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6) (25/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6)

“세째 형님!”

“오오, 우리 막내도 잘 지냈어?”

“진짜 진짜 보고시퍼써요!”

때마침 타이밍이 좋게 알렌 4황자가 토다닥 달려와 로이안트 3황자의 다리에 매달렸다. 어린 황자는 제 누나와 달리 오랜만에 만난 형님을 무척 반가워하고 있었다.

“언니 이리 와요. 신경 끄고 식사나 마저 합시다.”

순식간에 둘만의 세계를 만드는 형제를 두고, 유리 황녀가 내 팔을 당겼다.

유리 황녀에게 이끌려 다시 테이블에 자리하자, 로이안트 3황자도 알렌 4황자를 안은 채 맞은편 의자에 착석했다.

“우리 막내, 형아가 먹여줄까?”

“웅! 나 저거 주세요!”

“셋째 오빠 안 바빠? 우리랑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서로 좋아 죽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형제애를 부럽다는 듯 응시하고 있는데, 유리 황녀가 볼멘 목소리로 물었다.

손수 알렌 4황자의 입에 케이크를 넣어주던 로이안트 3황자가 유리 황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응, 다 정리해놓고 왔지. 어제 레이몬드 형님이 우리 쪽 결계도 손봐주셔서 더 안심이야. 우리 형님들이 워낙 능력자신지라 아주 든든해.”

그에 유리 황녀는 바로 옆에 있는 내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어련하시겠어.”하고 빈정거리듯 말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모른 척 눈앞에 있는 빵에 부드러운 버터를 바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이제 막 먹으려는 찰나에 로이안트 3황자가 방문한 터라, 배를 거의 채우지 못한 상태였다.

뒤늦게 배고픔을 인지한 나는 빵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그런데 헤더 영애는 우리 귀염둥이랑 언제 처음 만났어?”

입안에서 사르륵 녹는 빵과 버터의 감칠맛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였다. 전조도 없이 날아든 로이안트 3황자의 질문에 겨우 한입 먹은 빵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대체 어떻게 우리 귀염둥이 마음을 사로잡아서 레이몬드 형님까지 끌어들이게 된 건지 궁금하네. 형님이나 어마마마도 전혀 들은 게 없다고 하시고.”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나는 들고 있던 빵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유리 황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유리 황녀가 들고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테이블에 세게 내려놓았다.

“셋째 오빠가 무슨 상관이야?”

쾅! 거친 소리에 놀란 알렌 4황자의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유리 황녀가 또다시 제 오라버니에게 적대적인 눈빛을 쏘아 보냈다.

“나랑 언니만의 비밀이니까 묻지 마.”

유리 황녀의 격한 반응에도 로이안트 3황자는 화가 났다거나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진 않았다. 그저 뭔가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유리 황녀를 한 번, 나를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을 뿐.

“이 오라버니한테도 비밀이야? 살짝 서운해지려고 하네.”

“셋째 오빠라서 더 알려주기 싫은 거야.”

“흑흑. 우리 귀염둥이 요즘 이 오라버니한테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니야? 오늘도 거의 1년만에 만나는 건데 너무 차가워…….”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걸 원치 않는 듯, 로이안트 3황자가 다시 장난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혹시 우리 막내는 알아? 저 두 사람이 언제 처음 만나서 저렇게 사이가 좋아진 건지?”

묘하게 아까부터 그가 처음이란 말을 강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투는 장난스럽지만 그렇게 묻는 로이안트 3황자의 눈동자가 계속 나를 주시하는 느낌이 들어 불편했다.

그가 다음 목표로 삼은 이는 안타깝게도 알렌 4황자였다. 입가에 크림을 잔뜩 묻힌 채로 케이크 먹기에 열중하던 어린 황자는 제 형님의 질문에 움찔 시선을 들었다.

“우웅?”

일전에도 그랬듯이 어린 황자는 정말 뭘 알고 있기라도 하듯 슬쩍 유리 황녀의 눈치를 살펴왔다. 나조차도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로이안트 3황자도 분명 알아챘을 것이다.

유리 황녀가 말없이 눈으로 압박하는 듯했고, 그와 동시에 알렌 4황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알렌은 아무것도 몰라요. 진짜예요.”

알렌 4황자의 그 어색한 표정과 거짓말을 믿을 만큼 로이안트 3황자가 만만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알렌 4황자의 포동포동한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래? 그거 아쉽네.”

간지럽다며 로이안트 3황자의 손을 피하는 알렌 4황자의 웃음소리가 잠시 울려 퍼졌다.

유리 황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빛으로 제 오라버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이안트 3황자는 그런 여동생의 시선에도 웃는 낯으로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조금 잠잠하네?”

잠잠하다니 뭐가? 유리 황녀가 삐딱한 자세로 앉아 투덜거리듯 말했다.

“작년엔 이맘때쯤 드레스며 장신구며 잔뜩 들여와서 고르고 그러느라 바쁘지 않았어? 아니면 이번엔 다들 벌써 준비 끝났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 그의 질문에 순간 유리 황녀의 표정이 변했다.

“건국기념일 연회 참석 준비 말야.”

영문을 몰라 그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는 내게도 질문이 날아들었다.

“헤더 영애는 갑자기 유리한테 끌려왔다던데 연회에서 입을 드레스는 있어? 혹시 없으면…….”

“으악!”

그러나 로이안트 3황자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유리 황녀가 머리를 감싸 쥐며 괴성을 지르는 바람에 말이 묻혔다.

이번엔 로이안트 3황자도 꽤나 놀란 듯 나와 비슷한 얼굴로 유리 황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리 황녀는 아예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테이블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내가 그걸 잊고 있었다니, 미친!”

예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좌절하는 그녀가 살짝 무서워지기까지 하려는 찰나, 성큼 다가온 유리 황녀가 내 양쪽 어깨를 척 붙잡으며 외쳤다.

“언니,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요!”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넘치는 의욕과 열의로 불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훗날의 나는 생각했다.

건국제까지 앞으로 4일 남은 시점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라는 말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말인 줄 처음 알게 되었다.

드레스 지옥.

이 표현 외에는 건국제가 시작되기까지 내가 겪었던 고통의 시간들을 나타낼 다른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아니야, 다음 거.”

“이것도 아냐, 다음 거.”

“느낌이 안 와, 다음.”

“그냥 구려, 다음 거.”

“개구림. 다음.”

“다음.”

“…….”

아무런 감흥도 없는 얼굴로 「다음」이라는 말만 반복하던 유리 황녀는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내가 20벌째 이후로는 세보지도 못한 숫자의 드레스를 막 입고 나왔을 때였다. 이를 부득부득 갈던 유리 황녀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 앞에 있던 테이블을 엎어버렸다.

“왜 죄다 이딴 거밖에 없냐고!”

와장창!

“꺄악!”

이 상황을 예견한 듯 이미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시녀들이 서로를 끌어안으며 꺄악 비명을 내질렀다.

완전 폭군이 되어버린 유리 황녀를 보며 시녀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진정하십시오, 황녀 전하. 다음 공방 드레스들을 들이겠습니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침착한 태도를 유지중인 시녀장이 차분한 어조로 유리 황녀를 달랬다. 그러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폭발한 유리 황녀의 귀에는 시녀장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성질나 죽겠네. 이렇게 많은 드레스 중에서 왜 우리 언니한테 찰떡같이 어울리는 드레스 하나가 없냐고!”

“충분히 예쁘지 않았어? 특히 아까 그 남색 드레스.”

“형슈님은 다 예뻐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분노를 표출하는 유리 황녀를 두고,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로이안트 3황자와 알렌 4황자가 겁도 없이 해맑게 끼어들었다.

나는 슬쩍 눈동자를 굴려 로이안트 3황자를 바라보았다. 예상대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태연하게 빙긋 웃는 그와 달리, 나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고개만 살짝 숙였다.

첫 만남 이후 이틀 내내 줄곧 알렌 4황자와 함께 유리 황녀의 옆에 꼭 붙어있는 그였다. 단순히 오랜만에 만난 동생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걸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묘하게 나를 감시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어려웠다.

혹시 카롤리나 황후로부터 뭔가 언질을 받고서 저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내가 유리 황녀에게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는 않을까 감시하는 거라면, 한편으론 불쾌하기도 했고.

“시끄러워, 셋째 오빠 의견을 물은 게 아니야.”

바로 앞에 입었던 남색 드레스가 제일 예쁘지 않았냐는 그의 의견은 곧바로 묵살됐다.

덩달아 알렌 4황자도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지만, 어제 오늘의 유리 황녀는 제 귀여운 남동생을 전혀 신경 써주지 못하고 있었다.

“짜증 나,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바로 맞춤 제작으로 가는 건데.”

이번엔 진짜 괜찮을 거라고 외치던 드레스마저 마음에 들지 않자, 그녀는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자기 드레스는 보자마자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결정했으면서 내 드레스를 고르는데는 장장 이틀을 소요하고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그녀였다.

내일 있을 건국제 연회에서 내가 제일 예쁘고 제일 많이 주목을 받아야 한다던가.

고작 그런 이유로 그녀는 이틀째 내 드레스 고르기에 반쯤 미쳐있었다. 제국 내의 온갖 공방에서 드레스를 죄다 가져오라 일러선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드레스가 보일 때마다 내게 입혀보곤 했다.

하지만 입어보는 것마다 완벽하게 그녀의 마음에 차는 드레스가 없는 탓에 나는 이틀째 수십 벌의 드레스를 입고 벗는 일에 시달려야 했다.

덕분에 어젯밤에는 드레스에 파묻혀 죽어가는 꿈까지 꿨다.

“오전까지는 드레스를 정하셔야 합니다. 수선하는데도 시간이 꽤 걸리니까요.”

시녀들을 시켜 다음 드레스 공방의 드레스들을 들이면서 시녀장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지금 유일하게 상황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유리 황녀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 새로운 드레스를 제작하는 건 무리라고 처음부터 유리 황녀를 설득한 것도 그녀였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하나도 틀린 건 없는 탓에 유리 황녀도 마지못해 납득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적당히 타협하긴 싫은지, 내게 어울리는 드레스를 찾을 때까지 드레스를 입히고 또 입히고 또 입혔다.

그 모습은 마치 위대한 예술가가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걸 깨뜨리고 부수는 행위를 반복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유리 황녀는 계속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다음 드레스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잠깐 등 뒤의 벽에 살짝 기대어서서 숨을 돌렸다. 벌써 드레스를 몇 벌이나 입어 본 건지 세는 것도 포기한 나였다. 드레스뿐만이 아니라 장신구며 머리 모양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고 있는 그녀 덕분에 나는 이틀 동안 완전히 진이 다 빠져버렸다.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연회 자체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었다. 유리 황녀가 워낙 강경하게 나오니 말도 꺼내지 못한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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