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4)
……네? 하고 반문할 새도 없었다.
레이몬드 2황자는 내 양손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내 몸을 안아 올렸다. 딱히 억지로 우악스럽게 잡아끄는 느낌도 없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가슴에 폭 안겨있는 상태였다. 흔히들 공주님 안기라고 부르는 그 자세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잠시 충격에 빠졌던 나는 금세 사태를 파악했다.
나는 당황해 새파랗게 질려선 팔다리를 버둥대기 시작했다.
“저, 전하 내려주세요! 제가 알아서 갈 수 있어요!”
“엇차차, 그러다 내가 넘어지면 우리 둘 다 다쳐요.”
갑자기 발버둥을 치는 나를 보고도 레이몬드 2황자는 크게 당황하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이.
나는 둘째치고 그도 다칠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순식간에 얼어붙어 움직임을 멈췄다.
레이몬드 2황자가 다시 웃었다. 마치 말 잘 듣는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나치게 그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이대로 제 4궁까지 갈게요.”
깜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이는데, 그가 나를 안고도 전혀 힘든 기색 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조금 불쾌하더라도 잠시만 참고 있어 줄래요?”
불쾌한 게 아니라 불편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숨을 내쉬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시선을 살짝만 들어 올려도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이 코앞에 있는 자세인지라, 나는 최대한 눈을 내리깐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쿵쾅쿵쾅.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가 온몸을 울리는 듯했다.
나는 부디 이 소리가 레이몬드 2황자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빌었다.
이렇게 잘난 미남자의 품에 안겨있다는 설렘이나 수줍음 따위의 속 편한 감정이 아니었다. 레이몬드 2황자에게 안겨있는 이 믿기 힘든 현실에 대한 경악, 혹시라도 이 모습을 누군가 볼까 무섭고 불안한 심정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하지만 레이몬드 2황자가 독심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그에게 마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하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지금 제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는 건 전하께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상태로 자꾸만 말이 튀어 나가려는 걸 꾹 참고 있자니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한이 있어도, 레이몬드 2황자를 밀쳐낸 후 힘껏 내달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황족인 그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내 다리가 무사히 그로부터 도망치는데 협조를 해 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대로 그에게 안겨 가는 것 외에는 이 상황을 타개해나갈 해결책이 찾지 못한 나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제발, 제발…… 최대한 빨리 제 4궁에 도착하기만을 바라면서.
* * *
그 뒤론 제 4궁으로 가는 내내 레이몬드 2황자와 별다른 대화 하나 없이 침묵이 줄곧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침묵이란 바로 이런 거겠지.
그에게 안겨있는 상황 자체를 믿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모든 게 다 괴롭기만 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만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도, 숨결이 닿을 만큼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도. 전부 괴로운 것들뿐.
그래서 일부러 다른 생각을 하려 애쓰는 와중에, 불행히도 어제 그와 둘이서 나눴던 대화들이 덜컥 떠오르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 내가 괜한 얘길 해서 어색한 분위기를 만든 뒤에 처음 만나는 거였다. 낮에 유리 황녀가 가져온 마력구로 잠시 얼굴을 보긴 했지만 실제로 만나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어 어제의 일을 떠올릴 새도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또 마주하고 보니 다시 그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창피함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왜 그런 얘길 굳이 한 걸까.
레이몬드 2황자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을 때 그냥 괜찮다고 했으면 됐을걸. 어차피 저 같은 사람은 결혼할 상대도 없다고 그렇게만 말하고 끝냈으면 될 문제를.
더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둥 뭐하러 굳이 그런 얘길 구구절절 한 걸까. 아무리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 사람의 이름이 들려왔다고는 해도, 왜 그렇게 내 마음을 다 드러내 보였던 걸까.
그런 얘길 하면 상대는 그저 곤란할 뿐일 터인데.
떳떳하지도 못한 관계. 어차피 고작해야 정부였던 주제에. 버림받은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는 듯한 내 모습이 얼마나 역겨웠을까.
그렇게 생각을 이어갈수록 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레이몬드 2황자도 지금은 친절한 척 손을 내밀어주고 있지만, 속으로는 나에 대한 경멸의 감정을 애써 감추고 있는 게 아닐까. 내 멋대로 짐작하고 비약하며 한없이 스스로를 작아지게 만들었다.
차라리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지나 말지.
카롤리나 황후처럼 대놓고 선을 그으며 여길 넘어오지 말라 경고해주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속내를 감춘 채 상냥한 미소로 대해 주는 게 더 괴로웠다.
바보 같은 난 또 아무것도 모르고서 그 미소에 기뻐할 테니까. 그리고 이후에 손을 내쳐졌을 때 가슴에 새겨지는 상처도 오롯이 내 몫이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어제는 미안했어요.”
불쑥 그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이어지던 상념이 깨어졌다. 고집스럽게 내 무릎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들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진중한 옆얼굴이 보였다.
희미한 달빛에 물든 금색 눈동자가 느리게 내게 향했다 이내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짧은 순간 마주쳤던 눈동자는 분명 나에 대한 미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내가 괜한 말을 해서 좋지 않은 기억까지 떠올리게 한 점, 사과하고 싶었어요.”
이런 순간에조차 이 사람이 내게 하는 말이 진심일까. 진심이 아니라면 내게 왜 이러는 걸까.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내게 이럴 필요가 있나. 의문을 느끼고 의심을 하는 내가 싫었다.
“원래는 그때 곧바로 말해야 했는데 그땐 저도 좀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레이몬드 2황자가 민망한 듯 쓴웃음을 흘렸다.
“고작 이런 사과로 마음이 다 풀리진 않겠지만 그래도 꼭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 제 4궁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답지 않게 말을 삼키며 머뭇거리던 레이몬드 2황자가 크흠, 낮게 헛기침을 했다.
“우리가 대외적으로 약혼한 것처럼 하기로 한 것 말인데…….”
“2황자 전하!”
과연 어느 쪽이 더 놀랐을까.
갑자기 나타나선 빽 소리를 지르는 시녀를 본 나와 레이몬드 2황자? 아니면 귀신이라도 본 듯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시녀들?
“저기 계신다!”
“빨리 황녀 전하께 알려!”
순식간에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제일 먼저 빽 소리를 지르며 나타난 시녀의 뒤로 줄줄이 나타난 시녀들이 허둥대며 제 4궁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우당탕탕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 난리 중에 레이몬드 2황자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걸 알았는지, 낮은 목소리로 내게 잠깐 설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내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자, 조심스럽게 나를 다시 땅에 내려주었다. 나는 얌전히 땅에 발을 디디고 서서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또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됐는지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자신의 팔에 올렸다.
내게는 부담스러운 호의에 손을 치우고 싶었으나, 순수한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지못해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치마가 엉망이라 모양새는 보기 흉했지만 아까처럼 서지 못할 정도로 다리에 힘이 없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내려 달라 해서 직접 걸을 걸 그랬다며 후회하고 있을 때였다.
“꺄악!”
“황녀 전하!”
연이어 들려오는 시녀들의 비명소리에 나와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바로 어제, 눈앞에 있는 제 4궁에서 유리 황녀가 우리를 협박하던 모습과 함께 좋지 않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 탓이었다.
또 유리 황녀가 무슨 일을 벌인 게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시녀들 사이를 헤치고 유리 황녀가 당당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까지 자다 나온 듯 산발이 된 머리며 구겨진 잠옷 차림의 유리 황녀를 보며 나도 레이몬드 2황자도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둘째 오빠 지금 뭐하는……!”
무슨 이유에선지 유리 황녀는 무척 화가 나 있었다.
레이몬드 2황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를 지르던 그녀는 바로 옆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돌연 멈칫했다. 유리 황녀의 시선이 레이몬드 2황자에게서 내게로, 그리고 내가 붙잡고 있는 그의 팔로 차례대로 움직였다.
워낙 표정이 다채로운 그녀인지라, 순간 순간 휙휙 바뀌는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였다.
“……뭐야.”
화가 났다가 놀랐다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리고…… 기뻐한다?
표정을 읽는 것까진 좋았다만 그 감정 변화가 너무 빨라서, 그리고 이해하기 힘들어서, 나는 더 난감해졌다.
“뭐야, 뭐야? 그런 거였어? 난 그것도 모르고 참! 괜히 놀라서 이 난리를 피웠네, 하하핫! 둘 다 미리 말 좀 해주지. 그럼 눈치껏 조용히 있었을 거 아냐!”
그때 유리 황녀가 갑자기 뜻 모를 소리를 하더니 호탕하게 한바탕 웃어젖히며 우리 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둘이 데이트하고 오는 길이었구나!”
아, 기뻐하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나는 한 박자 늦게 그녀의 감정 변화를 이해했다.
그렇게 외치며 다가오는 그녀의 눈빛이 무서울 만큼 잔뜩 기대에 차 있었다.
아니라고 했다간 또 무슨 반응을 보일지 두려울 정도로.
“일단 그렇다고 해도 될까요? 상황도 이렇고.”
괜히 남매가 아닌 듯 그도 그런 유리 황녀의 눈빛을 눈치 빠르게 파악했던 모양이다.
유리 황녀가 완전히 다가오기 직전, 레이몬드 2황자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 * *
“크으하아! 좋다!”
유리 황녀가 과일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컵을 테이블에 다시 내려놓으며 외쳤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는 나와 알렌 4황자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그녀는 다음 목표에 손을 뻗었다.
이번엔 포크로 케이크를 크게 한 입 떠 입에 넣고는 흐흐흐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음엔 커다란 푸딩을 수저로 푹 떠서 입에 넣고는 또 흐흐흐. 그 다음엔 또 다른 과일 주스를 단숨에 들이켠 후 좋다는 말을 연발했다.
“누님 오늘 좀 이상한 거 가타요.”
분명 평소와는 달리 이상할 정도로 들떠있는 그녀의 모습에 알렌 4황자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왔다. 나는 어린 황자에게 어색하게 웃어주고는 다시 유리 황녀에게 시선을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