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1) (12/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1)

헤더 자작가 안에서 홀로 덩그러니 외딴 섬처럼 지내는 내 모습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곳엔 내게 무관심하거나,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거나, 내가 그 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들뿐이었다. 그 안에서 언제나 난 혼자였다. 식사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늘 혼자였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괴로울 때도, 오롯이 혼자서 그 감정들을 삼켜야 했다.

아무리 울고 소리쳐도 아무도 와주지 않을 걸 아니까. 누구도 날 돌아봐 주지 않을 걸 아니까. 그게 익숙하니까. 태어난 그 순간부터 줄곧 그래왔으니까.

“언니, 어서 와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괴로워져서 일부러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 그때 유리 황녀가 뒤를 돌아보고는 나를 향해 해맑게 웃으며 외쳤다. 레이몬드 2황자의 품에 안겨 있던 알렌 4황자도 내 쪽으로 손을 뻗으며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

“형슈니임.”

고작 그것뿐인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기서 눈물을 뚝뚝 떨구면 저 세 사람이 얼마나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울까. 뒤로 감춘 손으로 치마를 꾹 움켜쥐며 눈물을 참는데, 동생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레이몬드 2황자도 내 쪽을 돌아보았다.

“괜찮으면 이 녀석들 옆에서 같이 걸어줄래요?”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신 볼 일이 없을 사람들이었다. 난 그걸 위해 여기까지 온 거였다. 유리 황녀에게 두 번 다시 나와 레이몬드 2황자를 연관 짓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이곳에 서있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잠시라도 좋으니 나도 저 사이에 끼고 싶다는 마음이 주제넘게 피어올랐다.

나는 홀린 듯이 유리 황녀의 옆으로 걸어가 섰다. 유리 황녀가 나보다 작은 손으로 내 손을 힘껏 붙잡아왔다. 그 작고 따스한 손이 죽을 만큼 기뻐서, 만족스러운 듯 헤헤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서, 나는 애써 앞만 보고 걸었다. 이대로 유리 황녀의 얼굴을 보면 곧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서.

“우리 결혼식 할 때 이렇게 넷이서 같이 들어가면 안 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어진 유리 황녀의 말에 레이몬드 2황자는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는 눈물이 쏙 들어가 버렸다.

* * *

“이제 진짜 제대로 얘기 좀 해보자.”

등 뒤로 달칵 문이 닫혔다.

제일 먼저 성큼 방 안으로 들어섰던 레이몬드 2황자가 예쁜 분홍색 레이스가 달린 의자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지쳤다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유리 황녀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방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온통 분홍색으로 도배된 넓은 방 안에는 크고 작은 인형들로 가득했다. 성인 어른 다섯 명은 누울 수 있을 듯한 연분홍색의 침대 위에는 사람 크기만한 커다란 곰 인형도 자리해 시선을 끌었다. 작고 귀여운 가구들이며 프릴이 달린 커튼이며 아기자기한 소품들에 계속 눈길이 가는 예쁜 방이었다.

당연히 유리 황녀의 방이라 생각했던 이곳이 사실은 알렌 4황자의 방이라는 사실에 잠깐 놀라긴 했지만.

“너 도대체 왜 그렇게 헤더 영애에게…….”

“나부터 할 말 있어.”

레이몬드 2황자가 턱을 괸 채로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은 도중에 유리 황녀에게 막혀버렸다.

방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알렌 4황자와 해맑게 웃고 있던 유리 황녀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해있었다. 뭔가에 잔뜩 화가 난 듯 굳어진 그녀의 표정에 나도 레이몬드 2황자도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형슈님, 이거 줄가요?”

그 분위기를 미처 읽지 못한 알렌 4황자만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와 귀여운 토끼 인형 하나를 내밀었다. 자기 방을 방문한 손님에게 아끼는 인형을 선물로 주고 싶은 것 같았다.

그걸 그냥 무시하기도 힘들어 몸을 살짝 낮추고 인형을 받아들려 하니 유리 황녀가 다가와 그 인형을 휙 빼앗아갔다.

“알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언니 얼굴을 봐!”

인형을 빼앗겨 울상을 짓던 알렌 4황자의 시선이 다시 내 얼굴에 닿았다.

그제야 나는 내 얼굴 상태가 어떤지 기억해냈다.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레이몬드 2황자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기색이라 안도하고 있었더니 나도 내 얼굴 상태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키며 얼굴을 가리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알렌 4황자가 까치발까지 들어 내 뺨에 손을 살며시 댔다.

“빨강 거 파랑 거 무덨어요.”

부어올라 멍이 들기 시작한 내 뺨과 입가의 상처가 뭔가 묻은 것으로 착각했는지 자그마한 손이 내 얼굴을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하지만 빨간 게 지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아픈 듯 움찔하자 깜짝 놀라 얼른 손을 치웠다.

“무, 무든 거 아니야.”

놀라 커다래진 금색 눈동자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형슈님 아파요?”

울기 직전인 그 눈동자를 보며 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 하나도 안 아파요. 황자 전하.”

“거짓말.”

톡 건드리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얼른 달래주려는데, 유리 황녀가 또 방해를 해왔다. 나는 곤란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을 무사히 넘겨 방심하고 있던 차에 어린 황녀와 황자에게 괜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언니 얼굴 왜 이런 거야, 둘째 오빠!”

황녀 전하, 왜 또 아무 죄도 없는 2황자 전하께 그러시는 겁니까. 나는 불똥이 이상한 곳으로 튀는 것에 놀라 허둥대며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2황자 전하께선 아무 상관 없습니다.”

“어떻게 봐도 저건 누가 때린 거잖아! 누가 저랬어! 누가 우리 언니 때렸냐고!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아깐 보는 눈이 많으니까 내가 거기서 난동 피우면 언니가 창피할 것 같아서 참은 거야! 어떤 새끼가 우리 언니 건드렸어! 누구야! 가만 안 둘 거야!”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유리 황녀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방방 뛰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유리 황녀가 미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에 겁을 먹은 알렌 4황자가 호다닥 내 뒤로 숨기까지 했다.

처음 유리 황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잠깐 멈칫하는 것 같았던 게, 그때부터 벌써 알아채고 꾹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유리 황녀의 그런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일단은 그녀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라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황녀 전하, 전 정말 괜찮으니 진정…….”

“설마 아델 공작은 아니겠죠?”

독기마저 서린 듯한 새된 외침에 그녀에게 다가가던 손을 멈췄다. 유리 황녀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이름이 들려와 순간 사고가 정지됐다. 그녀 본인도 제가 내뱉은 말에 놀란 듯 급히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어떻게, 어떻게 이 어린 황녀까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레이몬드 2황자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순간 드는 생각은 그거였다.

아델 공작.

그 이름을 듣고서야 나는 다시 내 위치가 어디인지를 떠올렸다.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나만이 잊고 있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이 세 사람의 사이에 잠시나마 섞이고 싶다고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한순간 무겁게 가라앉은 정적 속에서 레이몬드 2황자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유리 황녀를 향해 말했다.

“네 마음은 알겠다만 선은 지켜라.”

그렇지 않아도 안절부절못하던 유리 황녀의 눈동자가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커다란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 저기. 미안해요, 언니. 나는 그게…….”

괜히 남매가 아닌 듯, 울상이 된 모습도 알렌 4황자와 꼭 닮은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과를 건네며 내게 다가오려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저 손을 잡았다간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잊지 말자.

나는 냉정히 그 손을 밀어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괜찮아요. 저 같은 것에게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 전하.”

“저 같은……것이라뇨.”

“그보다 오늘 제가 이렇게 찾아뵈러 온 이유는.”

울먹이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척 담담히 미소지었다. 보이지 않는 벽을 치는 나를 알아챈 건지, 유리 황녀도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일전에도 한 번 부탁드렸듯이 앞으로는 부디 2황자 전하와 저를 엮지 않아 주셨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언니.”

“2황자 전하도 저도 절대 서로를 그런 상대로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그런 이유로 황녀 전하와 황자 전하의 몸을 상하게 하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황녀 전하께서 저를 언니라고 부르는 것도, 황자 전하께서 저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잠시 말끝을 흐리다 유리 황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민폐라고 생각합니다.”

상처받은 흐려지는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 눈을 피해 허리를 깊이 숙여보였다.

“이렇게밖에 말씀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유리 황녀의 발끝에 시선을 둔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유리 황녀는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리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방을 뛰쳐나갔다.

따라가서 달래주고 싶은 꾹 눌러 참고 허리를 펴는데, 다시 옆으로 다가온 알렌 4황자가 내 치마를 살짝 당겼다.

“형…… 헤더 영애는 우리가 시러요?”

무심코 다시 예의 그 호칭으로 부르려다 내가 싫어한다는 걸 알고서 멈칫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 작은 아이에게까지 상처를 줘야 하나. 나는 잠시 망설이다 알렌 4황자의 시선에 맞춰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보일 듯 말듯 고개를 저어 보이며 작게 속삭였다.

“아뇨, 전 황녀 전하와 4황자 전하를 정말 좋아해요.”

시무룩하게 물들어있던 아이의 눈동자가 그제야 조금 기쁜 듯 밝아졌다. 나는 그 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다 입가에 손가락을 대고 쉿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건 저와 4황자 전하만의 비밀이에요.”

귀여운 황자님과 둘만의 비밀을 만든 찰나, 레이몬드 2황자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생했어요. 그 난리를 피웠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았으니 저 녀석도 이제 포기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는 얼른 몸을 바로 세워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여보였다.

“2황자 전하께도 폐를 끼쳤습니다.”

“아뇨, 폐를 끼친 건 저희 쪽이죠.”

잠시 서로 내가 잘못했네 아니네 내가 더 잘못했네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먼저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신관을 불러 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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