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6)
“또 에이든 네 짓이냐?”
에젯트 헤더가 바로 맞은편 소파에 삐딱하게 앉아있는 제 손자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집안에선 워낙 거리낄 것 없이 행동하는 에이든이었지만, 그래도 제 할머님의 눈치는 꽤 보는 편이었다. 제가 그 보잘것없는 검 실력으로 황실 기사단에 입단할 수 있었던 것도 제 할머님이 뒤에서 열심히 물밑 작업을 한 덕분이라는 걸 잘 아는 인간이니까.
그녀의 못마땅한 시선에 에이든은 슬쩍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그런다고 상황을 모를 리는 없는 그녀가 혀를 쯧쯧 차며 다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너도 참…….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이젠 좀 눈치껏 행동 좀 못 하니? 그보다 그림은?”
평소처럼 에이든을 길게 혼내는 대신, 내게 행동을 똑바로 하라는 지적과 함께 그녀가 본론을 꺼내왔다.
내가 이 집으로 들어와 2년이 지났을 무렵부터 에젯트 헤더는 조금 더 제대로 된 그림 도구들을 갖춰주기 시작했다. 평소 그림에 관심이 많은 귀족부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던 그녀는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은 그림에서 나도 모르는 재능을 발견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게 커다란 캔버스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도구들을 갖춰주며 정식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녀의 속내 따윈 전혀 몰랐던 나는 정말 순수하게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점점 더 내게 투자하는 걸 아끼지 않았고, 내가 그린 그림들을 어디론가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게 천재 화가 흉내를 내고 싶어하는 귀족부인에게 비밀리에 팔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아주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때도 지금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혼자 살아갈 힘조차 없는 내게는 아직 이곳이 꼭 필요한 장소였으니까. 얌전히 그녀의 말을 따라 그림을 그리고, 그것들이 다른 귀족부인의 작품이라 불리게 되는 것도 지켜보기만 해야 했다.
“완성된 건 얼마나 돼.”
쉽게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녀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어왔다. 나는 가만히 고개만 숙였다.
“……죄송합니다.”
“설마 하나도 없어? 미쳤니? 제정신이야? 남자한테 차였다고 네 밥줄도 끊을 작정이냐? 지금까지 네가 누구 덕분에 먹고 살았는지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예상대로 곧장 온갖 비난이 날아들었다.
“트뷔에 백작부인이 저번 달부터 계속 재촉하고 있단 말이다. 이러다 거래가 끊기기라도 하면 어쩔 거냐고!”
“9일 안으로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나는 최대한 기한을 촉박하게 잡아 가까스로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마저도 잠은 한 시간이라도 잘 수 있을까 고민하며 어렵게 낸 답이었는데, 그녀의 기준에는 전혀 닿지 못했다
쯧, 또 한 번 혀 차는 소리가 귓가를 후려쳤다.
“안 돼, 너무 늦어. 3일 내로 뭐든 완성해.”
“하지만.”
“토 달지 말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리예요. 시간을 더…….”
짜악!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건지, 에이든의 손이 내 어깨를 잡아채더니 뺨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새벽에 맞은 상처에 겨우 딱지가 앉았건만, 또다시 상처가 벌어진 느낌이 났다. 이번엔 입 안도 크게 찢어졌는지 혀에 피 맛이 진하게 돌았다.
“토 달지 말란 말 못 들었냐?”
“에이든!”
내가 아무리 싫어도 제 눈앞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만큼은 싫어하는 아젯트 헤더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번엔 제 할머님의 눈총에도 에이든은 기세등등하게 나를 때렸던 손을 흔들며 웃었다.
“이거 요즘 말로 해선 잘 못 알아먹는다니까요. 무슨 이유에선지 황가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더니 시건방져져선-.”
“지금 뭐 하는 거야?”
순간 헛걸 들은 줄 알았다.
최근 며칠간 평생 들을 유리 황녀의 목소리를 다 들어버린 탓에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닌가 했다.
“우리 형슈님 때려써어…….”
돌아본 응접실 입구에 유리 황녀는 물론, 알렌 4황자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서 있는 모습을 보곤 이제 환각까지 보이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언니 왜 때려, 이 미친 새끼야!”
“황녀 전……? 악!”
돌연 성난 소처럼 돌진해온 유리 황녀가 소파를 밟고 뛰어올라 에이든의 머리채를 잡고, 알렌 4황자가 으아앙! 울음을 터뜨리면서, 금세 이 모든 게 현실임을 깨달아야 했다.
“우리 언니 때릴 데가 어딨다고 때려! 샌드백이 필요하면 거울 보고 니 면상이나 치라고, 이 또라이야!”
“아악!”
충격에 휩싸여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에이든의 비명에 정신이 든 나는 다급히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그러나 유리 황녀가 어찌나 에이든의 머리채를 강하게 잡고 있는지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황녀 전하, 진정하세요!”
“아, 언니 이거 놔봐요! 오늘 얘 죽고 나 죽는 거니까! 야, 너 몇 살이야? 어? 학생증 까봐, 이쒸!”
“황녀 전하!”
학생증이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에이든이 황녀 전하보다 네 살이나 많습니다! 그리고 제발 놔주세요! 나는 필사적으로 유리 황녀의 팔에 매달려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애썼다.
소란을 들은 집사와 저택의 사용인들, 유리 황녀를 따라온 듯한 황실의 기사들까지 우르르 몰려왔다. 하지만 하나같이 허락 없이 감히 황녀의 몸에 손을 댈 엄두가 안 나는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나만 혼자 낑낑대며 유리 황녀를 떼어내려 애썼으나, 조그만 몸에서 어떻게 이런 힘이 나오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러다간 정말 에이든의 머리카락이 다 뽑혀야 끝이 날 기세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에이든이 이 소란 속에서도 용케 그녀가 며칠 전 헤더 자작저를 찾아왔던 유리 황녀라는 건 알아본 것 같다는 거였다. 그러니 제 머리털이 다 뽑혀나갈 듯한 상황에서도 유리 황녀에겐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있는 것일 테니까.
“누니임!”
그 난장판 중에 울음기 가득한 알렌 4황자의 목소리가 빼액 울려 퍼졌다. 다행히 유리 황녀도 제 동생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왔는지 잠깐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알렌은 아프게 하는 거 시러요!”
알렌 4황자가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서도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서자, 유리 황녀의 팔에 들어간 힘도 살짝 느슨해졌다. 그녀는 에이든의 머리채를 놔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로 알렌 4황자를 돌아보았다.
“그, 그치만 얘가 우리 새언니 괴롭혔단 말야.”
“그래도 아프게 하는 거 나빠! 때찌야!”
조그맣고 어린 황자는 보기보다 의외로 강단이 있었다. 동생의 교육상 이런 모습을 계속 보이는 게 좋지 않다고 판단한 듯, 유리 황녀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에이든의 머리채를 놓아주었다.
유리 황녀의 손에는 이미 반쯤 뽑히다 만 에이든의 머리카락이 한가득이었다. 그녀는 불쾌하다는 듯 그 머리카락을 탁탁 털어냈다.
“아이씨…….”
에이든은 유리 황녀의 손에서 제 머리털이 후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숙인 채 나직이 이를 갈았다. 사용인들 앞에서 우스운 꼴이 된 게 어지간히 분한지 얼굴도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를 그리 만든 게 유리 황녀만 아니었다면 벌써 손이 올라갔을 개새끼가, 그러지 못해 분통이 터져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짜악!
뺨을 힘껏 후려치는 소리가 응접실 안을 가득 울렸다.
나는 내가 지금 뭘 본 건지 믿기 힘든 눈으로 에젯트 헤더를 바라보았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주의 뺨을 힘껏 갈긴 그녀가 우악스럽게 에이든 헤더의 목덜미를 잡고 강제로 바닥에 꿇어 앉혔다. 에이든 헤더는 저를 그렇게 아끼던 할머님에게 맞은 충격 때문인지 어버버거리다 얌전히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오랫동안 이름도 없는 자작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지켜왔던 에젯트 헤더는 눈치가 빠르고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유리 황녀와 그녀를 따라온 황실 소속 기사들의 등장만으로 순식간에 상황 판단을 끝내고, 제 손자의 머리를 땅에 처박으며 무릎을 꿇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황녀 전하. 제 손자가 무지하여 멋대로 벌인 행동입니다.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 주시면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 뭐야?”
씩씩 콧김을 뿜으며 화를 삭이고 있던 유리 황녀가 그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싸늘하게 내리꽂히는 그녀의 목소리에 에젯트 헤더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저는 아젯트 헤더라 합니다.”
“헤더? 당신도 헤더 자작가의 사람이야? 그럼 당신이 여기 가주한테 전해.”
유리 황녀는 일부러 엎드린 두 사람의 바로 앞에 서서 발로 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꼭 이렇게 걷어차고 싶은 건 바닥이 아니라, 너희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클레어 헤더는 우리가 데려갈 테니까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절대 찾지 말라고. 아니, 죽을 때도 찾지 마!”
내게는 이상할 만큼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존댓말을 고집하던 유리 황녀였던지라, 오히려 그녀가 황족답게 말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내게는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너 나빠. 이제 우리 형슈님 개롭히지 마. 알게찌?”
거기에 알렌 4황자까지 에이든 헤더의 앞에 서서 잔뜩 화가 난 듯 볼을 부풀리며 말하는데, 이쪽은…… 그냥 너무 귀여웠다.
“알렌, 그런 것들이랑 말도 섞지 마! 지지야! 이리 와!”
“웅!”
유리 황녀는 제 귀여운 동생이 그녀들과 상종하는 것도 싫은지 냉큼 알렌 4황자의 손을 잡아 끌었다. 다음으로는 내 손까지 척 잡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응접실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언니, 그만 가요!”
“황녀 전하, 저는.”
당황한 내가 잠깐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할 새도 없이, 나는 그대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했다. 아까도 생각했지만 유리 황녀는 자그마한 덩치에 비해 과하다 싶을 만큼 힘이 좋았다.
복도에 죽 늘어서 있던 사용인들은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옆으로 비켜서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평소와 달리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고 있는 사용인들 사이를 지나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따금씩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를 본체만체하거나 일부러 날 두고 손가락질하며 저들끼리 키득거리기 바쁘던 사람들이, 지금은 저렇게 고개도 못 들고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로 쉽게 가를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삐죽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