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8)
“알렌은 알고 있눈데에.”
“넌 코딱지만한 게 뭘 자꾸 안다는 거야? 언니 얘가 하는 말 믿지 마세요!”
“알렌 거짓말쟁이 아니야!”
“네가 알긴 뭘 알아! 혼난다! 난 귀엽다고 안 봐줘!”
그 와중에 남매 사이에 소소한 언쟁이 벌어졌는데,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나는 무심코 창가에 시선을 가져갔다. 창 너머로 점점 가까워져오는 황성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봐도 웅장하고 화려한 성의 모습에 나는 자꾸만 위축되는 스스로를 알아챘다.
유리 황녀는 내게 저 거대한 황성에서 같이 지내자고 했지만, 정말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두려움이 앞섰다. 아무리 유리 황녀가 떼를 써도 여기선 내가 단호하게 나가야 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주제도 모르고 유리 황녀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가다간 언젠가 진짜로 내가 설 수 있는 장소가 하나도 없어지는 게 아닐까. 무서웠다.
어느새 알렌 4황자와 꺄르르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는 유리 황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여기서 또다시 돌아가겠다 우겨도, 아마 유리 황녀는 마차를 멈춰 세워주지 않겠지. 나는 홀로 무거운 한숨을 삼키며 초조하게 치마를 움켜쥐었다.
황성의 땅을 다시 밟는 것도, 헤더 자작가로 돌아가는 것도.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을 만큼 내겐 두렵고 불편하고 어려운 것들뿐이었다.
“형슈님, 형슈님은 알렌 믿죠오?”
“아니, 언니는 나를 더 믿거든? 그렇죠, 언니?”
우울해질 틈도 주지 않고 귀여운 남매가 그새 가까이 다가와 내 허리에 다리를 끌어안고 매달려왔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두 사람을 보며 나는 두 가지 선택지를 다 한쪽으로 밀어냈다.
지금은 일단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자 싶었다. 유리 황녀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나를 마음에 들어하는지는 몰라도, 언제까지고 계속 이어지진 않을 터. 그때까지는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의 기분에 맞춰 잠시 휩쓸려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저는 두 분 다 믿고 있어요.”
그 사람에게 버려졌을 때처럼, 언젠가 반드시 이 순간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란 걸 알면서도. 또다시 그렇게.
* * *
똑똑똑.
서류의 산에 파묻혀 있다는 표현이 아마 적절하리라.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현재 그의 상황이 실제로 그러했다.
봐도 봐도 끝이 없는 양피지들에 파묻혀 지긋지긋한 서류만 읽고 또 읽기를 반복하던 리하르트는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허락도 없이 제 집무실에 들어온 것도, 책상을 두드려 제 집중력을 흩트려 놓은 것도 죄다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방문자였다.
그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여어, 많이 바빠 보인다?”
예상대로 재상의 보좌관이자 제 오랜 친우인 제이드 백작이 책상에 삐딱하게 기대선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쪽은 의외로 여유로운 모양이군, 빌어먹을. 한없이 느긋해 보이는 제 친우의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알면 좀 꺼져.”
가뜩이나 건국기념일이다 축제다 뭐다 정신없이 일이 몰아치고 있었다. 저 한가한 자식의 시시껄렁한 얘기나 들어줄 시간은 없었다. 리하르트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는 곧바로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때마침 그는 성녀의 호위를 늘려달라는 성국 측 요청 서류를 읽던 중이었다. 지금 호위 숫자로는 성녀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을지 영 불안하다는 게 성국 측 의견이었다.
지금도 최대한 숫자를 늘려준 것인데도 부족하다니, 또다시 속이 살짝 뒤틀렸지만 그는 금세 허가 사인을 냈다. 성국이 일부러 기선제압을 하려 억지를 부리는 것을 알기에 거북하긴 해도, 성녀의 안전을 위하는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녀 아리아.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푸르른 호수 같은 그녀의 눈동자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 어떤 보석을 갖다 붙여도 그보다 더 아름답지는 않을 그 눈동자가 제게 향하는 것이 좋았다. 저를 바라봐주고,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세상 전부를 갖다 바치고만 싶었다.
그녀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윈 결코 믿지 않았던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그 말을 인정하게 만든 상대였다. 그녀가 웃으면 세상이 온통 밝아지는 듯했고,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으면 그의 마음도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가 언제나 웃게 해주고 싶고, 평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그 무엇을 희생해도 상관없다 여겨질 만큼.
아리아를 황성으로 무사히 들여보낸 이후, 그 뒤로 한 번도 그녀와 만나지 못한 그였다. 일차적으로 성국과 황성의 감시가 심했고, 너무 많은 눈이 그녀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그녀에게 상처가 되는 소문이 돌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혹 그런 이유로 그녀가 저를 밀어낼까 두렵기도 했고.
리하르트는 지친 눈가를 쓸어내리며 쥐고 있던 만년필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요즘 너 바빠서 사교계 귀부인들 소식에도 둔하지 않을까 싶어서 말야.”
설마 벌써 자신과 그녀를 두고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고 있는 건가.
제이드 백작의 빈정거림 가득한 말투에 리하르트는 험악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성녀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아니, 그쪽 말고.”
쯧쯧. 제이드 백작이 일부러 리하르트의 눈앞에 손가락을 흔들며 씩 웃었다.
“너한테 죽고 못 살던 클레어 헤더에 대한 건데.”
갑자기 그 여자 얘기가 왜 나오는 거지.
클레어 헤더에 대해서는 이미 까맣게 잊고 있던 리하르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제 친우를 바라보았다.
“나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다니기라도 한 대? 내버려 둬, 관심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헤더 영애랑 레이몬드 2황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너 알고 있었어?”
하아? 리하르트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클레어 헤더와 레이몬드 2황자라니. 애초에 둘을 엮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런 표정으로 뒷말을 삼키니 제이드 백작이 자기도 믿기지 않는 기색으로 답했다.
“난 아직도 너한테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영애도 제법이더라. 이러다 황자비라도 되면 나중에 네가 그 영애한테 머리 숙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뜬소문이라도 어느 정도는 말이 되게끔 해야지. 넌 그따위 소문을 다 믿나?”
리하르트는 즉시 헛소문으로 치부하며 일축했다.
“성의 시녀들 입에서 나온 얘기라고. 추측이 아니라 직접 눈으로 봤다는데. 유리 황녀가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고.”
“그만.”
미련을 못 버린 제 친우가 계속 클레어 헤더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려하자, 리하르트는 내려놓았던 만년필을 집어 들며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난 그딴 얘기 듣느라 허비할 시간 없으니 그만 나가.”
괜히 그러는 게 아니라 정말 그쪽엔 흥미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조금은 놀라워하는 반응을 기대했던 제이드 백작은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뭐 너야 이미 성녀한테만 꽂혀 있으니, 클레어 헤더에겐 관심도 없으려나. 방해해서 미안했다. 난 그럼 이만!”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그는 불쑥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 집무실에 홀로 남겨진 리하르트는 만년필을 손안에서 가볍게 한 번 돌렸다. 원래는 그에게 없던 버릇으로, 누군가에게 옮은 것 중 하나였다.
‘클레어 헤더와 레이몬드 2황자라고?’
제 친우가 가져온 헛소문을 다시 떠올리며 그는 코웃음을 쳤다.
절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앞서도 생각했듯 애초에 그 둘이 엮이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될뿐더러…….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말에 속이 텅 비어버린 인형처럼 눈물만 흘리던 모습도 기분 나쁠 정도로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데, 무슨.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뻐하고, 제 전부를 잃은 것처럼 절망하던 여자였다. 언제나 자신의 눈치만 살피고, 제 행동 하나 하나에 쓸데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사람을 숨 막히게 했다.
한때는 그런 모습에 연민과 함께 아주 잠깐 마음이 동한 적도 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항상 모든 걸 자신에게 맞추기만 하고 제 의견 하나 말하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이 지긋지긋했다.
아마 그 여잔 평생 그러고 살 거라는데 확신이 있었다. 어지간히 제게 미쳐있는 여자였다. 너무 무거워서 질식할 것만 같은 마음이었다. 제게 그런 감정은 성가시고 불쾌하기만 하다는 것조차 그 여잔 모르고 있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여잔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자신이 부를 때만 오고, 부르지 않을 땐 결코 먼저 연락을 해오거나 찾아오는 일이 없었다. 뒤탈도 없고, 필요할 때만 찾아도 되는 쉬운 상대. 그 점만은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깨끗이 관계를 정리한 이후에 그 여자에 대해선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어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었다.
워낙 어둡고 음침한 여자라 괜히 자살 소동 따위를 벌여 일을 시끄럽게 만들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이제 너도 다른 상대를 찾아보라는 말에 그 여자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난 이제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저러다 쓰러지진 않을까 싶을 만큼 창백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거기에 리하르트 자신은 대답했다.
―그럼 평생 그렇게 혼자 짝사랑이나 하면서 살든가.
크게 상처를 받은 듯 흐려지는 눈동자를 외면하고 그대로 돌아서 버렸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후련함을 안고서.
그랬던 여자가 고작 며칠 만에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고, 그 상대도 다른 누구도 아닌 레이몬드 2황자라는 게 말이 되나. 애초에 서로 만날 만한 접점도 없는 상대인데.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그러다 제가 뭐하러 그 여자 생각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리하르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무심코 쥐고 있던 만년필을 손안에서 돌리던 그는 짜증스레 책상 위로 내던져버렸다. 쯧, 쓸데없는 버릇만 옮아서는.
몇 번을 다시 곱씹어봐도 정말 웃기지도 않는 얘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반복해서 생각하게 되는 건.
―난 이제 당신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제 전부를 내어줄 것처럼 굴던 여자가, 자신이 아니면 죽어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던 여자가, 감히 제게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쾌하기 때문이리라.
절대 그 여자가 이제 와서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