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4) (15/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4)

“아가, 이 엄마 생각에 그건…….”

몇 초의 텀을 두고, 카롤리나 황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날아든 유리 황녀의 매서운 시선에 그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왜요? 설마 안 된다고 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나랑 약속했는데? 두 사람 결혼하기로 이미 얘기가 다 됐을 텐데?”

그러면서 팔을 걷어붙이는 게 금세라도 다시 성의 꼭대기층으로 뛰어올라갈 기세였다.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 꼭 저걸 묶어둘 수도 없고 어쩌지 하는 얼굴이었다.

“며칠 뒤면 건국기념일 행사도 있고, 당분간은 일정들이 밀려있어서 힘들어.”

도움을 청하는 나와 카롤리나 황후의 시선을 느낀 그가 한숨과 함께 담담히 말했다.

“뭐?”

유리 황녀는 곧장 얘기가 다르지 않냐는 눈빛으로 레이몬드 2황자를 노려보았다. 레이몬드 2황자도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얼른 준비한 다음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래서 내 생각에 그동안은 일단 헤더 영애와 서로 좀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데.”

다행히 이번엔 꽤 유리 황녀의 마음에 드는 대답인 모양이었다. 유리 황녀가 뭔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기분 좋은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그러네.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결혼은 좀 그렇지? 결혼을 전제로 연애도 해보고 그래야지. 맞아,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같이 축제 구경도 가고, 같이 뱃놀이도 가고 하면서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 것도 괜찮겠어. 결혼식 전에 키스 정도는 해봐야지. 흐흐흐.”

그러고는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한참 중얼중얼 혼잣말을 시작했는데, 당황한 나와 달리 레이몬드 2황자는 그 모습도 익숙한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저 말 안 듣는 망아지가 또 시작했구나 하는 눈빛으로 조용히 지켜볼 뿐.

“아! 그리고! 건국제 연회에 언니도 초대해서 오빠가 에스코트해주고! 약혼식 따로 하긴 힘드니까 그때 둘이 같이 있는 모습 보여주고 그러자! 은근슬쩍 곧 약혼할 거라는 티도 내주고! 어때? 괜찮지?”

건국제 연회라면 당연히 황실에서 주최하는 연회를 말하는 것일 터다.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만 초대받는 것으로 아는 연회에 나를 초대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건만, 거기에 레이몬드 2황자에게 직접 나를 에스코트 하라니.

대다수 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그런 식으로 연회에 나타나면, 정말 우리가 결혼할 사이라는 식으로 공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굳이 약혼식을 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이미 유리 황녀가 성 꼭대기에서 난리를 치고 내가 끼어들어 결혼이 확정 난 것처럼 말이 돌게 된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레이몬드 2황자까지 보태어 그런 모습을 보였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는 느낌이었다.

카롤리나 황후와 레이몬드 2황자도 그녀를 막기 힘들다면 나라도 나서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찰나였다.

“알았다, 알았어.”

레이몬드 2황자가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한 걸음 유리 황녀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앞을 살짝 가로막듯 서서 손으로 응접실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알았으니까 일단.”

넓은 응접실 안에는 벽 한쪽에 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아마 따로 얘기를 나누고 싶은 상대와 장소를 옮기고 싶을 때 사용하는 장소인 듯했다.

“우리도 좀 갑작스러워서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으니 헤더 영애와 단둘이 얘기하게 해 줄 수 있을까.”

둘만 있게 해달라는 그의 요구에 유리 황녀는 또 살짝 반발심과 의심이 깃든 얼굴을 했다. 그러나 오늘은 충분히 제가 원하는 대로 소득이 있었다고 판단이 들었는지 이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클레어 언니를 잠시 독점할 권리를 주지.”

아주 오만하게, 그새 제자리로 돌아온 호칭을 당당히 외치면서.

* * *

예상대로 응접실 바로 옆에는 또 다른 공간이 마련되어있었다. 과하다 싶을 만큼 넓었던 응접실에 비하면 작고 아담해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누기에 딱 좋을 듯했다.

황후 폐하께 먼저 양해를 구하고 레이몬드 2황자를 따라 작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긴 나는 그가 빼 주는 의자에 앉으며 민망한 표정을 감췄다.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레이디 대접을 받아본 기억이 없어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민망함이었다.

“우선 일이 이렇게 돼서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헤더 영애.”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마자 레이몬드 2황자가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없던 두통도 밀려드는 듯 한껏 미간을 찌푸린 모습에 나는 테이블 아래로 초조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가 느끼는 두통의 원인에 나도 영 죄가 없지는 않은 탓이었다.

“아뇨, 저야말로 상의도 없이 일을 벌여서 죄송해요.”

“아니오, 사과하지 마세요. 헤더 영애가 그렇게 나서주지 않았으면 일이 더 커졌을 겁니다.”

“아니에요. 그래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었을 텐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2황자 전하께 너무 심한 폐를 끼쳤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헤더 영애께 폐를 끼쳐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번 일로 인해 차후에 헤더 영애에게 황자의 전 약혼자라는 낙인이라도 찍히면…….”

앞서도 그랬듯 서로 내가 더 잘못했네 아니네 또다시 한참 책임을 떠맡으려는 언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레이몬드 2황자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

그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아무래도 차후에 원래대로 관계가 돌아간 이후에 내 혼삿길이 막히지 않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황자의 전 약혼녀로 찍힌 귀족 영애라면 당연히 혼담이 들어오지 않아 곤란하게 될 테니까.

굳이 끝까지 듣지 않아도 대충 그 의미를 알아들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가짜라고는 해도 지금 결혼 얘기가 오가고 있는 건 레이몬드 2황자인데도, 막상 나의 결혼에 대해 말이 나오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눈동자가 처음으로 내게 향했던 그 순간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 눈동자가 처음으로 내게 웃어주었던 순간을, 처음으로 그의 곁을 허락받은 순간을, 처음으로 그에게 안겼던 순간을, 지금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첫눈에 사랑하게 되었고, 죽을 만큼 사랑했으며, 아마 앞으로도 평생 잊지 못할 단 한 사람.

“전 앞으로 누군가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으니까요. 언젠가 가문을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저로서는 오히려 지금 이 상황이 감사할 따름이에요.”

나는 그를 떠올리며 담담히 답했다.

“…….”

레이몬드 2황자로부터 금세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건.”

잠시 이어지던 침묵 끝에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이몬드 2황자를 그리 오래 본 건 아니지만, 그토록 표정이 없는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걸까. 묘하게 위협적인 금색 눈동자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뒤로 저만큼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아델 공작에게 마음이 있어서입니까?”

괜히 혼자 겁을 먹고 그의 시선을 피해 테이블 끝에 시선을 주고 있던 나는 멈칫했다.

앞서 유리 황녀가 먼저 말했을 때부터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역시 그도 다 알고 있었던 거였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손으로 치마를 힘껏 말아쥐었다.

동시에 레이몬드 2황자의 한숨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죄송합니다, 지금 건 제가 실언-.”

“네.”

나는 무례라는 걸 알면서 그의 말을 자르고 대답했다.

“맞아요, 그래서 괜찮다는 거예요.”

테이블 끝에 두었던 시선을 들어 레이몬드 2황자의 금색 눈동자를 마주 응시했다.

“아마 전 평생 그 사람을 잊지 못할 테니까.”

아주 살짝 놀란 듯 굳어졌던 그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기 시작하는 변화가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감추고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나의 마음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친 나는 그 변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 사랑할 수 없을 테니까.”

애써 눌러두었던 그에 대한 원망과 미련의 감정들이 솟구치듯 튀어나와 나를 괴롭혔다. 레이몬드 2황자가 보기에 지금 내 모습이 얼마나 한심해 보일까. 흘러넘치기 시작한 마음을 주워 담지도 못한 채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여기서 우는 것만은 안 돼. 절대 울지 마. 스스로를 세뇌하듯 다짐하고 또 하면서.

“그러니 제 혼삿길이 막힌다든가 하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 * *

황성 안의 모든 방들은 쓸데없이 방음이 잘 돼 있다고 생각한다. 평소엔 그에 대한 불만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지만, 오늘은 유독 그런 마음이 든다.

유리는 깃펜을 인중 위에 얹은 채로 입술을 삐죽였다. 침대 위에 펼쳐둔 양피지를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에 심란함이 깃들었다.

“아, 여기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건국기념일 연회」라고 써둔 글자를 깃펜으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치는 동작이 꽤 신경질적이었다. 유리는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서 깃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원작에서 클레어 헤더는 아예 연회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으니 제외하고.”

「건국기념일 연회」 밑의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은 죽죽 밑줄을 긋고는 그 옆에 있는 「성녀 아리아」,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리하르트 아델」의 이름으로 깃펜을 옮겨갔다.

“레이몬드 2황자는 테라스에서 쉬다가 길 잃은 성녀가 정원을 헤매는 걸 보고 도와주러 가면서 만나게 되는 거였고, 그 뒤에 리하르트 아델이 쨔쟌 나타나선 내 여자에게 손대지 말라는 식으로 우리 오빠를 적대시했던가.”

지가 그래 봤자 공작 주제에, 건방진 자식! 지가 3년 전 전쟁에서 공을 좀 세웠으면 다야? 전쟁 영웅이면 다야? 황제가 자길 좀 아끼면 다냐고?

미운 놈을 뭘 해도 밉다고. 유리는 아직 실제로는 얼굴조차 못본 아델 공작을 잘근잘근 씹으며 양피지에 깃펜을 휘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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