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5)
유리 황녀는 어젯밤부터 줄곧 저렇게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세상의 온갖 행복을 다 가진 사람처럼 얼굴에서 함박웃음을 지우질 못했다. 그걸 다른 사람에게 숨길 마음도 없어 보였고.
내가 다친 걸 알았을 때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지만, 그 밤중에 신관을 불러들여 말끔히 치료하고 나서는 다시 또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아졌다.
오늘 아침 일어나 우리를 흔들어 깨울 때도 그랬고, 다 함께 세수를 하고 잠옷을 갈아입을 때도 그랬으며, 지금 셋이서 함께 유리 황녀의 방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도 그랬다.
그리고 내 쪽을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급하게 시선을 돌려 딴청을 부린다.
처음엔 대체 왜 저러는 걸까 혼자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 내린 결론은.
좋아죽을 것처럼 기쁜 감정을 숨기긴 어려운데, 그걸 나한테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그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사실 나는 그런 유리 황녀를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레이몬드 2황자랑 내가 같이 그 밤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은 걸까.
나와 레이몬드 2황자가 가까워지는 게 그렇게 행복한 걸까.
대체 그게 왜 유리 황녀가 기뻐할 만한 일인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앞서 내가 그녀가 나를 어떻게 알게 됐으며, 왜 내게 이러는 것인지에 대해 더는 묻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호기심은 해결되지 못한 채 쌓여만 갔다.
나는 오늘 아침에만 벌써 열아홉 번째로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가 눈을 피하는 유리 황녀를 보며 작게 한숨을 삼켰다.
조용히 식사나 하자며 시선을 내렸으나, 거기서도 또 어려움이 있었다.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태어나 처음 보는 온갖 낯선 요리들과 낯선 식기들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군침이 돌 만큼 맛있어 보이는 요리들이었지만 나는 선뜻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앞에 워낙 많은 나이프와 포크, 수저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지라 이것들을 다 어디에 어떤 요리를 먹을 때 써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엔 유리 황녀를 따라 제일 바깥 쪽에 있는 수저를 사용해 수프부터 맛보았었다. 하지만 내가 수프 맛에 감탄하는 사이 그녀는 이미 몇 종류의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다른 요리로 건너뛰어 있었다.
제대로 식사 예절이나 식기 사용법도 배우지 못한 나는 그런 나를 들키는 게 두려워 머뭇거리고 있었다.
“형슈님 이거도 머거 봐요!”
눈앞에 불쑥 작은 수저가 들이밀어 지더니, 알렌 4황자가 제가 먹던 수저로 푸딩을 크게 떠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괜히 등 뒤에서 시립 중인 시녀들을 힐끔 살피고는 알렌 4황자가 내민 수저를 받아먹었다. 입 안에 넣자마자 혀 위에서 사르륵 녹는 우유 푸딩의 맛에 나는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다.
내가 맛있어하는 걸 눈치챈 알렌 4황자가 기쁜 듯 헤헤 웃었다.
“마싯쬬? 더 줄가요?”
그러고는 또 제 수저로 푸딩을 가득 떠서 내밀었다. 이번엔 나도 시녀들의 눈치를 보는 대신 기분 좋게 어린 황자가 내민 수저를 받아먹었다.
“형슈님 마니 머거요! 여기 이거랑 이거두 마시써요!”
알렌 4황자는 내가 아직 수프 밖에 맛보지 못했다는 걸 알았는지, 짧은 팔로 여러 음식들을 가져와 내 앞에 내려놓았다.
그 마음에 너무 기쁘고 기특해서 나도 모르게 어린 황자를 꼬옥 끌어안을 뻔했다. 얼른 먹으라는 듯 기대 어린 시선을 던져오는 알렌 4황자를 보며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이 앞에 있는데……. 등 뒤에서 시녀들이 저 여자는 식사 예절도 못 배웠느니 하고 비웃으면 어떠랴 싶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라면 내가 식사 예절을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것보다는 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더 기뻐해 줄 것 같았다.
그에 용기를 얻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은 눈앞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즐겨야겠다 다짐하며 포크를 쥐었다.
똑똑똑.
유리 황녀 대신 알렌 4황자를 따라 눈치껏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맛있는 음식들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또렷하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나와 유리 황녀는 물론, 석상처럼 조용히 시립하고 서 있던 시녀들의 시선도 문가로 향했다.
“들어와!”
혹시 황실의 요리장이 또 새로운 요리를 내어온 걸까 생각하는 찰나, 유리 황녀가 문가를 향해 큰소리로 대답했다.
기다렸다는 듯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모두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장신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단순한 경장 차림에 턱 끝만 살짝 드러날 정도로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남자가 평범한 시종은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건, 그에게서도 카롤리나 황후와 비슷한 황족 특유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당하고 거침없으며 태생부터 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당연하다는 듯 그를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이는 시녀들의 태도도 그에 한몫했다.
“어라, 다들 식사 중이었어?”
나도 모르게 긴장하여 의자에서 일어나는데, 남자가 느긋한 어조로 말을 걸어왔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내 쪽으로 걸어오는 남자를 보며 나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인상만 쓰고 있는 유리 황녀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쪽이 클레어 헤더야?”
그때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불쑥 내게 물어왔다. 나는 당황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똑바로 보게 된 남자의 눈동자가 보였다. 후드 아래로 어린 남매와 똑같이 찬란한 금빛의 머리칼과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도 언뜻 스치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살짝 눈꼬리가 처진 눈매며 어딘가 경박해 보이는 미소 탓에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사람이네.”
눈동자를 길게 휘며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다가온 남자의 손이 내 머리카락 끝을 잡은 채 가까이 다가왔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거리에서 시선을 똑바로 마주해오는 눈동자를 나도 모르게 멍하니 쳐다보았다.
“혹시 형님 말고 나는 어때?”
이게 무슨 상황이지.
남자의 말에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는데, 난데없이 빵 하나가 날아와 아슬아슬하게 우리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그 손 치워. 셋째 오빠.”
이를 부드득 갈며 위협하는 유리 황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유리 황녀가 빵을 던진 자세 그대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목을 돌려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도 다시 씩 웃으며 내게 시선을 가져왔다.
유리 황녀로부터 셋째 오빠라고 불릴 사람이라면, 이 나라에 한 명밖에 없지 않나.
3황자, 로이안트 반셀 카지스.
북방의 얼음바다로부터 쉴 새 없이 쏟아져나오는 마물들로부터 이 나라를 굳건히 지켜주고 있는 북방의 수호자. 수도 밖 북쪽 지방에서는 황태자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로 제국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기사 중의 기사였다.
유리 황녀에 알렉 4황자, 레이몬드 2황자, 그리고 카롤리나 황후에 이어 또 하나의 살아있는 전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로이안트 3황자가 후드를 벗어 넘기자 그 안에 감춰져 있던 길고 화려한 금발과 금안이 드러났다.
“뭐 이미 눈치챘겠지만, 정식으로 인사할게.”
조금 전과 달리 그가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며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난 로이안트 라고 해. 저기 있는 귀염둥이들의 셋째 오라버니이자 형님이지.”
“좀 떨어져, 셋째 오빠!”
또다시 성난 황소가 되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유리 황녀를 가리키고는 그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왠지 저 모습을 보기 위해 일부러 유리 황녀를 약 올린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영애가 사귀고 있는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의 동생이기도 해.”
하지만 뒤에는 그 말을 하면서 어딘가 표정이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무어라 꼭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아주 살짝 나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받았고.
“아깐 장난이 지나쳐서 미안했어. 이렇게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
내가 그 표정에 대해 해석해보기도 전에 로이안트 3황자는 금세 웃는 얼굴로 표정을 감췄다.
“건국제까지 나도 당분간 성에 머물 예정이니 그동안 잘 부탁해.”
* * *
본인이 직접 자기소개를 해올 때까지도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미처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응? 아냐, 괜찮아. 뭘 또 그렇게 사과까지.”
딱히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는 그의 옆으로 빵 하나가 더 날아들었다.
“야, 언니한테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다! 죽을래?”
“우리 귀염둥이, 오라버니보고 말투가 그게 뭐야 정말.”
살벌하게 화를 내는 유리 황녀를 보고서도 그는 여유롭게 웃기만 했다.
“그 까칠한 성격도 여전하네. 건강해 보여서 이 오라버니는 안심했어.”
“우리 언니한테서 떨어지라고!”
“언니? 벌써 그렇게 부르는 거야?”
“언니 위험하니까 얼른 그 인간한테서 떨어져요! 여자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쓰는 인간 말종입니다!”
“에이, 그 정돈 아니다.”
말로는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유리 황녀가 후다닥 다가와 내 앞을 막아섰다.
내심 로이안트 3황자의 앞에서 위축되어 있던 나는 유리 황녀의 작은 등이 그렇게 든든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셋째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아무리 1년의 대부분을 슬란테아에 머무르고 있다곤 하지만 너무 외부인 취급하는 거 아니야? 내가 내 집에 오겠다는데 어쩐 일이냐니, 이 오라버니는 너무 슬프구나.”
로이안트 3황자는 처음으로 상처 받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마도 작위적인 느낌이 풀풀 나서 별 효과는 없었지만.
“볼에 뽀뽀 한 번 해주면 용서해줄 의향은 있어.”
“웃기고 있네. 주먹으로 치기 전에 내 방에서 나가주라.”
확실히 유리 황녀는 레이몬드 2황자에 비해 지나치게 로이안트 3황자를 적대시하고 있었다.
그가 전부터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는 말은 들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제 친 오라버니를 대하는 태도치고는 좀 심한 면이 있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뭔가 굉장히 초조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모르는 이가 보면 오히려 내가 그녀의 친언니고 그는 완전한 타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것도 제 친언니를 꾀어내려는 아주 나쁜 사기꾼 같은 느낌의.
살짝 걱정스러운 마음에 불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고개를 든 로이안트 3황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 걱정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괜찮다는 듯 빙긋 내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