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 (20/152)

02. 모든 역사는 밤의 연회에서 (1)

“언니 이쪽이요!”

“형슈님 이쪼기에요!”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는 황성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토다닥 저만큼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쫓아 나도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는데, 도중에 뒤를 돌아본 남매가 나를 향해 얼른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이었다.

나는 잠시 멈춰선 채로 가만히 두 사람과 함께 이 모든 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도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나도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구나 생각할 수 있게.

“아이참, 빨리요!”

“빨리요오!”

점점 걸음이 느려지다 제자리에 멈춰선 나를 기다리기 힘들었던 걸까. 아예 내 쪽으로 달려온 두 사람이 내 손을 하나씩 잡고 쭉쭉 당겼다. 얼결에 남매에게 질질 끌려가게 된 나는 두 사람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를 떠올렸다.

“저번에 봐서 알죠? 제 4궁! 이쪽으로 가면 내 방이 있고요! 알렌 거처는 제 5궁인데 거의 내 방에서 같이 지내요! 그리고 내 바로 옆방을 언니 방으로 만들 거예요! 그동안은 불편해도 저랑 알렌이랑 제 방에서 같이 지내면 돼요!”

일전에 꼭대기층까지 올라가서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협박했던 이곳이 그녀의 거처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약간 그때의 기억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들어가는 것도 망설여졌지만, 유리 황녀는 잔뜩 신이 나서 내게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본인이 더 즐거워했다.

“황녀 전하.”

이후에도 유리 황녀가 한참 성을 신나게 구경시켜주는데, 도중에 빈센트라 불리던 기사가 다가와 무어라 말을 전하자 그녀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아직도 안 왔다고? 이 새끼들이 사람 차별하네?”

“지, 진정하십…….”

“진정은 얼어죽을. 어마마마나 둘째 오빠가 부르면 재깍재깍 오던 새끼들이! 뒤지기 싫으면 빨리 가서 튀어오라 해!”

빽 소리를 지른 유리 황녀의 명령에 기사가 허둥지둥 어디론가 달려갔다. 남은 호위 기사들도 유리 황녀의 눈치를 살피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게 보였다. 나 역시도 그녀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유리 황녀의 표정을 살폈다.

“누님, 왜 그래요?”

기사를 보내고도 한참을 혼자 씩씩거리던 그녀는 알렌 4황자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멈칫했다.

“아, 신관 부른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왔다고 해서 잠깐 빡쳤어.”

“빡쳤어! 알렌 그거 뭔지 알아요! 엄청 화가 났다는 거야!”

“오오, 우리 막내 오늘도 쓸데없는데서 기억력 좋고요?”

“황녀 전하.”

유리 황녀가 알렌 4황자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며 장난을 치는 사이, 잠깐 사라졌던 시녀장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가 유리 황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을 건네자 유리 황녀의 표정이 다시 확 밝아졌다.

“어, 진짜? 마침 잘됐다. 언니, 이리 와요!”

그러고는 내 손을 당겨 제일 가까이에 있던 커다란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유리 황녀는 괜히 혼자 눈치가 보여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나를 끌어당겨 창가에 있는 침대 끝에 앉혔다.

앉은 자리가 영 불편해 손과 발을 꼼지락거리며 방 안을 살피고 있자니, 유리 황녀가 뭔가를 시녀장으로부터 건네받아 들고 와 내 옆에 앉았다. 자연히 내 시선도 「그것」에 향했다.

이게 뭐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세히 보니 그건 사람 얼굴만한 크기의 거대한 마력구였다. 가끔 그림으로만 봐왔을 뿐, 실제로 마력구를 보는 건 처음이라 나는 신기해하는 얼굴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특수한 장치가 되어있는 건지, 분명 마법사도 아닌 유리 황녀가 마력구에 가볍게 손을 대니 이내 그 안에서 레이몬드 2황자의 모습이 선명히 드러났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레이몬드 2황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흠칫 놀라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력구도 마력구를 사용하는 것도 전부 처음인 나는 깜짝 놀랐으나,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는 태연히 그 안을 들여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둘째 오빠!”

“두째 형님!”

레이몬드 2황자는 책상에 앉아 뭔가를 보고 있던 모양인데, 해맑은 동생들의 인사에 짧게 한숨을 내쉬면서 입을 열었다.

―또 뭐냐, 유리. 알렌.

그의 반응을 보아하니 레이몬드 2황자 쪽에서 마력구를 통해 연락을 해온 게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연락을 넣어 연결이 된 것 같았다.

“둘째 오빠 뭐해? 내일은 올 거지? 건국기념일까진 머문다고 했잖아!”

“두째 형님 보고시퍼요!”

바빠 죽겠는데 왜 또 귀찮게 하냐는 어투였음에도 어린 남매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 왔다가 다시 간다고 했잖아. 내일이면 볼 수 있을 텐데 뭘 또 이렇게 연락을 해. 내가 황성 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마력구는 만들기 힘들다고 했지? 그걸 이런 식으로 자꾸 낭비할 거냐?

“내일 그럼 언제쯤 오는데!”

옆에서 지켜볼수록 유리 황녀는 정말 대단했다.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레이몬드 2황자의 잔소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나였으면 벌써 기가 푹 죽어 죄송합니다만 연발하다 마력구를 치웠을 터인데.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이제 연락하지 마라, 제발.

―마탑주, 레스티아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곧바로 갈…….

“둘째 오빠!”

―또 왜?

중간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끼어들면서 드디어 연락이 끊기는가 싶더니, 그걸 못 참고 유리 황녀가 다시 레이몬드 2황자를 붙잡았다.

“오늘부터 클레어 언니 제 4궁에서 지낼 거야!”

―뭐?”

책상에서 이제 막 일어서던 레이몬드 2황자가 급하게 다시 의자에 앉는 모습이 보였다. 마력구를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유리 황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히 제 할 말을 했다.

“어차피 우리한테 시집올 건데 미리 살아보면서 이래저래 익숙해지면 좋잖아!”

―너 또 막무가내로 헤더 영애를 끌고 온 건 아니겠지?”

“무, 뭐? 절대 아니거든? 언니 이리와봐요. 오빠한테 아니라고 해줘요.”

하지만 레이몬드 2황자의 예리한 지적에는 당황한 듯 유리 황녀가 내 팔을 잡고 제 쪽으로 살며시 당겼다. 덕분에 지금껏 내가 옆에 있는지도 몰랐을 레이몬드 2황자의 시야에 나도 들어가게 됐다.

“아…….”

나는 일부러 눈을 피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담담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제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진 뒤라 뭔가 그를 대하기가 조금 껄끄러운 느낌이었다. 그것도 전부 내 탓이지만.

레이몬드 2황자도 내가 유리 황녀와 같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 해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침묵이 길어져서 의아함에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그 얼굴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내리꽂히는 음성에 순간 소름이 끼쳤다. 옆에 있던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 역시 놀란 눈을 깜빡이며 마력구를 멍하니 바라보는 게 보였다.

―또 에이든 헤더, 그 자의 짓입니까.

목소리만큼 서늘한 눈동자가 내 뺨을 응시해오며 물었다. 나는 그제야 내 얼굴 상태를 상기해내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뺨을 가리려 했다. 그러다 손등이 뺨에 스치면서 통증이 되살아나 신음을 삼키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시에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도 한층 더 차갑게 굳어지는 게 스치듯 보였다.

“어, 맞아! 둘째 오빠! 이거 그, 에이든 헤더? 그 개자식이 그랬어! 우리 언니 막 때렸어! 언니, 그 자식 이름 에이든 헤더 맞죠?”

유리 황녀는 급격하게 분노에 차올라 빽 외쳐놓고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다는 듯 나를 되돌아보며 물었다. 평소와 같은 유리 황녀의 모습 덕분에 살짝 긴장이 풀려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그래, 정말 개자식이지.

언제나처럼 우아한 기품이 묻어나는 음성이 내뱉는 거친 욕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물론, 먼저 욕설을 내뱉은 유리 황녀도 놀라서 커다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어, 그러니까. 그게, 그 개자식을 혼내줘야 하는데……. 개자식을…….”

“개쟈식…….”

놀란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멍하니 개자식을 연발하는 모습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런 나쁜 말은 쓰시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리려는데 그보다 레이몬드 2황자가 더 빨랐다.

―에이든 헤더에 대한 건 나도 생각해둔 게 있으니 일단 유리 넌 가만히 있어. 괜히 또 나서서 일 벌리지 말고.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던 레이몬드 2황자가 담담한 어조로 말하자, 유리 황녀가 예쁜 눈썹을 찡그리며 답했다.

“나 이미 그 자식 때리고 머리채도 잡았는데?”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만……. 넌 괜찮아? 다친 데는?

“나? 난 완전 멀쩡!”

―그럼 잘했어.

본인이 칭찬을 하고도 좀 이상하다 싶었는지 슬쩍 미간을 찌푸리던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이 잠시 내게 닿았다 떨어졌다.

―신관은.

왜 아직도 신관이 오지 않았나, 왜 내 얼굴이 아직도 저 모양인 거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그에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 황녀가 씩씩대며 답했다.

“안 그래도 그것들 때문에 열 받아 뒤질 것 같아. 이것들이 내가 불러서 그런지 부른지가 한참 전인데 아직도 안 왔어.”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힌 망령들이라, 아직도 제 위치가 어디인지 파악을 못 하는 거지.

레이몬드 2황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전혀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님에 내보이는 서늘한 미소가, 아주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레이몬드 2황자는 금세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왠지 꼬맹이들에게 새치기를 당해버렸네요. 유리 녀석이 너무 귀찮게 하지 않나요?

새치기라는 단어가 왜 나오는 걸까. 의미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바로 옆에서 듣고 있던 유리 황녀가 즉각 그의 말에 반발했다.

“뭐라는 거야? 누가 들으면 진짜 내가 언니 귀찮게 하는 줄 알겠네!”

―맞잖아.

“아니거든!”

“아니거둔요!”

―알렌, 너라도 유리로부터 헤더 영애를 지켜줘.

“웅!”

“웅은 무슨 웅이야! 알렌 너 누구 편이야? 너 설마 둘째 오빠 편이야?”

“알렌은 헤더 영애 편!”

“헐, 그러면 할 말이 없잖아.”

황성까지 오는 내내 지켜보았던 남매의 귀여운 언쟁에 차분한 레이몬드 2황자까지 더해졌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 사이에 낀 상태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무심코 쿡쿡 웃음을 흘렸다.

문득 세 남매가 동시에 조용해져서 웃음을 멈추고 시선을 드니, 세 사람 모두 뭔가에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덩달아 당황해 얼른 웃음을 거두고 놀란 눈을 깜빡였다.

―마탑주, 이제 가셔야 합니다.

그때 앞서 들었던 낯선 목소리의 남자가 다시 끼어들었다. 상대방에게 알겠다고 대답한 레이몬드 2황자가 내 쪽을 잠깐 말없이 응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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