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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9) (28/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9)

“오늘은 이만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돌아가는 게 좋겠네요.”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리고 그가 자연스럽게 부축하듯 내 팔을 붙든 채 몸을 틀었다.

“어라,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청량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한순간 내가 어떤 장소에 서 있는지조차 잊을 만큼.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곳에는 이제 막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이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샹들리에의 화려한 빛을 받은 신비로운 은색 머리칼과 청색 눈동자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 실례라고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지금껏 내가 봐온 그 어떤 사람보다도 빼어난 미색을 지닌 여인이었다. 여신의 현신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녀의 미색에 한순간 넋이 나갔다.

나는 한눈에 그녀가 성녀 아리아임을 알아보았다. 연회장 내의 귀족들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던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더라도, 그녀 자체에서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가 그저 가만히 서서 미소짓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복종해야 할 것만 같은, 사람을 압도하는 지배자로서의 타고난 기질과 위압감이 있었다.

이건 카롤리나 황후나 레이몬드 2황자에게서도 종종 풍기던 것으로, 타고나길 먹이사슬의 최정상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진정 나 같은 것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그녀를 보자마자 알아챘다.

저 사람이구나, 그가 더는 날 곁에 두지 못할 만큼 사랑하게 되었다던 사람이. 나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전부 후회하게 만든 사람이,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구나.

“아리아.”

제지하듯,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뒤이어 따랐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뒤로 시선이 갔다.

쿵. 순간 가슴 속에 있던 심장이 저 아래로 내려앉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몸을 감쌌다.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향해 움직인 시선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리하르트 아델이 눈앞에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고, 그토록 원했고,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

하지만 아리아 하고 다정하게 그녀를 부르던 목소리도, 살짝 찌푸려진 채 걱정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도, 내게는 낯설기만한 것들뿐이었다. 전부.

내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에게서 너는 이제 필요 없다며 내쳐졌을 때보다, 한 점의 미련도 없이 돌아서서 가버리는 이 사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지켜보기만 했던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아팠다.

내게는 보여준 적 없는 얼굴, 내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시선, 내게는 들려준 적 없는 목소리였다.

이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게 된 여인에게만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닫고 말았다. 정말, 이 사람은 단 한순간도 나를 사랑한 적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르지 않았다. 알고서 시작한 관계였다. 그런데도 그 순간 나는 정말, 이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만 싶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발밑이 전부 무너지고 나도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리하르트 아델은 나를 전혀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내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롯이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어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알지 못할 테니까.

눈가가 뜨거워지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물을 참기 위한 미약한 몸짓이었다.

안 돼, 유리 황녀가 보고 있을 거야. 당장 고개 돌려, 이 멍청아.

“괜찮으신가요? 제가 좀 봐드려도 될까요?”

스스로를 질책하며 겨우, 힘겹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리하르트 아델이 내민 손을 밀어내며 성녀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당황하여 무심코 다시 그녀를 돌아본 찰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 하나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내게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몰려드는 게 느껴졌다.

나는 놀란 눈을 하는 성녀의 표정만 스치듯 눈에 담고는 재빨리 다시 고개를 틀었다. 레이몬드 2황자에게 거의 몸을 기대고 있던 상태였기에, 얼굴까지 그를 향해 돌려버리자 아예 그의 품에 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봤을까? 분명 봤겠지.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눈도 마주쳤으니까.

갑자기 눈물을 떨구는 날 보면서 뭐라고 생각할까. 아직도 자기를 잊지 못하고 미련만 한가득한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하겠지. 얼마나 내가 한심할까. 얼마나 내가 우스울까.

이런 내가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레이몬드 2황자가 아니었다면, 내 발로 스스로 저 사람에게 달려갔을 내가. 고작 이 사람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바보처럼 눈물을 떨어뜨리는 내가.

나조차도 이런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완벽한 타인인 저들이 보기에 지금의 나는 어떻게 보일까.

“어디가 불편하신 거면…….”

“아리아 성녀.”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건 거의 동시였다. 성녀가 다시 내게 손을 뻗는 기척이 느껴진 순간, 레이몬드 2황자가 움직였다.

질끈 감았던 눈을 살며시 뜨자, 옆눈으로 그녀의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손이 레이몬드 2황자의 손에 의해 가로막힌 게 보였다. 손등으로 가볍게 막은 것뿐인데도 내게 손을 대지 말라는 묘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리고 손이 하나 더. 레이몬드 2황자와 마찬가지로 리하르트 아델의 손이 조심스럽게 성녀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두 남자에 의해 내게 뻗었던 손이 가로막힌 성녀의 눈동자가 놀란 토끼처럼 커다래졌다. 마치 일부러 더 보란 듯이 레이몬드 2황자의 팔이 나를 더 강하게 당겨 안는 게 느껴졌다.

“마음은 고맙지만, 클레어에겐 제가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나치게 상냥해서, 오히려 더 차갑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눈만 도르륵 굴려 레이몬드 2황자를 올려다보니, 웃고 있는 입가와 달리 눈동자는 조금도 웃지 않고 차디찬 시선을 내리고 있는 게 보였다.

바보가 아닌 이상 성녀도 그 표정을 읽지 못할 리는 없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하며 어정쩡하게 허공에 멈춰 서있는 제 손을 내렸다.

순간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를 내버려둔 채,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녀의 곁에 호위기사처럼 선 리하르트 아델에게로.

그 시선을 알아챈 듯, 그제야 성녀에게서 시선을 뗀 리하르트 아델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아델 공작.”

얼핏 듣기엔 진심으로 반가운 이라도 만난 듯한 말투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여전히 성녀를 바라볼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호의도, 적의도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무감각한 눈동자였다. 상대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는, 의례적인 인사일 뿐이었다.

성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리하르트 아델은 그런 레이몬드 2황자의 반응이 익숙한 듯 그 또한 의례적인 미소를 띠며 그에 응수했다.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늘 서로 이런 식의 태도였던 것처럼 담담해 보였다.

늘 유리 황녀와 함께 있을 때의 다정한 모습, 내게도 세심하게 배려를 해주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모습만 봐왔던 나는 도리어 그런 그가 너무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레이몬드 2황자가 내게도 저런 얼굴을 보여준다면 나는 정말 아무 말도 못 한 채 멀찍이 도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떨면서.

빤히 올려다보는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레이몬드 2황자가 시선을 내려 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눈동자를 길게 휘며 다정하게 웃어주는 얼굴에 살짝 놀랐지만, 반대로 한결 안심되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그 레이몬드 2황자가 맞다는 사실에.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2황자 전하, 맞죠?”

또다시 불쑥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가 한순간 분위기가 변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얼굴 하나로, 그녀는 자애롭고 신비로운 성녀에서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순식간에 탈바꿈했다.

“제가 누구인지는 이미 아시는 것 같으니 따로 저에 대한 소개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레이몬드 2황자의 차가운 태도에 잠깐 멈칫하는 것 같던 그녀는 금세 아랑곳하지 않는 듯한 태도로 웃으며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눈동자에 설핏 성가셔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성녀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여긴 듯 또다시 무미건조한 미소를 띠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지금 이 대륙에서 당신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성녀 아리아.”

“전하에 대한 이야기는 성국에서도 익히 들어왔어요. 역사서에 기록된 영웅들과 같이 살아있는 전설로 취급받는 분을 만나 뵙게 되어 무척 영광이에요.”

“신의 대리자라고 불리는 성녀께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드는군요.”

레이몬드 2황자와 무사히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에 성공하자, 성녀가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사랑에 빠져버릴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성녀는 오로지 레이몬드 2황자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고, 덕분에 나는 눈치 보지 않고 편안히 성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은색 실타래와 같은 긴 머리칼은 태어나 처음 보는 색이었다. 붓으로 그려낸 듯이 미려한 눈썹부터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청색 눈동자, 인형처럼 오뚝한 코와 분홍빛의 뺨, 흰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입술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껏 수많은 아름다운 사람을 봐왔지만, 그녀처럼 이토록 강하게 그려내고 싶다는 욕구가 들게 하는 존재는 처음이었다.

바로 곁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나 리하르트 아델의 존재마저 잊을 정도였다.

그리고 싶다. 이 사람을.

그런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손끝이 움찔거렸다.

“그런데 이분은?”

그 순간 성녀가 갑자기 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던 나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반사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감히 나 같은 게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되는 존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몸이 안 좋으신 것 같던데 괜찮으신가요?”

“그렇지 않아도 제 약혼녀가 미열이 있는 것 같아, 지금 돌아가려던 참입니다.”

그녀가 내게 관심을 보이자, 다행히도 레이몬드 2황자가 그 관심을 즉각 차단했다. 그러고는 성녀가 더 무어라 할 틈도 없이 대화를 마무리 지으며 자리를 뜨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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