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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3) (22/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3)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 황녀의 눈동자를 꼭 닮은 금빛 달이 밤하늘을 환히 밝히고 있었다.

신기했다.

1년 전 아니, 고작해야 며칠 전만 해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름도 없는 자작가의 낡은 저택에서 구석진 방에 처박혀 캔버스만 들여다보고 있던 내가 산책하듯 이 거대한 황성 안을 걷고 있을 줄이야.

세상일은 정말 모르는 거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유리 황녀가 워낙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허락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그게 진짜가 아니란 건 영애도 잘 알고 있겠지.

달빛에 비치는 황성 안을 이리저리 돌아보는 가운데,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했다.

욕심이란 끝이 없다고 했던가.

금지된 과실처럼 한 번 맛본 달콤하고 향기로운 행복에 취해 제 위치를 잊어버린 어리석은 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대로 유리 황녀가 직성이 풀릴 때까지만 어울려줬으면 해. 어차피 뭐든 금방 싫증을 내는 아이라 그리 오래가진 않을 듯하니 잠시만 시간을 할애해주면 좋겠어.

어째서 카롤리나 황후가 그리 말했을 때 나는 그토록 상처받았던 걸까. 모르고 있던 사실이 아님에도 왜 유리 황녀로부터 버려지는 상상을 했을 때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을까.

어차피 처음도 아니면서. 버려지는 건 오래전에 익숙해졌으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수백 번을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시도조차 못 해본 겁쟁이 주제에.

그런데 어째서.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반드시 지급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다음이었다.

유리 황녀의 변덕으로 시작된 분에 넘치는 과분한 대접들이 언제까지고 이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어울리지 않는 장소, 어울리지 않는 위치, 어울리지 않는 사람. 모든 게 그랬다.

카롤리나 황후가 말했던 것처럼 언젠가 이 모든 걸 빼앗긴 채 다시 원래의 내 자리로 되돌아가게 될 거라는 사실도.

내가 그 사람에게 버려졌을 때처럼. 그때와 똑같이.

‘어쩌면 이게 잘된 일일 수도 있는 거였네.’

나는 애써 밝은 척 카롤리나 황후가 제안했던 대가와 보상을 떠올렸다. 그녀는 분명 다시 내게 그에 관해 물어올 것이고, 그때까지 나는 적당한 대답을 찾아야 했다.

분명 유리 황녀도 내게 질려 나 같은 건 돌아보지 않을 날이 올 터다. 그때 다시 그 지옥으로 되돌아가느니 카롤리나 황후의 제안을 받아들여 내 살길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포기하고 있던 내 꿈을 떠올렸다.

화가 흉내를 내고 싶어 하는 귀족 부인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그림자가 아니라, 언젠가 정말 제 이름을 걸고 제가 그린 그림을 세상에 내보이고 싶다는 꿈.

그걸 위한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꿈.

「레지나 왕립 예술 학원」에 입학하고 싶었다. 대륙 최고의 화가 안릿 셀이 레지나 왕국과 함께 설립한 아카데미에 다니며 처음부터 다시 배워보고 싶었다.

그곳에 입학하기 위한 추천서와 입학등록금을 부탁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카롤리나 황후가 들어줄지 확신은 없지만, 일단은 말이라도 해보자 싶었다.

그렇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버려지는 건 익숙한 일이니까.

다시 없을 기회를 잡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풀썩.

멍하니 생각에 잠겨 걷느라 튀어나온 돌부리를 보지 못한 나는 그대로 발이 걸려 주저앉고 말았다.

애도 아니고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넘어지는 거지.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잽싸게 일어나려 손으로 땅을 짚는데 도저히 팔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땅에 쓸린 무릎도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해왔다.

‘아파…….’

땅을 짚은 팔이 덜덜 떨렸다.

나는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린 채 주먹을 말아쥐었다.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눈가가 뜨거워졌다.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줄곧 말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내게 환하게 웃어주던 알렌 4황자의 미소를 더는 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꽉 조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힘껏 내 손을 잡아 끌어주던 유리 황녀가 더는 내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고 생각만 해도,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만큼 괴로워졌다.

‘못 일어나겠어.’

그제야 깨달았다.

난 이제 두 번 다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던 클레어 헤더로 돌아갈 수 없음을.

“헤더 영애?”

지금 들려올 수가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유리 황녀가 불쑥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처럼.

잘못 들은 걸까 반신반의하며 고개를 들자, 달빛을 등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카롤리나 황후와 똑 닮아 지독하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왜 이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 마탑에서 내일쯤에나 돌아온다 하지 않았던가.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요?”

레이몬드 2황자 역시 설마 여기서 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얼굴이었다.

그는 대답도 없이 멍청히 주저앉아 있는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더니, 이내 표정을 굳히고 물어왔다.

“혹시 어디 불편한 겁니까?”

레이몬드 2황자가 성큼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달이 밝기에 정원을 구경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가던 길 가시면 돼요.”

내가 워낙 격렬하게 도리질을 치며 말한 탓일까. 그가 도중에 일곱 걸음 정도를 남기고 멈춰 섰다. 그 이상 다가오면 엉망이 된 내 몰골을 금세 알아챌 것 같았기에, 나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달도 구름에 살짝 가려 주위가 어두워진 상태여서 다행이었다.

“……그런가요?”

말끝에 미묘하게 의문이 남아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어 확실하진 않지만 왠지 나를 미심쩍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하긴 나라도 좀 이상하게 여기긴 할 터였다. 이 한밤중에 드레스를 입고서 정원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여자라니. 수상해도 보통 수상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애써 주변을 구경하는 척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이내 자리를 뜨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에 나는 조용히 긴 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혹시라도 가까이 다가와 도와주겠다 손을 내밀거나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져올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냐,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져왔을 때 나도 모르게 카롤리나 황후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올까 봐.

뭐, 레이몬드 2황자가 애초에 내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질 리는 없으니 괜한 걱정이었다 싶긴 했다.

고작해야 여동생의 변덕으로 잠시 곁에 두게 된 상대일 뿐이지 않은가. 가뜩이나 살인적인 일정에 바쁜 사람이 그런 상대에게까지 굳이 신경 써줄 시간도, 가치도 없을 테고.

더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지금쯤이면 레이몬드 2황자가 돌아갔을 거라 짐작하고 다시 땅을 짚은 팔에 힘을 주었다.

또 누가 보기 전에 어서 일어나서 돌아가야…….

“여기가 그렇게 볼만한 게 있던가요?”

인기척 하나 없이 불쑥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시선을 던졌다.

놀란 감정을 숨기지 않고서 옆을 돌아보자, 레이몬드 2황자가 세운 무릎 위에 팔을 척 걸친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너무 놀라서 말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그가 정면만 응시한 채 태연히 말을 걸어왔다.

“아, 저기 연못에 달이 비치는 건 좀 운치 있네요. 그래도 여기보단 저쪽으로 가서 보는 게 낫지 않아요? 아무리 봐도 여긴 딱히 전망이 좋은 건 못 느끼겠는데…….”

그러고는 아직도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짧게 웃었다.

길게 휘어지는 금색 눈동자와 금색 머리칼이 달빛에 비쳐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했다.

흔한 로맨스소설 속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에게 말하길, 당신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보다 아름답다고 하던가. 나는 그 표현을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사용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그야말로 사람을 홀리는 미모라고 할까. 딱히 이성에게 가지게 되는 호감의 감정이 아니더라도, 잠깐만 방심하면 그새 넋을 놓고 보게 되는 느낌이었다.

계속 보고 있다가는 정말 「2황자 전하께서는 밤하늘의 별을 다 합친 것보다 아름다우세요.」 따위의 말을 내뱉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는 그 눈동자를 피해 시선을 돌리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왜, 왜…….”

“가라고 했는데 왜 왔냐고요?”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혼란스러워 허둥대는 나를 대신해 레이몬드 2황자가 간단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나는 또다시 잠깐 당황했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 늦은 시각에 위험하게 혼자 정원을 감상 중인 레이디가 보고 있는 풍경은 어떤가 궁금해서요.”

“황성 안이니까…….”

“황성 안이라 안전하다고요? 얼마 전에도 자객 하나가 중앙까지 침입했다가 잡혔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자객이라니. 서늘한 기운이 풍기는 단어 하나에 나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황성 안이라고 안심하고는 내가 정말 너무 태평하게 군 걸까. 심각한 얼굴로 반성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순간, 레이몬드 2황자로부터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웃은 건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니, 그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그러고는 그가 또 쿡쿡 웃음을 흘리는데, 왠지 놀림 받는 시골 촌뜨기가 된 기분이라 나는 애써 민망함을 감췄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 밤중에 혼자 있는 레이디를 두고 갈 순 없잖아요. 다리를 다쳤는지 걷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알고 있었구나.

레이몬드 2황자가 지나가듯 아무렇지 않게 꺼낸 말에 나는 몸을 굳혔다.

하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시점에서 엉망이 된 내 드레스며 불편하게 주저앉은 자세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혹은 처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거나.

“아직 더 구경할 게 남았어요?”

“……아뇨.”

그래도 나름 나를 배려하려는 건지 레이몬드 2황자는 줄곧 정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내 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진 않았다.

그의 질문에 나는 입안에서 말을 어물거리다 겨우 다시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그제야 나를 돌아보는 그에게 나는 불편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게 진심이기도 했고.

“도와주시려는 거면 마음은 감사하지만, 제가 혼자 힘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셨으면 해요.”

“폐라…….”

고집스러운 얼굴로 내 할 말을 쏟아내는 나를, 레이몬드 2황자가 제 팔에 비스듬히 머리를 기대며 응시해왔다.

“혹시 내가 엄청 싫고 그래요? 나랑 닿는 것도 끔찍할 정도로?”

일부러 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긴 했으나, 의도와는 살짝 비켜나간 질문이 돌아왔다. 당황한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하려 했다.

“네? 아뇨, 그럴 리가요.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잠깐 손을 대도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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