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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1) (30/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1)

* * *

“자, 이제 제대로 대화 좀 해보자.”

방 중앙에 있는 티테이블 의자를 끌어와 아무렇게나 털썩 앉은 레이몬드 2황자가 피곤함이 짙게 배인 어조로 말했다.

대사도 그렇고, 일전에도 한 번 지금과 거의 똑같은 상황이 있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대화를 요청한 상대가 침대에 엎어진 채 줄곧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지만.

레이몬드 2황자에 의해 연회장에서 반강제로 끌려 나와 본인의 침대에 내던져지다시피 한 유리 황녀는 지금껏 실성한 사람처럼 웃기만 하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 지, 눈물까지 흘려가며 웃어대는 모습이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또 웃다 지쳐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는 걱정스럽기도 했고.

“이제 그만 좀 웃고, 궁금해 미칠 것 같으니까 제발 얘기 좀 해봐.”

로이안트 3황자가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 다시 한번 유리 황녀를 재촉했다.

“유리, 너 대체 성녀한테 뭐라고 한 거야? 무슨 말 했기에 성녀가 저러는 거냐고?”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폭소를 터뜨린 유리 황녀와 눈물을 보이며 뛰쳐나가 버린 성녀. 그런 두 사람에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폭발할 것 같은 호기심을 안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무엇이며, 대륙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기묘한 언어는 무엇이며, 유리 황녀는 왜 저렇게 미친 듯이 웃어대는 거며, 성녀는 왜 울면서 뛰쳐나간 것인가.

도저히 상황을 수습할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유리 황녀부터 격리(?)시킨 건, 레이몬드 2황자의 판단이었다. 깜짝 놀라 다가온 황제 부부와 황태자에게 사정을 설명한 건 로이안트 3황자의 몫이었고, 나는 그저 얼떨결에 레이몬드 2황자를 따라 이 자리에 있게 됐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유리 황녀의 방 안에 나와 유리 황녀, 레이몬드 2황자와 로이안트 3황자가 서로 다른 이유로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성녀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성녀와 대화할 때 사용한 언어가 더 신경 쓰이는데.”

목이 아픈 듯 켁켁대며 겨우 진정할 기미가 보이는 유리 황녀에게 레이몬드 2황자가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유리 황녀는 그가 건네는 물잔을 건네 받아 잔에 담긴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푸하!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숨넘어갈 뻔했네.”

“지금 우리가 숨넘어갈 지경이거든?”

로이안트 3황자가 침대 끝에 털썩 앉으며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곁에서 지켜본 건 며칠뿐이었지만 유리 황녀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않던 로이안트 3황자였기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살짝 놀라웠다. 그만큼 해소되지 못한 호기심이 답답했던 모양이구나 싶기도 했고.

“알았어, 말할게.”

제 두 오라버니의 초조하고 진지한 표정을 마주한 유리 황녀가 입가에 남아있던 웃음기를 가볍게 터뜨리며 대답했다.

“성녀랑 내가 사용한 건 오래 전 사라진 그, 고대어? 라고 해야 하나. 뭐 그런 거 중 하나야.”

“고대어? 네가 그런 걸 안다고? 책이라면 그저 치를 떠는 네가?”

내가 듣기에도 뭔가 숨기려는 듯한 기색이 보이는 어설픈 대답에 로이안트 3황자가 곧바로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런 식으로 나오면 말 안 한다?”

유리 황녀도 곧바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고, 정말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릴 기세였다. 레이몬드 2황자가 로이안트 3황자에게 눈짓으로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리 황녀에 이어 레이몬드 2황자까지 경고를 보내오자, 로이안트 3황자는 얼른 손가락으로 입을 꿰매는 시늉을 해 보이며 얌전히 입을 다물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어쨌든, 그 뭐냐. 나도 어릴 때 잠깐 책으로 본 건데 그걸 성녀가 사용하기에 얼떨결에 같이 쓴 것뿐이야. 아마 성녀도 내가 사라진 언어를 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놀랐겠지. 그리고 성녀랑 내가 나눈 대화는…….”

유리 황녀는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듯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더니 애써 웃음을 참는 얼굴로 짧게 말을 끝맺었다.

“그냥 내가 우리 둘째 오빠한테 껄떡대지 말라고 했을 뿐이야.”

“뭐?”

“진짜 성녀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레이몬드 2황자와 로이안트 3황자가 동시에 반응을 보였다.

“응, 그래서 뭐 기분 나쁜지 파르르 떨면서 소리지르고 가던데?”

태연히 웃으며 말하는 유리 황녀에게 두 사람은 이내 할 말을 잃은 듯했다. 둘 다 유리 황녀를 바라보는 눈길이 이거 진짜 제정신인가 싶은 표정이었다.

고대어 어쩌고 하는 부분에선 나도 살짝 의심이 갔지만, 그때의 상황이나 분위기로 보아 유리 황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어떻게든 엮고 싶어하는 그녀이니, 갑자기 레이몬드 2황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성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그 자리엔 리하르트 아델도 있었다. 유리 황녀로서는 그 모든 상황이 못마땅한 것들뿐이었을 터다.

그리고 아마 지금 저 두 사람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더 이상 의심하는 기색이 아니라,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 듯한 표정으로 유리 황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리라 확신했다.

“인마, 그러다 성국과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어.”

로이안트 3황자가 유리 황녀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며 심드렁하니 말했다. 얼핏 듣기엔 성국과의 마찰을 걱정하는 듯했지만, 말투나 표정에서는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위화감이 느껴졌다.

유리 황녀도 그런 로이안트 3황자의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반성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당당한 어조로 반문해왔다.

“솔직히 별로 상관없지 않아?”

유리 황녀의 그 의미심장한 발언에 레이몬드 2황자와 로이안트 3황자가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녀의 말을 완벽히 부정하진 않는 걸로 봐선 두 사람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 우리 쪽에서 먼저 성국과 사이가 틀어질 빌미를 제공할 필요는 없지. 대외적으로 모양새도 좋지 않고.”

“어차피 저쪽도 우리한테 도와 달라고 손 내밀고 있는 판인데 뭐.”

그래도 일단은 유리 황녀의 무례했던 말과 행동들을 지적하려는 듯 말을 잇던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진심으로 놀란 듯 레이몬드 2황자와 로이안트 3황자가 굳은 얼굴로 유리 황녀를 돌아보았다. 순간 날카로워진 두 사람의 시선에도 유리 황녀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로이안트, 너냐?”

“설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레이몬드 2황자가 의심하는 눈길을 보내자, 로이안트 3황자가 즉각 억울하다는 반응을 내비쳤다.

갑자기 분위기가 한층 더 무거워졌다. 내가 정말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그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나는 조용히 숨죽인 채 세 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나는 어찌 됐든 이쪽 「세계」에 있으면서도, 이 귀족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 물정을 거의 모르는 편이었다. 알 기회도 적었지만, 굳이 알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런 내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성국의 보물, 성녀 아리아가 제국의 건국기념일을 맞이해 축복을 내려주기 위해 제국에 방문했다는 사실뿐인데. 그마저도 드러나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닌가 보다 조용히 추측할 뿐이었다.

“아니면 저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아?”

“나도 모르지. 난 진짜 억울해. 나보다는 오히려 미카엘 형님이 의심스럽지 않아?”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아, 진짜 일이 재밌어졌네.”

잠깐 두 사람의 시선이 유리 황녀에게서 비켜 나가 있을 때, 유리 황녀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재밌어지다니……, 무엇이요?

차마 그렇게 묻진 못하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리 황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내 시선을 알아챈 유리 황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유리 황녀는 뭔가 무척 기분 좋은 일이 있는 사람처럼 씩 웃었다.

그 미소가 왠지 성 꼭대기에 올라서서 나를 협박하던 모습을 떠올리게 해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저기, 두 사람 그만 싸워. 저번에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서 대화 나누시는 걸 얼핏 들은 것뿐이니까. 어디 딴 데 가서 쓸데없이 입 놀리지도 않을 테니 걱정 마.”

아직도 조용히 언쟁을 벌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유리 황녀가 담담히 외쳤다. 그제야 서로 의심하고 억울해하는 표정을 거둔 채 두 사람이 유리 황녀를 돌아보았다.

황제 부부가 나누던 대화를 들은 것뿐이라니 두 사람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덧붙여 그에 대해 계속 추궁하자니 같은 공간에 있는 내가 신경 쓰여 구체적으로 말을 꺼내기 힘든 것 같았고.

“유리.”

곤란한 표정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으로 쓸어넘기던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유리 황녀를 불렀다.

“정말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해 성녀를 불쾌하게 만든 거라면 조만간 성녀와 다시 한번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그때 가서 성녀에게 직접 사과해라.”

나는 내심 유리 황녀가 또다시 길길이 날뛰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유리 황녀가 있는 침대에서 반걸음 정도 물러섰다.

“알았어.”

하지만 놀랍게도 유리 황녀는 순순히 그리하겠다 대답했다.

그 얌전한 대답에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두 사람도 유리 황녀가 너무 순순히 나오자 오히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리 황녀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이 기분 나쁘다며 유리 황녀가 부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다니까? 사과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들 봐?”

“알겠다. 일단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도 그렇게 말씀드려 두마.”

그렇게 말까지 하는데 거기서 더 의심을 하는 것도 아니다 싶었는지, 레이몬드 2황자가 얼굴에서 억지로 불신의 표정을 걷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늘 일은 여러모로 확실하게 반성하고 있도록 해라. 어쩌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께서도 너를 따로 불러내실지도 모른다.”

“아, 알았다고요.”

“우선은…… 너도 피곤할 테니 이만 쉬도록 해.”

아직도 얼굴엔 유리 황녀에 대한 의심이 묻어나고 있었지만, 시간도 그렇고 오늘은 그만 물러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선 듯했다.

“하아? 진짜 이렇게 끝내려고?”

로이안트 3황자는 아직도 더 물고 늘어질 기세였지만, 레이몬드 2황자가 이미 마음을 굳힌 듯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먼저 문가로 가서 문을 열고 먼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뒤를 따라 나가려던 레이몬드 2황자가 멈칫하더니, 휙, 내 쪽으로 돌아 다가왔다. 세 사람의 분위기에 눌려 숨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서 있던 나는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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