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7)
‘하아.’
나는 내일 있을 건국제 연회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애초에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나 장신구, 연회에서 눈에 띄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의 시야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레이몬드 2황자와 눈곱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내가 곁에 서있는 모습을 보며 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아무리 유리 황녀의 장단에 맞춰 협조하기로 약속한 일이지만, 정말 이래도 괜찮을 걸까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회 참석자 중 당연히 그 사람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 자꾸만 내 발목을 붙들었다.
만나게 되는 게 무서웠다.
나도 모르게 눈으로 좇게 될까봐.
미련스럽게 다가가게 될까봐.
혹시라도 그 사람을 붙잡게 될까봐.
죽을 만큼 보고 싶지만, 반대로 죽을 만큼 보고 싶지 않은 단 한 사람을.
“언니, 이번엔 이거요!”
유리 황녀가 또다시 이번엔 진짜다! 라는 표정으로 당당히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침잠하는 상념을 떨쳐낸 나는 벽에서 등을 떼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가까이 다가와서 마주한 이번 드레스는 요정나라의 여왕을 연상시키는 느낌의 녹색 드레스였다.
자잘한 보석류의 장식이 많이 달린 게, 무척 입고 벗기 힘들며 무거울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연회에 대한 걱정은 차후의 문제였다.
일단은…… 「드레스 지옥」이라 명명된 이 관문을 통과하는 게 우선이었다.
* * *
잘그락.
모은 두 손 안, 아스텔의 목걸이가 소리를 냈다. 그게 신호가 된 것처럼 아리아는 감았던 눈을 뜨고 시선을 들었다. 저를 향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셀레이네의 석상이 보였다.
눈을 감은 채 스스로 영원한 침묵을 택한 여신 셀레이네의.
보는 이마다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 찬양을 아끼지 않는 청색 눈동자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다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은색 실타래 같은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아닌 그 모습마저 움직임 하나 하나에 고귀한 기품이 느껴졌다. 그건 여신 셀레이네의 현신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뿐만이 아니라, 그녀 본인이 지닌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도 한몫했다.
여신 셀레이네가 자신의 대리인으로 내려보낸 성녀로서 부족함이 없는 존재. 그게 모두가 말하는 성녀 아리아였다.
아리아는 임시로 제 방에 가져다 둔 여신의 석상을 두고서 고요히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제국 카지스가 내어준 그녀의 거처는 쓸데없이 넓고 커서, 자신의 키만한 석상도 이 방 안에서는 작아 보일 지경이었다. 당분간은 혼자 있게 해달라 부탁을 해두었기에, 아리아는 조용히 기도를 올리며 긴 상념에 잠길 수 있었다.
“그럼 2황자 전하도 드디어 국혼을 치르시는 건가?”
굳게 닫힌 문 너머로 희미하게 섞여드는 잡음에 아리아는 느리게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런데 상대가 자작가의 영애라니, 너무 급이 떨어지지 않나? 진짜 맞아?”
“아까도 그 제국 내에서 난다 긴다 하는 상단의 마차 행렬 못 봤어? 그게 2황자 전하의 약혼녀를 위한 드레스며 장신구였다는데 전부.”
“허어. 대단하네. 국혼도 치르기 전에 벌써 일찌감치 성에 들였다는 것도 진짜야?”
“그래, 유리 황녀의 거처에서 함께 지낸다는 소문이던데.”
“그럼 진짜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네.”
잘그락.
무심코 힘이 들어간 손에 의해 아스텔의 목걸이가 또다시 소리를 냈다. 아리아의 눈동자가 석상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한 창으로 향했다. 창을 통해 보이는 카지스 제국의 황성들이 아리아의 시야에 들어찼다.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한참 동안 황성의 풍경을 눈에 담던 아리아는 입술을 달싹여 머릿속에 있는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타악!
쥐고 있던 아스텔의 목걸이를 체스 말처럼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의 눈동자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 * *
거울 속에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티 하나 없이 희고 투명하게 화장된 피부, 커다란 눈동자와 오똑한 코, 붉고 도톰한 입술. 긴 머리칼은 반만 묶어 틀어 올려져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어깨가 살짝 드러나는 녹색 드레스는 흰 피부와 잘 어우러져 거울 속의 그녀를 한층 돋보이게 했다. 적당한 크기의 장신구들 또한 값비싼 몫을 톡톡히 하며 그녀를 더 빛나게 했고.
눈앞의 여자는 아름다웠다. 도저히 내가 아는 클레어 헤더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내 눈으로 보고서도 쉬이 믿을 수가 없어 하염없이 거울 속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보고 또 보고, 거울을 직접 만져보기도 하면서.
드레스도, 화장도, 머리도, 사소한 장신구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유리 황녀의 작품이었다. 간간이 시녀장과 로이안트 3황자의 의견도 첨가되긴 했지만, 기본은 전부 그녀가 정한 것이었다.
원래도 연회에서 내가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고 잔뜩 신경을 써주던 유리 황녀였다. 건국제 연회 당일인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시녀들을 잔뜩 불러와 나를 치장하고 꾸미는 일에 공을 들였다.
그런데 로이안트 3황자가 이게 나의 사교계 데뷔가 아니냐는 괜한 말을 꺼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더 심각해졌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유리 황녀가 자신이 작년 생일 선물로 받은 <인어의 눈물>을 내게 주겠다고 나선 일이었다. 보석 세공의 장인으로 불렸던 슈엘의 드워프가 마지막으로 만들어냈던 작품으로 대륙에 이름을 떨친 목걸이를 내게 주겠다고 하니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금액도 금액이지만, 황제가 유리 황녀의 14번째 생일 선물로 주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는 목걸이였으니까.
다행히 시녀장과 로이안트 3황자 선에서 해결이 된 문제였으나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식은땀이 나는 나였다.
“언니, 아직 멀었어요?”
“형슈님 보고시퍼요!”
조심스럽게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남매가 합창하듯 말을 걸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문가를 돌아보다 긴장된 숨을 삼켰다. 드레스를 입는 걸 도와준 시녀들을 먼저 내보내고 홀로 남겨져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는 참이었다.
내가 보기엔 지금까지 봐왔던 내 모습 중에 가장 아름답긴 하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서 머뭇거려졌다. 유리 황녀 본인도 그렇고 워낙 주변에 질릴 만큼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은 터라 더 그랬다.
막상 나갔을 때 마지못해 예쁘다고 해주는 억지 미소를 보게 되면 다시 이 드레스룸으로 숨고 싶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모두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걸을 때마다 공간을 울리는 구두 소리에 긴장감이 더해졌다.
문 앞에 서서도 문손잡이를 돌리는 걸 잠시 망설이다 겨우 문을 열었다.
문 너머는 유리 황녀의 방이었다. 문 바로 앞에는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바짝 붙어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로이안트 3황자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흥미롭다는 듯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형슈님 진짜 진짜 예뻐요!”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알렌 4황자였다. 내 드레스가 망가질까 걱정이 돼서 그런지 가까이 다가와 안기거나 하진 않고, 살짝 거리를 두고서 방방 뛰며 외쳤다.
알렌 4황자도 이미 연회 참석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곱슬거리는 금색 머리칼을 뒤로 깔끔하게 넘기고 연미복을 차려입은 모습이 멋있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세상에서 제일 예뻐요!”
“감사합니다. 4황자 전하.”
그 반응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수줍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흐윽.”
그러나 안도하던 마음도 잠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기만 하던 유리 황녀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미 옅은 화장까지 한 상태였음에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이다.
“흑흑, 드레스 눈 빠지게 찾아보길 잘했어. 울 언니가 세상에서 젤 예뻐.”
“누님, 울지 마요.”
당황한 나와 알렌 4황자가 다가가 달래주자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유리 황녀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언니 원래도 예뻤지만 오늘은 진짜 끝장나게 예뻐요.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져요! 언니 성격에 또 어색하거나 이상하진 않을까 걱정할 것 같아서 미리 얘기하는 거예요! 알겠죠?”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엄지손가락을 척하니 들어보이는 그녀의 말에 나는 또다시 수줍게 미소지었다. 어쩔 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듯한 그녀가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유리 말대로 저도 오늘 연회에 참석하는 여성 중에 헤더 영애가 가장 아름다울 거라고 확신해요.”
로이안트 3황자까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가식적으로 입바른 소릴 하는 것 같진 않아 한층 더 안심됐다.
“두 분 다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인사를 전하며 한결 편안해진 미소를 그렸다.
“둘째 오빠 우리 언니보고 너무 예뻐서 기절하면 어떡하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우리 형님이 설마.”
“뭐야, 그럼 지금 우리 언니가 별로 안 예쁘단 소리야?”
“왜 또 얘기가 그렇게 돼.”
“솔직히 말해. 셋째 오빠도 지금 우리 언니한테 홀딱 반했지?”
유리 황녀와 서로 장난기 가득한 대화를 주고 받던 로이안트 3황자가 슬쩍 눈동자만 굴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레이몬드 형님의 약혼녀만 아니라면 솔직히 욕심이 나긴 하네.”
그러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빙긋 웃는다.
“무, 뭐…… 뭐?”
나는 단순히 유리 황녀의 장난에 맞춰준 거라 짐작하고 하하 웃어 넘기는데, 유리 황녀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유리 황녀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에 로이안트 3황자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알렌 4황자의 손을 잡고 먼저 방을 나섰다.
“자, 자. 형님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얼른 가죠.”
그가 내게도 얼른 나오라는 듯 눈짓을 하고 나가자, 유리 황녀가 뒤늦게 퍼뜩 정신이 든 듯 내게 작게 속삭였다.
“언니, 셋째 오빠 조심해요. 셋째 오빠는 안 돼요. 언니가 너무 아깝거든요.”
나는 그녀가 별 걱정을 다한다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그러나 유리 황녀는 무척 진지해서 그때부터 더 삼엄한 경계를 하며 로이안트 3황자와 나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았다. 내심 그가 불편했던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너무 날을 세우고 있는 그녀가 걱정스럽기도 했다.
다 함께 유리 황녀의 방을 나와 긴 복도를 지나쳐 제 4궁의 입구로 향했다.
“두째 형님!”
입구가 가까워질 즈음, 알렌 4황자가 앞으로 토다닥 달려나가며 외쳤다.
그런 알렌 4황자의 등을 쫓아가 보니 그 끝에 평소보다 몇 배는 더 근사하게 차려입은 레이몬드 2황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