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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2) (31/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2)

“헤더 영애도 푹 쉬어요. 오늘 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그는 뭔가 내게도 할 말이 남은 얼굴을 하더니, 유리 황녀와 로이안트 3황자를 의식한 듯 그 말만 남기고는 그대로 유리 황녀의 방을 나섰다.

오늘 일에 대해서는, 하고 말하는 부분에서 묘하게 말을 꾹꾹 눌러 말하는 게 불안했다. 아까 연회장 안에서도 살짝 불쾌해하는 감정이 느껴졌기에 더 그랬다. 무슨 질책이 날아올지는 모르겠지만, 내 잘못을 알기에 나는 그저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클레어 언니!”

두 사람이 방을 나서고, 둘만 남겨지자마자 난데없이 유리 황녀가 등뒤에서 내 허리를 와락 끌어 안아왔다.

깜짝 놀라 그 상태로 유리 황녀를 돌아보자 그녀가 헤헤 하고 지나치게 귀여운 얼굴로 웃었다. 그 사랑스러운 미소에 방심한 찰나.

“언니, 아까 연회장에서 리하르트 아델에게 가려고 했죠?”

그 웃는 얼굴 그대로 싸늘한 음성이 유리 황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약혼자인 우리 둘째 오빠는 나 몰라라 하고 리하르트 아델에게 가려고 한 거 맞아요?”

어느새 웃고 있는 금색 눈동자도 싸늘한 빛을 띠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 나랑 한 약속 잊은 건 아니죠?”

웃는 얼굴이 더 무섭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재빨리 도리질을 쳤다.

“그럼 왜 그랬어요? 얘기 좀 해봐요. 네?”

유리 황녀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앞으로 돌아와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시선 앞에서 제가 죄인입니다 하는 모양새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저기 중앙정원의 커다란 연못 알죠, 언니? 그 연못이 인공적으로 만든 것 치고 진짜 넓고 깊거든요. 그리고 난 수영을 전혀 못 해요.”

“…….”

“내일은 거기로 소풍이나 갈까.”

귀여운 미소와 함께 상큼한 위협이 날아들었다. 당장이라도 그 연못에 뛰어들 것만 같은 유리 황녀의 무시무시한 협박 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제가 잘못했다,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약조를 몇 번이나 하고도, 그 후 나는 장장 3시간에 걸친 유리 황녀의 은근한 위협과 눈물의 호소로 가득한 잔소리에 시달려야 했다.

* * *

“……슈님.”

그건 흔한 자각몽이었다.

황성보다 더 거대해진 유리 황녀가 있었다. 그녀는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드래곤처럼 입에서 불을 뿜으며 거대한 몸집으로 당당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손에는 작은 인형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인형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진 채 유리 황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사람은, 리하르트 아델이었다.

하늘을 향해 불을 뿜어대던 유리 황녀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제 입으로 가져갔다. 아아~하고 아주 맛있는 걸 입안에 털어 넣듯이.

―안 돼!

나는 비명을 질렀다. 정신없이 유리 황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안 돼요, 황녀 전하! 안 돼! 제발!

하지만 아무리 외쳐도 목소리는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고, 유리 황녀는 이미 리하르트 아델을 꿀꺽 삼키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황녀 전하, 그를 돌려주세요! 부탁이에요!

나는 그녀의 앞으로 가 무릎을 꿇고 사정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유리 황녀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마 나도 삼키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에 나는 얌전히 그녀의 손에 붙잡혔다.

이대로…… 유리 황녀에게 먹혀 그와 함께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 황녀는 나를 먹지 않았다.

내 몸을 들어 자신과 가장 먼 곳에 내려두고는 반대쪽을 향해 불을 뿜으며 걸어가 버렸다.

나는 그 꿈속에서,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울어버렸다. 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울며, 이미 저만큼 걸어가 버린 유리 황녀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는 어째서, 항상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만 보게 되는 걸까, 서럽게도.

“형슈니임.”

작고 따뜻한 손이 뺨의 눈물을 닦아주는 느낌이 났다. 따스했다. 포근했다. 나도 모르게 그 자그마한 손에 기댄 채 서러운 마음을 달래어 달라 애원했다. 나 너무 슬퍼. 괴로워. 아파. 날 버리지 마. 계속 곁에 있어 줘.

“형슈님!”

빛 한 점 들지 않던 어두컴컴한 방 안에 한순간 빛이 들어온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에 태양의 빛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태양의 색을 닮은 머리칼과 눈동자였다. 예쁜 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아기 천사가 나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천사의 자그마한 손이 내 뺨에 닿아있었다. 그 체온이 닿은 부분으로부터 서서히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이 났다.

“4황자 전하?”

잠시 혼란스러워하던 내가 자신을 알아봐주자 기쁜 듯 알렌 4황자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알렌이에요! 알렌이라고 불러주세요.”

역시 남매인 걸까. 알렌 4황자는 유리 황녀와 웃는 얼굴도 꼭 닮아 있었다. 웃느라 살짝 밀려올라 간 분홍빛의 통통한 뺨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막 잠에서 깨어나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했던 나는 참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왼손으로 내 뺨에 닿아있는 알렌 4황자의 손을 덮고, 오른손으로는 천사의 분홍빛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헤헤.”

다행히 천사가 거부하지 않고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작게 웃었다. 부드럽고 말랑한 뺨이 닿는 감촉이 죽을 만큼 행복하다고, 평생 이대로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똑똑.

누군가 제 존재를 알려오는 노크 소리만 아니었다면 정말 언제까지고 그렇게 넋이 나가 멍하니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용한 방안을 울리는 노크 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화들짝 놀라 알렌 4황자의 뺨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렸다. 당황하여 급히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푹신한 바닥 탓에 중심을 잃고 잠시 휘청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대충 상황을 보니 난 어젯밤 드레스 차림 그대로 유리 황녀의 침대 위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유리 황녀도 어젯밤 차림 그대로 내 다리를 베고 가로로 누워 잠든 게 보였다. 아마 어젯밤 유리 황녀의 잔소리를 듣다 둘 다 깜빡 잠이 들었고, 아침까지 깨지 않고 쿨쿨 자버린 듯했다.

“형슈님?”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알렌 4황자의 목소리에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얼핏 본 거울 속에 비친 엉망진창인 내 모습과 달리, 알렌 4황자는 평소처럼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알렌 4황자는 어젯밤 연회에 참석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졸린다며 유모의 품에 안겨 연회장을 빠져나갔었다.

그러니 어젯밤의 작은 소동은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와 같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을 터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예쁜 얼굴을 하고는 제가 좋아하는 누님을 깨우러 온 것일 테고.

“형슈님이랑 누님 둘 다 늦잠 꾸러기에요.”

“4황……, 알렌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알렌은 착한 아이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또 헤헤, 하고 웃는데, 너무 귀여워서 손이 가만있질 않았다. 무심코 또 손을 뻗어 천사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실타래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에 감겨오는 황홀한 감촉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아, 나 지금 뭐하는 거지.’

반쯤 정신이 나가 알렌 4황자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는 뒤늦게 놀란 토끼 눈이 된 천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어찌나 놀랐는지, 원래도 커다란 눈동자가 더 동그래져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짓이야. 한 나라의 황자를 무슨 귀여운 강아지 취급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니. 이대로 손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방금 내 행동은 무척이나 불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조금 전에도 잠이 덜 깬 상태로 허락도 없이 아이의 뺨을 만지거나 손을 잡았었다.

나는 다급히 손을 치우고 떨리는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다.

“죄,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

하지만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나는 놀란 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양손으로 내 손을 꼬옥 잡아 오는 알렌 4황자로 인해 이번엔 내 눈이 놀란 토끼 눈이 될 차례였다.

“형슈님이 머리 쓰다듬어줘써. 알렌 조아요.”

말랑말랑 부드러운 뺨이 다시 내 손바닥에 닿았다. 알렌 4황자가 내 손바닥에 얼굴을 기울여 댄 채로 웃었다.

마음이 녹는다, 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이토록 행복한 기분이 들 수도 있는 걸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거부당하지 않았다. 받아 주었다. 받아들여졌다. 그것뿐인데 기뻤다.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올해 5살의 우리 황실 늦둥이 막내 알렌입니다.

웃기게도 그 순간 떠오른 건, 첫만남에서 내게 자신만만하게 외치던 유리 황녀의 목소리였다.

―우리 오빠랑 결혼해주시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도련님이랑 매일 티타임도 가능하십니다.

그때는 잠깐 혹하면서도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 제안을 그렇게 쉽게 거절할 수 있었나 싶었다.

지금의 나라면 절대 불가능했다. 지금은 유리 황녀가 그때보다 더 곤란한 조건을 붙여 제안을 해온다 해도 무조건 받아들이겠다 대답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똑똑.

“전하, 식사를 들일까요?”

때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가 다행스러웠다. 조금만 더 그렇게 있었다면, 내 신분도 잊은 채 알렌 4황자를 품에 꼬옥 끌어안아 버렸을 것 같았으니까.

“아, 마따! 형슈님 같이 아침 머거요!”

노크와 함께 들려온 제 유모의 음성에 알렌 4황자가 반가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외쳤다.

“같이 머그려고 와써요.”

어젯밤부터 씻지도 못한 지저분한 몰골이었지만 그 귀여운 제안을 거절하기엔 알렌 4황자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나는 알렌 4황자에게 유리 황녀를 깨워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재빨리 드레스룸으로 달려갔다. 유리 황녀가 나를 위해 준비해줬던 편한 드레스를 꺼내 갈아입고, 대충 머리를 빗고 세수까지 마친 후 다시 유리 황녀의 방으로 돌아왔다.

그새 방안에 여러 개의 테이블을 합쳐 진수성찬이 차려진 가운데, 유리 황녀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빵을 우물우물 씹고 있는 게 보였다. 빗질도 안 된 부스스한 머리에 눈에는 눈곱도 달고 있었지만 내 눈엔 그 모습조차 예쁘고 귀엽기만 했다.

그 옆에서 알렌 4황자도 야무지게 수저를 쥔 채 수프를 떠먹고 있었고.

“으으, 난 더 자고싶다고.”

“안대요, 누님. 차칸 아이는 일찌 자고 일찌 이러나야 해요!”

“난 착한 아이 안 하면 되잖아.”

“알렌은 차칸 누님이 조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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