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0)
“실례지만, 저흰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남은 연회를 즐겼으면 좋겠군요.”
“……네?”
또다시 성녀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했지만, 레이몬드 2황자는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못 들은 척 나를 이끌고 그녀를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나 또한 그런 그의 행동에 놀라 옆을 돌아보다 이번엔 리하르트 아델과 눈이 마주쳤다.
오른쪽 눈썹을 찌푸린 채 나를 잠시 노려보던 그가 이내 성녀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떤 일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그가 보이곤 하던 표정이었다.
성녀가 레이몬드 2황자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싫은 걸까, 아니면 예상치 못하게 눈앞에 나타난 내가 꼴 보기 싫은 걸까. 아니면 둘 다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레이몬드 2황자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깐만요.”
갑자기 몸이 뒤로 당겨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에스코트하듯 내 허리를 감싸고 있던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이 성녀에 의해 당겨진 탓이었다.
어느 쪽이 더 놀랐을까. 성녀에게 팔을 붙잡힌 레이몬드 2황자? 아니면 그녀 본인? 그도 아니면 줄곧 성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리하르트 아델?
숨죽인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귀족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저들 또한 성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기색이 다분했다.
“지금 그게 다인가요?”
믿기지 않는다는 눈이었다.
“내게 할 말이?”
그녀의 아름다운 청색 눈동자가 레이몬드 2황자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쪽 역시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대치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곤란한 듯 미간을 좁힌 채 레이몬드 2황자가 무어라 대꾸를 하려는 찰나였다.
타악!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손이 레이몬드 2황자의 옷깃을 붙들고 있던 성녀의 손을 힘껏 쳐냈다. 얼마나 세게 쳐냈던지, 순간 성녀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뒤로 물러났다. 리하르트 아델이 얼른 그녀를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성녀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유리.”
제일 먼저 상대를 알아본 레이몬드 2황자가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질책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상황에 끼어든 유리 황녀는 한없이 당당한 표정과 태도로 성녀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그만 돌아가겠다는데 왜 붙잡고 난리야? 구질구질하게.”
“유리,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무례하게.”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인지한 로이안트 3황자까지 인파를 헤치고 다가와 유리 황녀를 꾸짖고 나섰으나, 슬쩍 그녀를 제 등 뒤에 감추는 행동으로 보아 그건 오히려 유리 황녀를 보호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질책 같았다.
“죄송합니다, 성녀.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
슬쩍 둘러본 귀족들의 표정은 흥미진진 그 자체였다. 이 나라 최고의 유명인들이 한자리에 모여선 좀처럼 보기 힘든 구경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셈이니 저들 입장에선 당연할 터였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펴는 3황자를 잠시 응시하다 다시 성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유리 황녀에게 내쳐진 손이 아픈 듯 반대쪽 손으로 감싼 채 무표정하게 유리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애롭고 따스한 빛을 뿜어내던 그녀의 눈동자가 어둡고 서늘한 빛을 발하고 있어 짙은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그저 웃지 않고 있을 뿐인데, 그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뭐야, 이건 또.]
그녀가 유리 황녀를 응시하는 시선 그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렸다.
나를 포함해 그녀의 가까이 서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듯했지만, 그 중 유리 황녀만은 달랐다.
유리 황녀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경악한 눈으로 성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알 수 없는 반응에 성녀도 잠시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유리 황녀를 경계하듯 응시했다.
[너…….]
그 기묘한 대치는, 유리 황녀가 하! 의미 모를 웃음을 흘리면서 깨어졌다.
[설마 한국 사람이냐?]
성녀가 중얼거린 것처럼 유리 황녀 또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억양과 발음의 언어를 사용했다.
이번엔 성녀가 유리 황녀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뭔가에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아연실색한 얼굴을 했다. 아니, 그 정도가 유리 황녀보다 더 심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가 파랗게 질려가는 게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유리, 너 지금 그건…….”
늘 여유롭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살짝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성녀와 유리 황녀를 바라보던 로이안트 3황자가 멍하니 유리 황녀에게 말을 걸었다.
성녀는 로이안트 3황자의 목소리에 뒤늦게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된 상황을 인지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언제 그렇게 놀랐냐는 듯 예의 그 성녀다운 미소를 띠며 로이안트 3황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 괜찮아요. 별로 아프지도 않고요. 너무 황녀 전하를 탓하지 마세요.”
[와, 대박. 이거 완전 컨셉충이었네. 성녀 컨셉 개 역겹게 잡았는데?]
그녀가 겨우 제 페이스를 찾은 듯한 것도 잠시였다. 또다시 유리 황녀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빈정거리듯 말하자, 성녀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이번엔 금세 아까와 같은 평온한 미소를 띤 채 유리 황녀를 향해 조곤조곤 대답했다.
[아무래도 비슷한 처지인 거 같은데, 좋은 말로 할 때 입 좀 닥치고 있어 줄래?]
[너나 닥치고 꺼져. 어디 우리 둘째 오빠한테 껄떡거려? 지금 니 옆에 있는 거나 잘 챙겨. 저건 뭐 니네 집 집사냐?]
살짝 미소마저 띤 채 나긋한 목소리로 답하는 성녀와 달리, 유리 황녀는 보는 이가 더 불안할 정도로 비딱한 태도를 내보였다.
[너, 말끝마다 반말인데 몇 살이냐?]
[말빨 후달리는 것들이 꼭 나이 들먹이더라. 어떻게 학생증 까드려요?]
[미친, 너 급식이었냐?]
갑자기 둘만 아는 듯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수많은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이나 말투를 보면 유리 황녀가 삐딱한 태도로 시비를 걸고, 성녀가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모든 걸 포용해주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돌연 성녀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언성을 높였다.
[와 씨, 이거 개 어이없네. 야, 돌았냐? 나 21살이야.]
흥분한 듯 유리 황녀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 그녀의 모습에 리하르트 아델과 로이안트 3황자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유리 황녀는 전혀 아랑곳않는 태도로 코웃음을 치더니, 또 뭔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어이구, 나이 많으셔서 좋겠어요. 아줌마. 나이도 많고 주름도 많고 부러워 죽겠네.]
그리고 그 말이 아마 성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모양이었다.
[누구더러 아줌마래? 나 남자야, 이 새끼야!]
순간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성녀가 연회장이 다 울릴 정도로 빽 소리를 질렀다.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고함을 내지르는 그녀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당장이라도 유리 황녀를 바닥에 패대기라도 칠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도저히 신의 대리자인 성녀가 보일 만한 얼굴이 아님에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성녀가 내뱉은 말의 내용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그녀가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 때문인지, 유리 황녀도 무척 놀란 듯 굳은 표정으로 성녀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넓은 연회장에 정적이 내려앉고 쌕쌕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성녀의 숨소리만 울려 퍼졌다.
“아리아…… 성녀?”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누군지 모를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성녀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 성녀도, 나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겨우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움찔, 어깨를 움츠리던 성녀가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귀족들의 놀란 시선이 제게 몰려 있다는 걸 알아챈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어떻게든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순간적으로 보였던 아차 싶은 표정이 그녀도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 당황스러워하는 게 분명했다.
성녀가 시선을 내리자 긴 속눈썹이 드리우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청색의 눈동자가 점점 붉어지더니, 이내 투명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건 없잖아요.”
눈가에 눈물을 매단 성녀가 마치 겁에 질린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끊어질 듯 힘겹게 이어지는 음성이, 지켜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갑자기 소리 지른 건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성녀는 간신히 거기까지 말하고는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뒤돌아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리하르트 아델과 연회장의 입구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성기사들이 그녀를 막아설 틈도 없었다.
“아리아!”
곧바로 리하르트 아델이 성녀를 쫓아 달려나갔고, 연회장 안은 또 한 번 혼돈에 빠졌다. 나는 바보 같은 얼굴로 멍하니 성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다 겨우 시선을 돌려 유리 황녀를 돌아보았다.
[남……자?]
그러나 유리 황녀도 나와 별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곤 연회장 입구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 너, 조금 전까지 사용하던 언어는 뭐지?”
“너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뭐라고 했기에 성녀가 저런 반응이야?”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레이몬드 2황자와 로이안트 3황자가 다그치듯 유리 황녀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로이안트 3황자는 아예 유리 황녀의 양쪽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반쯤 혼이 나간 듯한 유리 황녀는 여전히 우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뭔가를 중얼거리기만 했다.
[남, 자……. 남…….]
푸학!
그건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 같았다. 꾹 막아두었던 둑이 터지면서 물이 한순간 폭발하듯 터져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유리 황녀의 웃음 소리였다.
저를 재촉하고 다그치는 두 오라버니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갑자기 크게 광소를 터뜨린 유리 황녀는 아예 바닥에 엎드려 땅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성녀에 이어 유리 황녀가 보이는 기이한 행동에 연회장은 더더욱 거대한 혼돈에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 황녀는 정말 실성한 사람처럼 웃으며 알 수 없는 언어를 쉴 새 없이 외쳐댔다.
[푸하하학! 으악, 나 죽네! 아, 미친! 대박! 푸하학학학!]
놀란 황제 부부와 황태자가 사색이 된 얼굴로 유리 황녀의 이름을 외칠 때도. 결국 그녀의 두 오라버니들이 그녀를 짐짝처럼 강제로 들쳐메고 처소에 던져넣을 때까지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