빵에 잼을 바르며 알아듣지 못한 척 되물었으나, 그는 가볍게 무시한 채 태연히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헤더 영애는 알아?”

그리고 질문이 갑자기 내 쪽으로 넘어왔다. 유리 황녀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언니는 끼워 넣지 마.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상관 없으니까.”

꼭 새끼를 지키려는 어미 같은 반응에 로이안트 3황자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오, 별생각 없이 물은 건데 그렇게 반응하니까 진짜 뭔가 있나 싶어지네.”

“아오, 씨.”

“우리 귀염둥이, 오라버니한테 욕하면 안 된다?”

“제발 방해하지 말고 가주라. 우리 지금 진짜 분위기 좋았거든?”

“알았어, 알았어.”

순순한 대답과 함께 로이안트 3황자가 커다란 손으로 유리 황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쓰다듬었다기보다는 일부러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느낌이 더 컸지만.

“사실은 지금 북부로 출발하려는 참이야. 인사차 온 거야.”

“엥, 진짜?”

유리 황녀는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던 제 머리를 완벽하게 헝클어 놓은 만행보다는 그의 대답에 놀라 화를 내려던 사실도 잊은 듯했다.

유리 황녀는 부지런히 잼을 바르던 빵도 내팽개친 채 벌떡 일어나 로이안트 3황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세째 형님, 가는 거예요? 또 언제 볼 수 있어요?”

금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알렌 4황자가 그에게 매달렸다.

로이안트 3황자는 귀여운 막냇동생을 잠시 달래주고는 당장이라도 떠날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마 형님도 오늘 새벽에 급하게 마탑으로 돌아갔을걸? 남서부 쪽 국경이 좀 시끄러워진 모양이야.”

“아.”

로리안트 3황자의 덤덤한 말에 유리 황녀의 놀란 눈이 더 커졌다. 그러다 혼자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그럴 때인가.”

대화를 연결해봤을 때, 마치 남서부 쪽 국경이 소란스러워질 걸 알고 있기라도 했던 사람처럼.

순간 유리 황녀에게 예지력 같은 게 있다는 소문이 있던가, 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헤더 영애도 잘 지내. 그리고 어제 우리 대화 내용은 비밀로 해줘.”

로이안트 3황자가 칭얼거리는 알렌 4황자를 안아 올린 채로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멀뚱히 유리 황녀의 옆얼굴을 살피던 나는 그에 얼른 신뢰가 갈만한 답변을 내어놓았다.

“아, 네! 절대 함구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돼요.”

“응, 그럴 거 같아서 사실 크게 걱정은 안 해.”

군기가 바짝 든 내 대답이 우스웠던지,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그러고는 안고 있던 알렌 4황자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후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다들 다음에 또 봐.”

로이안트 3황자가 방문을 열자, 그의 보좌관으로 보이는 이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는 알렌 4황자와 유리 황녀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보이고는 앞서가는 로이안트 3황자를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작은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느낌이었다.

알렌 4황자는 훌쩍 떠나버린 제 형님 대신 내 곁으로 토다닥 다가와 내 팔에 매달려왔다. 나는 그런 알렌 4황자의 등을 살며시 토닥여주며 유리 황녀의 안색을 살폈다.

유리 황녀는 혼자 뭔가 생각에 잠긴 눈을 하고 있었다. 로이안트 3황자가 남기고 간 말을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도록 나도 말을 아꼈다.

다행히 알렌 4황자도 그런 제 누님의 분위기를 읽은 듯 조용히 내 옆자리에 앉아 나와 시선을 맞춰왔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고는 쉿, 하고 조용히 하자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잠깐 쉬어가는 구간이라고 보면 되려나. 음, 이때는 별다른 서술이 없었던 것 같아서 모르겠네. 구체적인 사건도 모르는데 멋대로 [메인 이벤트]에 끼어들면 좀 위험하려나, 으음.”

유리 황녀는 아예 가슴 앞으로 팔짱까지 낀 채 본격적으로 상념에 잠겼다. 조그맣게 혼잣말도 중얼거리곤 했는데, 중간중간 처음 듣는 기묘한 억양의 단어가 섞여 있는 탓에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에 나도 로이안트 3황자가 남기고 간 말들을 되새겨 보았다.

남서부 쪽 국경에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 그로 인해 레이몬드 2황자가 마탑으로 급히 귀환했다. 그러니 지금 이 황성 안에 레이몬드 2황자는 없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다음, 다음이라는 건 언제인 걸까.

어젯밤 레이몬드 2황자가 유리 황녀의 방을 나서기 전 내게 다가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유리 황녀 덕분에 은근슬쩍 내 잘못이 묻혀 넘어가진 않을까 했는데, 그는 아무래도 다시 한번 건국기념일 연회에서 내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를 지대로 지적하고 넘어가려는 모양이었다.

지은 죄가 있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날 일을 추궁하고 나왔을 때, 뭐라고 변명을 하고 사죄를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말이다.

일단 오늘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용히 안도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을 향한 한숨을 삼키며 테이블 위의 찻잔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새하얀 찻잔 안에 담긴 붉은빛의 홍차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난 내가 또 실수했음을 알았다.

―아리아.

그 이름의 주인을 바라보던 눈동자를 알고 있다.

그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그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은 게 있다.

그 사람은 한 번도 내 이름을 불러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 바로 곁에 있는 내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던 눈동자, 모든 신경은 오로지 그녀에게만 쏠려있다고 외치는 듯했던 몸짓 하나하나까지.

그리고 그 모든 걸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멍청한 내가 있다.

괜찮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죽을 때까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있는 모습 같은 건.

깨닫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사람에게 나라는 존재는 진정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 같은 건.

“언니, 클레어 언니.”

검은 연기가 점점 퍼지듯이 내 몸을 잠식해나가는 그 사람의 기억들이 파지직 깨어지며, 현실로 끌려 나왔다.

옆을 돌아보자, 유리 황녀가 어느새 평소와 똑같은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씩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녀의 뺨에 볼우물이 깊게 팼다.

“오늘은 저번에 다 못한 황성 탐험을 계속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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