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5)
“일단 이날 오빠랑 성녀를 만나지 못하게 하면 되려나?”
“그리고 클레어 언니를 연회에 투입하는 거지. 둘째 오빠가 우리 예비 새언니한테서 눈을 못 떼게 못을 딱 박아두고.”
“아, 근데 또 재수 없게 하필 이 개새끼랑 만나진 않겠지.”
“이 새끼 어떻게 연회에 못 오게 하는 방법 없나? 안 되나? 이건 꼴에 남주라고 공작씩이나 되고 난리야. 설사병에나 걸려라.”
아오, 머리야.
습관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양피지 위에 원작 내용을 복기해나가던 유리는 뒹굴 침대 위를 굴렀다.
색색 숨소리에 옆을 돌아보자, 알렌이 제가 아끼는 애착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잠들어있다. 저를 꼭 닮은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잠든 모습이 퍽 귀여웠다. 유리는 이불 밖으로 나온 알렌의 다리를 다시 이불 안으로 넣어주고는 커다란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고요한 밤의 하늘을 보고 있자니, 낮에 그 난리를 쳤던 게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지금쯤이면 우리 예비 새언니도 집에 도착했으려나.’
유리는 서너 시간 전의 기억을 되돌리며 더 심란한 얼굴을 했다.
제가 온갖 난동을 부려서 억지로 결혼 약속을 받아낸 후, 둘째 오빠가 헤더 영애와 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게 해달라는 말에 선뜻 허락을 해줬었다. 그러고는 살짝 대화 내용을 엿들으려 했건만 실패했다. 아무리 문에 귀를 바짝 갖다 대도 황성의 완벽한 방음 설비 덕분에 웅웅웅 말소리가 다 뭉개져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런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어마마마의 시선을 모른 척하느라 애만 먹었다.
그 후엔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꽤 한참을 대화를 나누는 것 같더니, 함께 문을 열고 나올 때는 둘 다 표정이 잔뜩 굳어있었다.
헤더 영애는 억지로 웃는 기색이라도 보였지. 둘째 오빠 쪽은 웃지도 않고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어서 더 신경 쓰였다. 아무리 철없는 여동생 역할인 자신이라도, 둘이서 뭔 얘기를 나눴냐고 따져 물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헤더 영애는 붙잡을 새도 없이 둘째 오빠가 마차에 태워 돌려보내는 바람에 잔뜩 심통이 난 유리였다. 이 기회에 자고 가라며 헤더 영애를 붙잡고 밤새 둘째 오빠에 대한 매력에 대해 알려줄 계획이었는데 실패로 돌아간 탓이다. 덧붙여서 뺨을 그렇게 만든 새끼는 어떤 망할 새끼인지 알아냈어야 했는데…….
“진짜 원작 남주 새낀 아니겠지?”
진짜 그런 거면 이 새끼 가만 안 둔다. 추잡한 놈이 여자를 때리기까지 해?
흥분해서 저도 모르게 헤더 영애에게 말실수했던 기억을 되짚다 갑자기 또 열이 뻗쳤다.
“아예 이 새끼 원작 여주한테도 차이게 하는 방법 없나.”
제일 좋은 복수 방법은 원작 남주가 클레어 헤더를 돌아보게 되는 것인데, 거지 같은 원작 내용을 보면 그건 무리인 듯해서 아쉬웠다. 후회남주가 아니라 여주에게 매달리기만 하다 비참하게 밀려나는 후회남조 역할에 딱인데 말이다.
내가 갈 때 가더라도 이 새끼 쫄딱 망하는 거 보고 가야지, 쒸익쒸익.
원작 결말을 떠올릴수록 열이 뻗쳐 혼자 욕을 남발하는데 얌전히 잠들어있던 알렌이 뒤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혹시 제 말소리에 깬 건가 싶어 슬쩍 옆을 보니, 다행히 그냥 잠결에 뒤척거린 모양이었다.
유리는 무심코 제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떼고 다시 뒹굴 몸을 굴렸다. 펼쳐둔 양피지 앞에 앉아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깃펜을 집어 들었다.
가뜩이나 어지럽게 동그라미가 쳐진 「건국기념일 연회」 이란 글자 위에 별 표시를 다섯 개나 그렸다.
‘이날이 진짜 터닝포인트다.’
네 사람, 아니, 최소한 두 사람의 운명은 확실히 뒤집어엎어 놓을 진짜 전환점.
유리는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묘한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안고서.
‘그런데……, 진짜 이래도 괜찮은 건가?’
별 다섯 개도 부족한 것 같아 거기에 다섯 개를 더 그려 넣던 유리의 손이 점점 느려졌다. 아홉 개째의 별을 그리고는 완전히 손이 멈춰버렸다.
이미 저지를 대로 다 저질러 놓고는 이제 와선 뭐냐고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도 불쑥 마음이 흔들리는 건, 제가 바라는 대로 전개가 되고 있음에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가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한 사람이.
제가 실수로 아델 공작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클레어 헤더의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상대를 향한 미련이 뚝뚝 묻어나던 그 눈동자가 잊히질 않았다.
그 상태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될 수는 있을까? 이게 정말 그녀를 위한 게 맞는 걸까? 차라리 원작대로 두는 게 그녀를 위한 일일까? 의문이 들면서, 스스로의 결정에 자신감을 잃어갔다.
‘그렇다고 그 개새끼를 위해 죽는 꼴을 또 보라고?’
‘평생 사랑이라고는 받아본 적 없이 자라서, 겨우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제 전부를 바치고는 아무것도 보상 받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두라고?’
‘제가 죽는 순간까지 저를 돌아봐 주지 않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원망의 말 한마디도 못 하는 바보를 그냥 내버려 두라고?’
유리는 제가 직접 보고 겪었던 클레어 헤더의 모습들을 떠올렸다.
단순히 글로만 읽었을 때보다 훨씬 더 다정하고 여린 심성을 가진 사람. 너무 많은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 누구 하나 제가 가진 슬픔을 털어놓을 존재도 없는 사람. 그런데도 타인에게 상냥하게 웃어줄 줄 아는 사람.
갑자기 나타난 알렌과 저를 보고도 황족과의 친분을 발판 삼아 올라서려는 욕심 따윈 없이, 그저 알렌과 자신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눠주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제멋대로인 자신의 억지도 진지하게 받아주는 모습도, 알렌에게 상냥하게 웃어주던 모습도, 누군가에게 뺨을 얻어맞고도 화를 내거나 도와달라 말도 하지 못하던 모습도. 전부.
‘죽어도 그렇겐 못 하겠다.’
쓸데없는 오지랖이든 뭐든 좋았다. 그 바보를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두느니 자신이 염병 천병 오지라퍼 소릴 듣는 게 나을 듯했다.
촤촷! 양피지 위에서 멈췄던 손을 움직여 별 열 개를 완성한 후에야 유리는 만족한 미소를 떠올렸다.
목표는 하나.
클레어 헤더의 해피엔딩을 위하여!
* * *
똑똑똑.
희미한 노크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새벽 늦게야 겨우 잠들었던 탓에 정신은 돌아왔어도 눈을 뜨기가 쉽지 않았다. 노크 소리가 연이어 몇 번이나 이어지고 나서야 억지로 눈을 뜨고 시간부터 확인했다.
벌써 오전이 다 지난 시간을 확인한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찢어진 입가가 쓰려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어젯밤 자작저로 돌아온 뒤로, 숙모님인 헤더 자작부인에게 한참을 시달려 피로가 더 누적된 기분이었다. 유리 황녀에 이어 레이몬드 2황자가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은 안 그녀가 이유를 계속 캐묻는 통에 그걸 얼버무리느라 있는 머리 없는 머리를 다 짜내야 했다.
그나마도 적당히 넘기려는 태도가 딱 봐도 보였던지, 대답 똑바로 안 한다고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를 견디느라 진이 다 빠졌다.
거기다 중간에 에이든 헤더까지 돌아와선 얼굴이 왜 멀쩡해졌냐며 또 뺨을 때리는 바람에 얼굴이 더 엉망이었다.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트집을 잡고 내게 손을 대는 행동은 잘 하지 않았었는데, 최근 헤더 자작부인도 에이든 헤더도 갑자기 유독 더 내게 모질게 구는 느낌이었다. 꼭 내가 이 집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처럼.
결국 새벽이 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풀려난 나는 방에 돌아와서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밤을 꼴딱 새버렸다.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일어나려니 몸이 정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머리는 머리대로 아프고, 여기저기 삭신이 쑤셨다.
침대에서 내려서자마자 방 한가운데 세워진 캔버스가 보였다. 점 하나 그려진 흔적 없이 깨끗한 캔버스를 보고 있자니, 꼭 속이 텅 빈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걸어가 캔버스를 어두운 천으로 휙 덮어버렸다.
“아가씨.”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겉옷을 대충 걸쳐 입고 문을 열자, 집사인 알베르토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문 앞에 가만히 기다리고 서 있었다. 이 집에선 몇 안 되게 나를 제대로 귀족 취급해주는 사람중 한 명으로, 그에겐 항상 감사하고 있었다. 헤더 자작부인이나 에이든 헤더가 내게 너무 심하게 굴 땐 일부러 화제를 돌려 막아주는 일도 많았고.
내 얼굴이 생각보다 더 심각한지, 나이든 집사의 얼굴에 주름이 더 잡혔다. 나는 민망한 듯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다 욱신거리는 통증에 얼른 손을 떼어냈다.
알베르토는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래층 응접실에 에젯트님께서 와 계십니다.”
에젯트 헤더. 전 헤더 자작부인이자, 내 아버지의 어머니.
집사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자마자 나는 낭패 어린 얼굴로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자연히 따라오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나는 불안해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조금 전 보았던 새하얀 캔버스가 떠오르면서 두통이 더 심해졌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인데 더 정신이 없게 생겼다. 결과물이라고 할만한 것조차 없다는 걸 알렸다간 그녀가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성격 급한 그녀를 계속 기다리게 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얼른 찬물로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입은 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초조하게 응접실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던 에젯트 헤더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확 그었다.
“얼굴 꼴은 또 왜 그래?”
그녀는 그림 외에 나의 모든 것에 대해 내게 무관심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집안에서 이런 식으로 남에게 흠 잡힐 만한 일이 일어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땐 본인이 누구보다 더 많이 나를 매질하곤 했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헤더 자작부인이나 에이든 헤더가 나를 때려서 노골적으로 흔적을 남기는 걸 싫어했다. 덕분에 그녀가 이 집안에 머물 땐 얼굴만은 피해서 맞게 된 것이다.
최근엔 그녀가 건강 문제로 시골의 작은 영지에 자주 머물게 되면서, 헤더 자작부인과 에이든 헤더도 딱히 거리낄 게 없어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