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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8) (27/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8)

4일 전, 한밤중의 정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처럼 밤하늘을 배경으로 선 그는 무서우리만치 잘난 외모를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유리 황녀나 로이안트 3황자도 무척 아름다운 사람들이었지만, 레이몬드 2황자는 그 사이에서도 유독 더 화려한 빛을 발하는 느낌이었다.

알렌 4황자처럼 살짝 앞머리를 뒤로 넘긴 탓에 수려한 외모가 더 잘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감탄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다가가는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한순간 편안하게 웃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슬며시 사라졌다.

너무 극명한 변화였기에 나는 순간 내가 그에게 뭔가를 잘못한 게 있던가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역시 그 날 정원에서의 일이 너무 민폐를 끼쳤던 걸까, 고민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나 싶을 만큼 짧은 찰나였고, 이내 평소와 같은 미소를 떠올린 그가 다정하게 말을 건네왔다.

“유리 녀석이 며칠 전부터 헤더 영애가 연회에서 가장 아름다울 거라고 자랑을 하더니 전부 사실이었군요.”

“에헴! 우리 언니가 원래 예쁜데 내가 더 예뻐 보이게 신경 좀 썼지!”

“우리 형슈님이 제일 예뻐요!”

레이몬드 2황자의 칭찬에 나보다 더 신이 난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허리에 손을 얹고서 하늘을 향해 콧대를 치켜세우는 남매가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음을 흘리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살짝 드리워졌다.

“자, 그럼.”

고개를 들자 어느새 한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다가온 레이몬드 2황자가 왼손은 가슴에 댄 채로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마치 무도회에서 마음에 둔 여성에게 춤을 신청하듯이.

“레이디, 부디 제게 에스코트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중한 얼굴로 나를 응시해오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레이몬드 2황자를 마주하고 있자니 새삼 내가 지금 어떤 장소에 가는 것인지에 대한 걱정과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가고 싶지 않아.

입안에서만 맴도는 말을 몇 번이고 되삼키며 손을 뒤로 물리고만 싶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건 나를 위해 노력해준 유리 황녀에게 도저히 못할 짓이었다.

애초에 말을 하려고 했으면 진즉에 해야 했다. 지금은 그녀를 위해서도 물러날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가운데, 나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그려내며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네, 기꺼이.”

* * *

시선, 시선, 시선, 시선…….

끝도 없는 시선들이 내게 달라 붙어온다.

나는 애써 그 시선들을 모른 척 잔에 담긴 과일주로 목을 적셨다.

레이몬드 2황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을 나는 줄곧 모른 척했다.

우리가 들어서자마자 한순간 연회장의 분위기가 바뀌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었다. 앞서 들어선 유리 황녀나 알렌 4황자, 로이안트 3황자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세 남매가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는 오롯이 그들을 반갑게 환영하는 분위기였다면, 나와 레이몬드 2황자가 함께 나타났을 때는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시선들이 내게 꽂혀 들었다.

전부 백작 이상의 고위급 귀족들만이 자리한 이곳에 그 조건에 전혀 미치지 못한 내가 발을 들인 탓이었다. 나이가 많고 적고, 여자고 남자고 할 것 없이 불쾌함이 담긴 싸늘한 눈동자들이 내게 향했다.

대체 왜 저런 여자가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의문이 뒤섞인 시선들에 숨이 턱하고 막혔다.

예상대로 그들의 눈에 내가 아름답고 말고 하는 미의식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가문의 여식이며, 어떻게 감히 레이몬드 2황자를 꾀어내 그 자리에 서게 되니 것인지가 더 중요할 터다.

특히 몇몇 나이든 고위 귀족들은 제 딸아이를 레이몬드 2황자의 상대로 붙이고 싶어했던 모양인지, 레이몬드 2황자의 눈을 피해 나를 갈아 마셔버리고 싶다는 눈길을 보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일부는 나 정도는 손쉽게 제거해 버릴 수 있겠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을 건네오는 귀족도 있어 소름이 끼쳤다.

그들 대부분은 레이몬드 2황자가 어떤 변덕으로 나를 곁에 두는지는 몰라도, 그 기간이 그리 길진 않을 거라 여기는 느낌이 강했다. 일부러 리하르트 아델 공작의 이름을 꺼내며 빈정거리는 이도 상당수 있었고.

전부 나의 예상 안에 있던 일임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견뎌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물론 레이몬드 2황자가 바로 곁에 있는데도 내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내비치는 어리석은 귀족은 없었다. 레이몬드 2황자는 황족들 중에서도 유독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고, 그의 주위로 어떻게든 그의 환심을 사려는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레이몬드 2황자와 유리 황녀는 그 와중에도 나를 열심히 챙기려 했지만, 내가 일부러 점점 두 사람과 거리를 두면서 나중에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다.

나는 잠깐 바람을 쉬고 싶다는 이유로 그와 떨어져 테라스 근처로 피신해 왔고, 그동안 나를 주시하던 귀족들이 다가와 말을 거는 중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잠깐도 쉴 틈을 주지 않고 말을 걸어오던 귀족들이 점점 줄어들고 나서야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나는 또 한 모금 과일주를 목 안으로 흘려넘기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틈틈이 귀족들의 입에서 들려오던 이름의 존재가 오늘 이 연회장 내에는 보이지 않는 것에 안도하면서.

현재 나는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에 서서 연회장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황제 부부가 연회장에 등장하면서 한층 연회의 분위기가 달아올라 있었고, 뒤이어 성국에서 건국제를 축하하기 위해 왔다는 성녀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귀족들의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나는 그제야 어깨에서 힘을 풀고 벽에 기대어 섰다.

중간에 성녀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귀족들 사이에서 잠깐 웅성거림이 커지긴 했지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피곤해.’

유리 황녀가 무엇을 기대하고 나를 이렇게 공들여 치장해주고 여기까지 데려온 건지 모르진 않는다.

하지만 여기까지 그녀의 뜻에 따라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내겐 힘에 부친 일이었다. 더 이상 무언가를 하려 애쓰고 생각하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때마침 연회장 중간에서 여전히 귀족들에게 붙잡힌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레이몬드 2황자가 눈에 들어왔다.

‘2황자 전하도 성녀를 찾고 있는 걸까.’

그도 다른 귀족들처럼 성녀를 찾고 있는 거라고 여긴 나도 무의식중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은발에 청안을 지녔다는 성녀의 특징을 기억해 눈으로 좇으며 무심코 테라스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깊은 밤처럼 검고 어두운 머리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 거리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람이라는 걸.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다급히 걸어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본 순간,

타악!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뒤늦게 안 된다고, 당장이라도 멈추라 외치는 마음의 소리에서 귀를 틀어막아 버렸다.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막을 새도 없이 그 사람에게로 달려가는 내가 있을 뿐.

* * *

갑자기 뛰듯이 연회장의 입구로 걸어가는 내게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나와 어깨를 부딪친 귀족들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고, 돌아보지 않아도 등 뒤에서 내게 손가락질하는 게 느껴졌다. 평소 같으면 진즉에 돌아서서 죄송하다 사죄부터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순간 시야에서 아른거리다 사라져버린 그의 흔적을 쫓아 걷고 또 걸었다.

“언니! 클레어 언니!”

유리 황녀 목소리도 얼핏 스치듯 들렸으나 듣지 못한 척 정면만을 응시한 채 걸었다. 연회장의 입구가 가까워졌을 때는 거의 달리다시피 했다.

그 잠깐의 시간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그 잠깐 사이에 그 사람이 사라져버렸을까 봐. 또다시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을까 봐. 이대로 정말 아무것도 전하지 못할까 봐.

“헤더 영애.”

입구를 지나치기 직전이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연회장을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왼손이 먼저 붙잡히고, 앞을 막아서듯 허리를 감싸는 팔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붙잡혀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게 됐다.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려 발버둥을 쳐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원망이 가득 담긴 시선을 들자 어둡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약혼자인 나를 두고 벌써 연회장을 나가면 안 되죠.”

말끝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것 같기도 했는데, 그 표정이 오히려 더 싸늘하게 느껴졌다.

레이몬드 2황자의 그 차가운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듯 한기가 들었다.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한 거지.

“그 남자에게 가려는 건가요?”

이번엔 눈동자까지 길게 휘며 그가 웃었다.

“그럼 놔줄 수 없어요.”

멀리 떨어진 이들이 보기엔 내가 그에게 달려와 안겨있고, 그는 그런 내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일 만한 모양새였다.

레이몬드 2황자는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았다.

“유리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지금 연회장에 있는 귀족들의 시선이 다 몰려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유리가 보고 있어요.”

그러고는 다시 내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를 띠며 속삭여왔다.

“이 상황에서 그 남자에게 가는 걸 그냥 둘 순 없습니다.”

그 미소 앞에서 나는 멍청한 얼굴로 그의 금색 눈동자만 들여다보았다. 굳이 서늘한 시선이나 말 속에 뼈가 박힌 질책이 아니라도, 내가 어떤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뻔했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죄송하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유리 황녀가 어떤 의미로서 나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면서, 레이몬드 2황자는 또 어째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어울려주는 것인지 알면서, 카롤리나 황후와의 계약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려가려 한 것일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정신이 아니구나, 클레어 헤더.

레이몬드 2황자가 붙잡아주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끼쳤다. 다급히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내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창백하게 질린 내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레이몬드 2황자의 입술을 타고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은 죄가 있는 탓에 그 짧은 한숨 소리에도 몸이 움츠러들었다. 차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그의 가슴에 기대듯 고개를 숙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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