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3) (14/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3)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혀를 깨물고 싶을 만큼 후회했다. 말을 꺼내긴 했으니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말문이 턱 막혀 고통받고 있을 때였다.

시녀 중 누군가의 것이 분명한 비명이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시선을 가져간 곳에는 정신 나간 여동생이 더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었다. 제 4궁의 가장 꼭대기 층에 올라가 창틀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는 그 모습에 레이몬드는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소란스럽고 번잡한 게 싫어 일부러 다른 사람 손을 타지 않고 제가 직접 조용히 클레어 헤더를 황성 안에 들인 것인데, 이렇게 되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의 귀에도 얘기가 들어갈 게 분명했다.

‘저 미친 자식…….’

제 여동생의 만행에 레이몬드는 이를 으득 갈았다. 벌써부터 저걸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생각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방법은 누군가 시선을 끈 틈을 타 자신이나 다른 이가 뛰어 올라가 저 애를 끌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저 고집불통이 순순히 끌려 나오진 않을 것이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자칫 미끄러져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 외에도 저 애가 지칠 때까지 대치하는 방법이라든가, 뛰어내리라며 자극해선 밑에서 받아내는 무모한 방법이라든가. 여러 가지가 생각났지만 하나같이 유리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 없어 선택하기 곤란했다.

“전하, 2황자 전하!”

말 그대로 머리가 터지도록 맹렬히 굴려 방법을 찾고 있는데, 제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클레어 헤더가 다급히 저를 불러왔다. 그녀가 보기에는 여동생이 위험한데도 아무런 행동도 없이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제가 퍽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저, 전하께서 마법으로 황녀 전하를 안전하게 내려오시게 하면 어떨까요?”

그녀는 제 딴엔 괜찮은 방법이라 생각했는지 한결 안도한 얼굴로 그에게 제안해왔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이 황성의 구조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 카지스 제국의 황성은 그 전체가 수백 개의 마법진으로 둘러싸여 있다. 황성 안에서는 황족의 안전을 위해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도록 마력을 무력화시키는 마법진이 발동되고 있다.

물론 레이몬드 자신이라면 애는 좀 먹겠지만 그 마력진들을 깨부수고 마력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은 하다.

다만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렇게 깨어진 수백 개의 마력진을 전부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에 드는 시간과 인력은 최소 35일간 총 100여 명의 마법사가 투입돼야 했고.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뒤처리가 상당히 곤란해집니다.”

레이몬드가 답답한 듯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답했다.

지금 마법진에 대해 일일이 그녀에게 다 설명한 시간이 없어 적당히 알아듣도록 말을 해두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건 클레어 헤더와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의 결혼이다!”

그 와중에 제 여동생은 그녀와 제 관계를 아예 못박아 버릴 작정인지, 황성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내 요구를 들어주기 전엔 죽어도 여기서 안 내려갈 거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없을 수 있지. 레이몬드는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다. 대체 클레어 헤더와 자신이 결혼하는 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하는 거냔 말이다.

옆에 선 클레어 헤더도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으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내 아가!”

설상가상으로 그새 소식을 들은 어마마마까지 시녀장과 함께 다가와 계셨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은 얼굴로 제 하나뿐인 딸을 바라보는 황후의 표정에 절박함이 어렸다. 그 시선은 예상대로 이내 레이몬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네가 어떻게든 해보라는 듯한 그 시선 앞에서 레이몬드는 속에서 끓는 분노를 애써 삼켰다.

마법진이 박살난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자. 저 사고뭉치를 무사히 끌어 내려와 혼쭐을 내주는 게 우선이라 다짐한 그는 조용히 몸 안의 마력을 끌어냈다.

“2황자 전하.”

그 순간 클레어 헤더가 다시 그를 불렀다. 레이몬드는 또 뭐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불안해하던 아까와는 달리 뭔가 굳게 마음을 먹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해오고 있었다.

“전하 정도 되시는 분이면, 저 같은 사람과 잠깐 스캔들이 난다고 해도 차후에 진짜 황자비를 맞이하시는데 별문제 없겠죠?”

“……네? 그게 무슨….”

이 상황에 왜 그런 질문이 나오냐는 반문을 할 새도 없었다. 질문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던 말을 던진 그녀가 뛰듯이 제 4궁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뒷모습만 멀뚱히 바라보는 레이몬드를 뒤로 하고, 어느새 그녀에게로 집중된 수많은 시선 속에서 클레어 헤더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결혼이든 뭐든 전부 황녀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게요!”

그리고 외쳤다.

“그러니 당장 거기서 내려와 주세요! 당장요!”

* * *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한없이 어설프고 부족한 예법으로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들라는 명에 머뭇머뭇 허리를 바로 세웠다.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카롤리나 황후의 시선 앞에서 숨이 턱 막혀왔다. 나는 간신히 그녀의 발끝에 시선을 둔 채 쏟아지는 시선을 다 받아내야 했다.

황실의 예법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인사부터 내가 지금 서 있는 자세며 시선 처리까지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없었다. 다리가 덜덜 떨려서 그저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한바탕 소란이 정리된 후, 나는 곧바로 유리 황녀와 함께 카롤리나 황후 앞에 세워지게 되었다.

제 요구가 받아들여져 그저 기분이 좋은지 방긋방긋 웃고 있는 유리 황녀와 달리, 나는 상대를 압도하는 황후의 아우라에 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카지스 제국의 황후 카롤리나 에렌 디 카지스 라고 하면 한때는 대륙 전체를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북부의 얼어붙은 바다보다도 냉혹한 성격으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음유시인들 사이에서는 절벽 위의 얼음꽃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자신을 꽃에 비유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말로 그 표현을 금지시킨 일화로도 유명했다. 때마침 당시에 여성들도 작위를 받고 가문을 물려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조용히 들고 일어날 때라, 황후의 당당한 발언에 힘을 얻기도 하고 그녀의 열성 지지자가 된 여성들도 상당수 있었다고 들었다.

내게 있어 카롤리나 황후는 마치 전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물로 느껴지곤 했었다. 까마득히 멀어 나와는 결코 닿을 일 없는 그런 존재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유리 황녀나 레이몬드 2황자도 그와 비슷한 존재긴 했지만, 최소한 두 사람은 내게 무언가 부탁할 게 있어 직접 헤더 자작가로 찾아온 상황이었다. 내게 익숙한 장소였고, 내가 부탁을 받는 입장이었기에 이렇게까지 긴장하거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카롤리나 황후는 달랐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은 상대가 한 공간에 있었고, 제멋대로 행동해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불행히도 그 상대는 다름 아닌 나였으며, 지금 나는 그녀의 한마디에 목이 달아나는 상상을 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로 인해 유리 황녀가 스스로 위험한 일을 자처했다. 덕분에 궁이 한바탕 뒤집어 졌고, 황후가 그 사실을 알았다. 겨우 일이 일단락되긴 했으나 누구든 그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터였다. 정말 불행히도 그 대상이 왠지 내가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러니까 그대가 클레어 헤더…… 자작 영애라고 했나?”

목소리마저 지독히도 아름다운 황후가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내 이름을 부를 때는 못마땅한 듯 잠시 말을 끊었다 잇는 그 찰나에 나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예, 황후 폐하.”

나는 밭은 숨을 내쉬며 간신히 대답을 끄집어냈다. 또다시 황실 예법에 어긋나는 건 아닌지, 이렇게 대답을 해도 되는 것인지 불안을 감추지 못하면서.

“흐음.”

척 보기에도 탐탁지 않은 눈빛이 내리꽂혔다. 눈에 차기는커녕 애초에 수준도 맞지 않은 여자가 제 아들과 엮이고 있으니 불쾌할 수밖에. 아마 내가 카롤리나 황후라도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그저 죄스러운 마음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마마마!”

지금껏 방실방실 해맑게 웃고 있던 유리 황녀가 돌연 화가 난 듯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나는 물론, 카롤리나 황후까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 응? 우리 아가 왜?”

카롤리나 황후는 조금 전까지 상대를 압도시키는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쩔쩔매는 태도로 유리 황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급격한 그녀의 변화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어진 유리 황녀의 말에 나는 정말로 이 자리에서 재가 되어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제 다 가족이 될 사인데 말투가 너무 딱딱하지 않아요? 얼굴도 너무 무서워요!”

세상에, 황녀 전하. 지금 황후 폐하께 그게 무슨 망언입니까. 나는 경악을 숨기지 못한 눈으로 유리 황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유리 황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카롤리나 황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내 목이 댕강 잘려나가는 끔찍한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카롤리나 황후가 유리 황녀를 유독 아낀다는 말은 들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태도까지 참아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으응? 그, 그랬어? 미안하구나. 엄마가 너무 긴장해서 그랬나 봐.”

……었는데 그게 현실로 이뤄졌다.

카롤리나 황후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유리 황녀의 눈치를 살피며 필사적으로 변명까지 하고 있었다. 거짓말인 게 분명한 변명이라도 유리 황녀에게는 살짝 통했던지, 그녀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봐 드릴게요. 다음부턴 조심해주세요!”

세상에, 이거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건가요. 그렇게 묻는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레이몬드 2황자가 본인은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여왔다. 세상에…….

“아, 그리고 약혼식은 언제가 좋을까요?”

난 그저 죄송하고 민망하고 죽고 싶을 따름이라 석상마냥 숨죽이고 있는데, 유리 황녀의 발랄한 외침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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