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7) (18/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7)

유리 황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벌벌 떠는 두 사람의 모습을 봤을 때도 그랬다. 통쾌하다는 마음보다는 오히려 그게 더 서글프고,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쉽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그 사람들의 눈에 벌레보다도 못하게 비쳤던 나의 존재가 너무도 작고 비참하고 서러워서.

“형슈님 갠차나요?”

괜한 감상에 젖어 있는 내게 알렌 4황자가 말을 걸어왔다. 나와 똑같이 유리 황녀에게 손을 잡혀 걸어가고 있던 어린 황자의 눈동자가 나를 걱정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그에 나는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제야 안도한 듯 살포시 웃는 아이의 뺨이 죽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열 받아 뒤지겠네.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제일 먼저 빼냈어야 하는데!”

나와 알렌 4황자가 저를 사이에 두고 시선을 주고 받는 사이, 유리 황녀는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발을 쾅쾅 내디디며 걸어가던 그녀가 뒤를 부지런히 따라오던 제 호위 기사에게 척척 명령을 내렸다.

“빈센트!”

“예, 황녀 전하.”

“당장 가서 마차 출발 준비시키고, 연락용 마력구로 연락해서 고위 신관 한 명 불러 놓으라고 해!”

“알겠습니다.”

“아오, 개빡쳐 진짜!”

저택을 나오자 마차는 금세 눈앞에 대령 되었다. 유리 황녀는 황실의 문양이 박힌 마차에 나와 알렌 4황자부터 밀어 넣은 후 본인도 마차에 올라타 문을 쾅 닫았다.

싫다 좋다 말을 할 시간도 없었다. 잠옷 위에 겉옷을 적당히 걸쳤을 뿐인 상태로 마차에 밀어 넣어진 나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왜요!”

유리 황녀가 나를 보지도 않고 팩 토라진 어조로 답했다.

“뭐요, 뭐! 왜! 뭐! 나 잘못한 거 없어! 잘못했다고 절대 말 안 할 거-.”

“감사합니다.”

왜 그랬는진 몰라도, 유리 황녀는 내가 그녀의 행동을 비난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제 손으로 귀를 막는 시늉을 하다가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슥 돌아보았다.

“사실은 조금 속 시원했어요.”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처음이에요. 절 위해 그렇게까지 화내준 사람은.”

오롯이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만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굳이 나의 어두운 내면까지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정말 기뻤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꾸벅 고개를 숙이려는 찰나, 그보다 먼저 다가온 유리 황녀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내가 다 화내줄게요. 착해빠진 언니 대신에.”

힘주어 나를 끌어안는 그녀의 작은 품 안에서 나는 당황해 굳어있다가 살며시 그녀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저 별로 안 착한데…….”

“알렌두! 알렌두요!”

혼자 소외되는 느낌이 싫었던 걸까. 알렌 4황자도 토다닥 달려와 그 짧은 팔로 나와 유리 황녀를 함께 끌어안았다. 작은 어린아이의 몸인지라, 끌어안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끌어안긴 듯한 모양새가 되었지만.

나는 팔을 움직여 두 사람을 함께 꼬옥 끌어안으며 생각했다. 대체 어쩌다 내게 이렇게 커다란 행운이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래, 정말 어쩌다 오게 된 걸까.

“황녀 전하.”

“응? 왜요?”

나는 조심스럽게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떼어냈다. 갑자기 몸이 밀려나자 두 사람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담긴 시선을 담아 보내며 말했다.

“그래도 제가 이렇게 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다시 가서 얘길 좀 하게 해주세요.”

유리 황녀의 표정이 단번에 험악해졌다. 예쁜 얼굴이 구겨지더니 토라진 듯 고개를 휙 돌려버린다.

“가서 무슨 얘길 하게요? 그런 사람들이랑 말이나 통하겠어요?”

그러고는 기분이 완전히 상했다는 태도로 다시 원래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까처럼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 손으로 귀를 틀어막으면서.

“언니는 앞으로 우리랑 같이 살 거예요.”

“네? 아뇨, 그건.”

“아, 몰라요. 몰라. 언닌 우리랑 같이 황성에서 지낼 거예요. 땅땅! 이 얘긴 이제 끝.”

유리 황녀는 내가 그에 관해 말을 꺼낼 타이밍도 주지 않고 막무가내로 우겨댔다.

“형슈님 이제 우리랑 같이 살아요?”

알렌 4황자까지 내 손을 꼬옥 잡아오며 묻는데, 이제 안 된다고 하기도 뭣 했다.

나는 그 상태로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을 지켰다.

덜커덩.

거의 소리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던 마차가 한 번 크게 덜컹거렸다.

알렌 4황자가 창문에 머리를 꿍 박고는 아프다며 칭얼거리는 걸 받아주던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뭔가 큰 각오가 필요할 때면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행동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째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지금껏 내내 궁금해 왔던 질문을 불쑥 던지자, 일부러 창밖만 쳐다보던 유리 황녀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떻게 저를 알게 되셨나요?”

유리 황녀의 옆얼굴이 눈에 띄게 굳는 게 보였다. 마치 내가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보기라도 한 듯이.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물어볼 수 있을지 몰라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저흰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걸로 아는데, 왠지 꼭 처음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것처럼 느껴져서요.”

머리에 「호」를 해달라고 조르던 알렌 4황자도 이내 조용해져선 유리 황녀를 돌아보았다.

나는 묘하게 내 눈을 피하는 듯한 유리 황녀에게 미안함을 담은 시선과 함께 말했다.

“혹시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저희가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가요?”

* * *

아마 이건 레이몬드 2황자도 궁금해하고 있지 않을까.

일전에 나눴던 대화들을 떠올려보면 분명 그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 눈치였으니까.

유리 황녀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내게 관심을 보이고, 다가오는 것인지. 줄곧 궁금했었다. 하지만 어차피 일시적인 거겠지, 이제 더는 만날 일 없는 사람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묻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감히 먼저 질문을 해도 될만한 상대도 아니었고.

궁금하지 않아서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던 게 아니다. 그렇기에 한 번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더더욱 참을 수 없이 궁금해졌다. 대체 왜 나를 그렇게까지 좋아해 주는 건지, 그리고 어떻게 나를 알고 있는 것인지.

제국 황실의 하나뿐인 황녀와 아무런 힘도 없는 자작가의 영애. 서로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 없는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는 건지. 단순히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대체 어떻게 날 알았고, 이렇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준 건지.

난데없이 나타나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그녀의 존재가, 그 이유가 궁금해 견딜 수 없어졌다.

“어……, 음…… 그게…….”

그런데 어째서인지 유리 황녀로부터 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피하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곤란한 질문을 한 건가? 나를 어떻게 알고 있었냐는 질문이 그렇게 대답하기 힘든가?

생각지도 못한 유리 황녀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궁금하긴 하지만, 상대가 저렇게까지 곤란해하니 오히려 내 쪽이 그녀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괜한 질문으로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안함이 앞섰다.

“곤란하시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아니,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와 유리 황녀는 거의 동시에 말을 내뱉다 동시에 말을 멈췄다. 서로 자기 말을 하느라 상대가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탓에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녀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세요.”

“네? 아.”

유리 황녀에게 먼저 말을 하라 권하고는 가만히 기다리는데 그녀는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괜히 분위기만 더 이상해진 것 같아 다시 한번 괜찮다는 말을 하려 입술을 뗐다.

“알렌이 아라요!”

조용히 앉아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알렌 4황자가 한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러고는 눈을 반짝이며 그런 저를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내게 바짝 다가와 앉았다.

“누님이 왜 형슈님을 조아하눈지 알렌이 알구이썹읍!”

“흐하핫! 알렌 이 녀석이 뭔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요. 요 녀석이 알긴 뭘 안다고. 하핫!”

그러나 금세 유리 황녀에게 제압당해 입을 막혔다. 잠시 괴로운 듯 몸부림을 치던 알렌 4황자가 이내 포기한 듯 얌전히 그녀의 품에 안겼다. 살짝 불만 어린 눈동자가 유리 황녀를 원망스럽게 쳐다보긴 했지만.

눈에 띄게 당황해하는 유리 황녀를 보며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말했다.

“말씀하시기 곤란하신 거면 괜찮아요.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괜한 질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정말 이제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일부러 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자, 알렌 4황자를 끌어안고서 어색하게 웃던 유리 황녀도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언니.”

몇 번을 들어도 쉬이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었지만, 나는 가만히 그녀의 진지한 눈을 마주보았다.

“지금 내가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 대답하고 이 상황을 넘기기는 쉬워요. 근데 언니한테는 그러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전부 다는 힘들겠지만, 언젠가 꼭 언니한테는 진짜 그 이유를 말해 줄게요.”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들과는 달리 묘하게 자신이 없는 표정과 말투가 신경이 쓰였다. 그럼에도 내 시선은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쳐오는 눈동자에서 유리 황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저는.”

그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시선과 함께 차분히 내 마음을 전했다.

“말해주시지 않아도 좋고, 거짓말로 절 속이셔도 괜찮아요. 저는 오늘 황녀 전하께서 저를 위해 그렇게 화를 내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마음에 지닐 빚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정말 괜찮아요.”

그제야 안도한 듯 한결 편안해진 그녀의 금색 눈동자를 따스하게 바라보면서,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앞으론 황녀 전하께서 말해주실 때까지 절대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을게요.”

유리 황녀는 살짝 붉어진 눈으로 나를 한참 응시하더니,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나를 또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으휴, 진짜! 착해 빠져가지고!”

“저 정말 안 착한데.”

이제 이 패턴에 조금 익숙해진 나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끌어안았고, 기다렸다는 듯 알렌 4황자도 토다닥 다가와 안아달라는 듯 팔을 벌리고 섰다. 나는 또다시 두 사람을 함께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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