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2) (13/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2)

내가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레이몬드 2황자가 다급히 바깥을 향해 신관들 들여보내라 외쳤다. 그의 명령에 젊은 신관 하나가 들어와 레이몬드 2황자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러고는 내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내 뺨의 상처를 확인하다 손을 뻗어왔다.

“잠시 눈을 감아주시겠습니까.”

신관의 말에 나는 얼른 눈을 감았다. 뺨 쪽으로 신관의 손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뺨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퍼져나갔다. 생경한 감각에 놀라 깜빡 눈을 뜨자 밝은 빛에 잠시 시야가 흐려졌다.

“이제 괜찮으실 겁니다.”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으니 이내 손을 떼고 물러난 신관이 다시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무심코 손을 들어 뺨에 대보았으나 아까와 같은 통증은 없었다. 이게 신성력이라는 건가.

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려보다 방의 한쪽에 있는 거울로 다가갔다. 정말 입가의 상처와 뺨을 물들이고 있던 피멍이 언제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깨끗이 지워진 게 보였다.

어떻게 그렇게 심했던 상처가 순식간에 사라질 수가 있는 걸까. 아무리 봐도 신기해서 계속 거울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레이몬드 2황자가 거울을 통해 시선을 맞춰왔다. 민망함에 얼른 거울에서 몸을 돌리고 그를 돌아보자 그가 짧게 웃었다.

“성국과의 우호 정책을 한 번도 달갑게 여긴 적은 없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썩 나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빙빙 돌려 말하긴 했지만 아마 덕분에 날 치료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는 의미로 말을 한 것 같았다.

“마차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거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잠깐 머뭇거리던 레이몬드 2황자가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한 걸음 앞장서서 방을 나섰다. 그가 문손잡이를 잡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어 따라가려는 순간 자그마한 손이 다시 내 치마를 붙잡아왔다.

“알렌.”

레이몬드 2황자가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하는 수 없다는 듯 아이가 내 치마를 놓아주었다.

나는 어쩌면 이게 마지막 만남일 어린 황자의 머리를 스치듯 쓰다듬어주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알렌 4황자의 유모로 보이는 이가 다가오자, 아이가 그 품에 폭 안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몸을 돌렸다.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터인데 레이몬드 2황자는 굳이 본인이 직접 마차까지 안내하겠다 따라나섰다. 그런 레이몬드 2황자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참을 걸어가는 도중에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아까 유리 녀석에게 했던 말 중에…….”

혹시 내가 아까 했던 말 중에 뭔가 실수한 거라도 있었나. 워낙 그가 말하기 곤란한 듯한 기색이라, 나도 덩달아 긴장한 채 말을 기다릴 때였다.

“꺄아악! 황녀 전하!”

귀를 찢을 듯한 비명소리가 조용한 황성 안을 울렸다.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돌아본 곳에는 창백한 얼굴의 시녀장과 시녀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가자, 거기엔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까마득히 높이 솟아있는 성의 꼭대기. 창틀에 위태롭게 걸터앉아있는 유리 황녀의 모습이 보였다.

점점 몰려드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유리 황녀는 아주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언제 울었냐는 듯이.

그 표정이 왠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래도 진짜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거냐고.

* * *

사람 심리라는 게 참 그렇다.

주변에서 누군가를 두고 관심을 가지고 계속 애정을 보이면 저도 모르게 그 상대에게 한 번쯤은 시선이 가게 된다. 대체 그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 매력이 있기에 저렇게까지 좋아한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걸까, 호기심 정도는 생기는 것이다. 거기다 그 상대에게 애정을 쏟아붓느라 바쁜 이가 평소에 사람을 가리기로 유명한 철없는 어린애라면 더더욱.

레이몬드는 그런 의미에서 클레어 헤더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고서에 올라온 클레어 헤더에 대한 정보만 보면, 그녀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뜬소문이라 해도 들려오는 소문도 하나같이 좋지 않은 것들뿐이었고. 아델 공작의 정부라는 사실만으로도 갖게 되는 편견들도 상당했다. 그래서 괜한 호기심에 만났다가 귀찮은 상황들만 생기지 않을까 고민이 많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직접 만나러 갔던 건,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에 대한 신뢰는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가족이라 해도 제 윤리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칼같이 잘라낼 아이가 그토록 제 오라비의 결혼 상대로 원하는 사람이라니. 심지어는 그전까지 일말의 접점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한 번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히 들 수밖에.

그래서 꺼림칙한 심정 반, 호기심 반의 마음으로 클레어 헤더를 만나고 그녀의 표정,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시작부터 조금 의외이긴 했다. 이름도 없는 가문의 영애로, 황가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상황 자체를 하나의 기회로 봐도 무방할 터다. 그녀가 가진 이미지만 보면 이 기회에 자신이나 유리 황녀와 친해져 한 몫 단단히 챙겨볼 생각부터 할 거란 예상이 가능했다.

하지만 막상 만나게 된 그녀는 처음부터 저를 불편해했고,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유리 황녀는 더 부담되고 불편한 듯했다. 오히려 제게 유리 황녀를 어찌 좀 해달라는 듯 호소하는 시선이었다.

그래서 살짝 「어라?」싶었다.

꼭 그녀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황가의 사람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상황을 쉽게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게 보통일 터인데. 그런 상황을 오히려 꺼리다니.

혹시 일부러 연기라도 하는 걸까? 의심과 함께 호기심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사실 말을 타는 게 훨씬 마음은 편한데도, 굳이 그녀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중간에 마차가 전복됐을 때를 제외하고는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그녀는 제 쪽으론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말을 걸지도 않았다. 어쩌면 제 생에 다시 없을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르는데. 아델의 정부 자리에서도 잘린 지금, 자신을 유혹해 한 몫 챙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인데.

신기했다. 역으로 그런 식으로 제 관심을 끌려는 것 같지도 않았고. 정말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란 남자도, 그 이름이 가진 배경들도 관심의 대상이 아닌 듯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지금까지 항상 그녀와 정반대의 사람들만 봐왔던 그로서는 도리어 그런 그녀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클레어 헤더는 눈앞에 있는 저보다 황성의 아름다운 풍광들에 관심이 더 많은 듯했다. 아이처럼 들떠선 양쪽의 창을 이리저리 오가며 황성을 구경하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느껴졌다. 저와 그런 관계가 되면 황성 안의 모든 것들을 지겹도록 볼 수 있을 텐데, 거기까진 생각이 미치지 않는 걸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일전에도 한 번 부탁드렸듯이 앞으로는 부디 2황자 전하와 저를 엮지 않아 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유리와 만나 그 아이에게 그녀가 담담히 내뱉은 말들은 분명 제가 먼저 그녀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이러이러한 상황이니 유리를 잘 설득해주었으면 한다 부탁했었다. 그에 그녀는 도리어 자신이 미안해하며 순순히 알겠다 대답했다. 그래서 그녀를 여기까지 조용히 데려온 거였고.

“2황자 전하도 저도 절대 서로를 그런 상대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런 이유로 황녀 전하와 황자 전하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황녀 전하께서 저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황자 전하께서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솔직히 말하면…….”

그러니 클레어 헤더가 유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히 제 마음을 밝혔을 때, 자신이 그녀에게 느껴야 할 감정은 오롯이 고마움과 미안함뿐이었어야 했다.

제 여동생의 억지에 휩쓸려 괜한 수고를 치러야 하는데에 대한 미안함, 그럼에도 이쪽의 사정에 맞춰 따라준 것에 대한 고마움.

“민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였을까. 민폐라는 말을 들은 순간,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가 제게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제가 부탁한 대로 단호히 관계를 끊어내려 한 것뿐인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마차 안에서도 제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던 그녀의 태도가, 마차에서 타고 내릴 때 제가 내민 손을 불편해하던 그녀의 표정이, 그 애들에게 밀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잡아주었을 때 자신이 전염병 환자라도 되듯 급하게 제게서 떨어지던 그녀의 행동이. 전부.

그걸 제가 기분 나빠할 자격도, 이유도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고 멀리하면 오히려 좋은 게 아닌가. 그 반대의 상황이 생길까 봐 오히려 걱정하지 않았던가.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불쾌하고 낯선 감정에,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자신이 왜 이러는 걸까 하고.

일부러 직접 그녀를 마차가 있는 곳까지 안내하겠다고 자청해서 함께 걷는 내내 생각해 본 결과는 의외로 단순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이런 류의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클레어 헤더처럼 이토록 자신을 불편해하고 꺼리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라도 처음 보는 상대가 자신을 병균 취급하며 멀리하면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않겠는가. 특별히 제가 상대에게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끝내버리면 되는 문제였는데, 그게 뜻대로 안 됐다.

왜? 하고 자꾸만 그 이유가 알고 싶어졌다. 자신 정도면 꽤 괜찮은 상대가 아닌가. 그동안 여성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은 상대로 보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혹시 아직도 아델 공작을 잊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무례한 짐작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관여할 자격도 없는 문제인데도.

무심코 자신보다 반걸음 뒤에서 따라 걸어오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이 갔다. 생각에 잠긴 듯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니,

“그…… 아까 유리 녀석에게 했던 말 중에…….”

생각보다 먼저 말이 튀어 나갔다.

분명 직접 말을 꺼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이미 그렇게 말을 던진 상태였다.

뭘 물어보려고? 설마 리하르트 아델에 대해? 아직 그에게 마음이 있는 거냐고? 아니면 뭐? 왜 그렇게 날 싫어하냐고?

제 여동생에겐 선을 지키라며 잘난 척 지적해놓고는?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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