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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 (21/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2)

―지내면서 불편한 게 있으면 언제든 나나 유리에게 말해요. 그리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텀을 두더니,

―다음엔 상처 하나 없는 얼굴로 봐요.

흐릿하게 웃는 얼굴로 짧게 말을 남기고는 그대로 마력구의 마력을 끊어버렸다.

“뭐야, 나한텐 말도 안 하고 끊네. 되게 바쁜가 보다.”

유리 황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나는 처음부터 바빠 보이셨다는 말을 하려다 그냥 입안으로 삼켰다.

“알렌 졸려요.”

마침 알렌 4황자가 자그마한 손으로 제 눈을 비비적거리며 졸린다고 하기에 다같이 자는 분위기가 됐다.

당연히 사람을 부를 줄 알았는데, 연신 하품을 해대는 알렌 4황자를 유리 황녀가 직접 세수며 양치를 시켰다. 익숙한 듯 제 누이에게 얼굴을 맡기는 알렌 4황자나 마찬가지로 익숙한 듯 제 동생을 손수 씻겨주는 유리 황녀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한참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해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다 나도 알아서 적당히 잘 준비를 마치고 왔더니, 둘 다 이미 침대에 뻗어 잠들어 있었다. 이불도 제대로 덥지 않고 잠든 두 사람에게 이불을 잘 덮어준 후 나도 그 옆에 누우려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막 잠든 어린 남매가 깰까, 나는 다급히 문가로 걸어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열자 낮에도 몇 번 보았던 시녀장이 서늘한 얼굴을 하고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감춘 그녀의 눈동자에서 나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노골적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앞에서는 워낙 능숙하게 표정을 감추던 사람이었기에 조금 놀라긴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도 모르진 않는 터라, 나는 익숙한 듯 그 시선을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저……, 두 분께서는 이제 막 잠드셨어요.”

내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그렇게 말하니,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두 분이 아니라 클레어 헤더 영애를 모시러 왔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잠시 보자고 하십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 * *

……아.

진짜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머리를 스쳤다.

나는 유리 황녀가 내어준 새 잠옷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을 기억해내곤 마음이 바빠졌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옷을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나는 그대로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와 옷장부터 열어젖혔다. 유리 황녀가 사람을 시켜 급하게 구해다 준 드레스들을 중 하나를 골라 입고 다시 방문을 열었다. 방을 나서기 직전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얌전히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른 시녀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유리 황녀도 레이몬드 2황자도 없이 진짜 카롤리나와 황후와의 일대일 독대였다.

갑옷도 방패도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쏟아지는 화살 비 앞에 서는 기분이 이러할까. 쿵쿵쿵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시녀장을 따라 황후궁으로 향하는 내내 나는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싸워야 했다.

그러던 중에 자꾸만 내 시선을 잡아채는 게 있었다.

궁에 들어설 때부터 느낀 거지만, 황후궁 내부는 유독 그림이 많이 내걸려 있었다. 긴 복도를 지나오는 내내 벽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들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도 다수 걸려 있었고, 크고 작은 액자 안에 다양한 그림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약간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대부분이 꽃과 나무, 어린 소녀가 그려진 그림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르가디아가 그려진 그림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벽에 걸린 그림들을 자세히 확인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왼쪽 복도 끝에 낯익은 형태의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하며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뭐 하는 겁니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내 발길을 멈춰 세웠다. 흠칫 몸을 굳히며 옆을 돌아보자 벌써 저만큼 앞서간 시녀장이 못마땅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황후 폐하를 기다리게 할 셈이냐는 시선이 죄스러웠다.

“빨리 따라오시죠.”

“죄송합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다급히 사과를 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후에는 의식적으로 그림들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부지런히 시녀장을 따라 걷기만 했다.

“황후 폐하, 헤더 자작 영애를 데려왔습니다.”

붉은빛이 감도는 거대한 문 앞에 서서 카롤리나 황후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 잠깐 동안에도 손바닥에 식은땀이 잔뜩 배어났다. 손을 치마에 문질러 닦으며 심호흡을 하는 사이 기다리던 대답이 돌아왔다.

“들라 하라.”

황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크고 무거운 문이 소리도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나는 옆으로 비켜선 시녀장을 지나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평소 카롤리나 황후가 서재로 사용하는 장소인 듯 양쪽 벽이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창가 바로 앞에 있는 책상에 앉아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모습과는 달리 아주 편안한 차림이었음에도 그녀가 풍기는 기품과 위엄이 가려지진 않았다.

나는 일전에 했던 것처럼 치마를 잡은 채 허리를 숙여 보이며 인사부터 올렸다.

“여기 와서 앉지.”

그녀는 제가 앉은 책상 바로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눈짓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어선 그녀가 시키는 대로 소파로 가 앉았다.

“그렇게까지 긴장하진 않아도 돼.”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삐걱삐걱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나를 향해 그녀가 짧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차마 그녀의 눈을 보진 못하고 시선을 내린 채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마 내가 부른 이유는 영애도 짐작하고 있을 거라 생각해.”

곧바로 본론을 꺼내 들며 카롤리나 황후가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레이몬드 2황자와의 결혼에 대한 건.”

커다란 창 가까이 다가가 창을 통해 비치는 달을 등지고 선 채 그녀가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달을 배경으로 선 그녀는 꼭 달에서 내려온 여신처럼 보였다. 유독 레이몬드 2황자와 많이 닮은 아름다운 얼굴을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유리 황녀가 워낙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허락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그게 진짜가 아니란 건 영애도 잘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카롤리나 황후를 바라보던 나는 얼른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담담히 제 말에 순종하는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의 입가 미소가 진해졌다.

“이대로 유리 황녀가 직성이 풀릴 때까지만 어울려 줬으면 해. 어차피 뭐든 금방 싫증을 내는 아이라 그리 오래가진 않을 듯하니 잠시만 시간을 할애해주면 좋겠어.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반드시 지급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너 같은 건 금세 질려 내버릴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타인의 입을 통해 듣게 되니 새삼스레 상처가 욱신거렸다.

어차피 버려질 것. 미련을 두지 않아도 되는 것.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카롤리나 황후의 앞에서 이렇게까지 긴장하고 있는 내가 조금 우스워졌다. 설마 카롤리나 황후에게만 미운털이 박히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유리 황녀와 잘 지낼 수 있다고 기대했던 걸까.

웃기지도 않았다. 아직도 나 자신이 이렇게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닌 것. 다시 한번 그 사실을 되짚고 나자, 시끄럽게 뛰어대던 가슴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느낌이 났다.

나는 겉으로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대가 같은 건 감히 바라본 적도 없습니다. 마음만으로 충분히 감사합니다. 애초에 저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닌지라 제가 책임지는 게 맞다고 생각-.”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다만.”

그러나 순간 냉랭히 깔리는 카롤리나 황후의 음성에 나는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어야 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단숨에 몸이 얼어붙는 감각이 내리쳤다.

“난 계산이 확실한 게 좋아. 아니면 도중에 꼭 괜한 마음을 먹는 것들이 생겨서 나를 성가시게 하거든.”

꼭 너 같은 것들이, 카롤리나 황후의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잇고 있을 뿐인데, 나는 마치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단두대 아래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 같은 건 언제든 단숨에 목을 쳐 죽일 수 있는 존재 앞에서 내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저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해봤자 오히려 그녀의 심기를 더 건드리는 것밖엔 안 될 것 같았다. 거기서 나는 그저 그렇게 하겠다는 대답 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시간을 조금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지.”

이번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차지 않는지 카롤리나 황후의 한쪽 눈썹이 위로 휘었다. 나는 혹시라도 내 대답이 괜히 보상을 많이 받기 위해 재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하며 시선을 내렸다.

“이만 가봐도 좋아.”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던 카롤리나 황후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어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줄곧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듯했던 나는 겨우 살았다는 심정으로 앉아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어설픈 예법으로 카롤리나 황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뒷걸음질을 치는데, 그녀가 급하게 나를 다시 불러세웠다.

“아! 그리고 나와 했던 얘기가 유리 황녀와 레이몬드 2황자의 귀엔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군.”

카롤리나 황후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던 나는 냉큼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고는 시녀장의 안내를 따라 황후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문이 소리 없이 닫히고 나서야 완전히 긴장이 풀린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옆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던 시녀장은 당황하지도 않고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제 4궁으로 안내해드릴 아이를 부를까요?”

시녀장 대신 문 양옆으로 석상처럼 서 있던 기사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나는 괜찮다며 손을 내젓고는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일어섰다.

시녀장의 제안도 거절하고 홀로 쫓기듯 황후궁을 빠져나왔다. 오는 동안 대충 지리를 기억했으니 혼자 힘으로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듯했다.

황후궁을 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긴장으로 열이 올랐던 몸을 식혀주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나는 일부러 제 4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도 않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황성 안을 느긋하게 산책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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