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0) (11/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0)

“오로지 신전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짓고 있는 신전이다 보니 뭐든 성국이 요구한 대로 전부 들어주고 있는 상황이죠. 성국에서 요구한 대로 건축가와 조각가를 포함해 전부 그쪽에서 원하는 최고의 전문가들로 채워져 있어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어째선지 분위기가 점점 더 싸늘하고 험악해지는 것 같았다.

“아, 최근에는 신전 내의 제단화를 그릴 화가도 저쪽에서 직접 지정해서 협상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네요. 성국 쪽에서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으로 계속 억지를 부리고 있어서 당사자로부터 벌써 몇 번이나 거절의 의사를 전해 받았는데도 끈질기게 설득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젠 아예 대놓고 비웃음을 흘리는 그를 힐끔거리던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거절이라…….

그리고 싶지 않은 건 거절할 수도 있는 거구나.

아마 당사자에겐 별것도 아닐 듯한 일이 부러웠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작고 사소하며, 당연한 권리가 부럽고 또 부러웠다.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것도.

“성국에서 그렇게까지 원하는 분이라면…… 역시 대단한 사람이겠죠?”

홀린 듯 말을 내뱉곤 당황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지껄인 거지.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덮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데, 옆에서 레이몬드 2황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 아니. 저. 그게 아니라.”

“글쎄요. 예전에 몇 번 그 사람의 작품을 본 적이 있긴 한데…….”

허둥대며 수습을 하려는 찰나 그가 딱히 불쾌한 기색 없이 덤덤하게 대답해왔다.

“저는 그림에 대한 조예가 깊지 않아서 그런지, 제 기준에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내가 내뱉은 헛소리에도 진지하게 대답해주는 레이몬드 2황자를 보며 나는 그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올라가는 걸 느꼈다.

“아, 마차를 구해온 모양입니다.”

때마침 저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굴러오는 게 보였다. 나는 어색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무사히 끊긴 것에 안도하며 마차가 다가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다정한 그를 위해 내가 맡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리라 다시 한번 굳게 다짐했다.

* * *

거대한 성문이 열리고 마차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성안에 들어서고 있었다.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화려하고 웅장한 황성의 위용에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곳, 앞으로도 발을 들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 내가 들어와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나도 모르게 어린애처럼 들떠선 이쪽 창문과 저쪽 창문을 오가며 황성 내부를 구경했다. 한 시간 전만 해도 하마터면 마차에 깔려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지금 마차 안에 나 외에 또다른 동승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서 말이다.

마차가 미로처럼 이어지는 정원을 지날 즈음 큽, 하고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한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처음 보는 예쁜 꽃과 나무들에 정신이 팔려있던 나는 깜짝 놀라 레이몬드 2황자를 돌아보았다. 아, 그렇지. 이 사람도 있었지.

그는 제가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으로 반대쪽 창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분명 그동안 내가 보인 추태를 다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민망함과 자괴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나이가 몇인데 애처럼 들떠서 보인 행동들이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아까도 분명 웃은 거 맞겠지?’

괜찮다며 실컷 허세를 부리고는 다리가 풀려 흙바닥에 주저앉았을 때도 그렇고. 왜 자꾸 저 사람에게 못 볼 꼴을 보이는 건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그러고는 반대쪽 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이쪽에 중앙 연못이 진짜 크고 멋진데 안 봐도 돼요?”

레이몬드 2황자가 애써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을 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갈 뻔도 했다. 하지만 왠지 아까의 추태로 놀림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고집스럽게 돌아보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후회할 텐데…….”

단호한 내 대답에 말끝을 흐리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가 깊은 안타까움에 젖어있었다.

또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 다시 볼 수 없을 풍경이 아니던가. 그리고 함께 마차에 타고 있는 이는 앞으로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듯한 사람이지 않은가. 잠깐 정도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민망함을 감수해도 괜찮지 않을까.

짧은 고민을 마친 나는 얼른 레이몬드 2황자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창문에 바짝 붙어 앉았다.

창문 너머로,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란 연못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연못은 주변의 아름다운 꽃나무들과 어우러져 어디선가 요정들이 날아들 것만 같은 신비로운 풍광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정말 여길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면 크게 후회할 뻔했다.

연못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연신 감탄을 하고 있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눈동자만 굴려서 옆을 보니, 레이몬드 2황자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척 조용히 창문 밖의 풍경만 감상하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만 지나면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으며.

묘하게 마차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마차가 점점 속도를 늦추는 게 느껴졌다. 어찌나 넓고 복잡한지, 성문을 지나고도 꽤 한참 동안 황성 안을 달리던 마차가 드디어 멈춰섰다.

아까 한바탕 웃어댄 뒤로는 조용히 창밖만 응시하던 레이몬드 2황자가 먼저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고는 내게 손을 내민 채로 내가 내리기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마차에 탈 때도 그랬지만, 나 같은 게 감히 2황자의 에스코트를 받아도 되는 건가 싶어 새삼 거부감이 일었다. 하지만 겨우 이런 일로 이 사람과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얌전히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진짜 황성이야.’

레이몬드 2황자의 친절이 불편한 것도 잠시였다. 그보다는 내가 이 황성 안에 발을 내디딘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서 조심스럽게 땅 위에 발을 내디디고 섰다.

“꺄아아! 언니이이이이!”

“꺄아! 형슈니이이이임!”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황성 안의 땅을 밟게 됐다는 감격에 그리 오래 젖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잔뜩 흥분한 듯 괴성을 지르며 우당탕탕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에 기겁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내 품 안으로 뛰어드는 두 아이로 인해 몸이 뒤로 크게 휘청였다.

“이런.”

내게는 불행히도, 그 순간 나와 가까이 붙어서 있던 레이몬드 2황자가 살짝 끌어안듯이 뒤에서 나를 받쳐주는 게 느껴졌다.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안기는 듯한 모양새가 된 나는 차라리 땅에 엉덩방아를 찧는 게 나았겠다며 낭패 어린 얼굴을 했다.

다급히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서서 그 품에서 빠져 나왔지만, 불에 덴 듯 등 뒤가 화끈거렸다.

“이 말썽꾸러기들, 그렇게 달려들면 어떡해? 헤더 영애가 다치면 어쩌려고.”

레이몬드 2황자가 엄하지만 다정한 어조로 두 아이를 나무랐다. 그러자 안기듯 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두 아이의 입가에 희미하게 묻은 쿠키 가루와 크림 자국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뭘 아주 맛있게 먹다가 급하게 뛰어나온 건가. 그러고 보니 알렌 4황자의 목에는 하늘색의 귀여운 턱받이가 잘 받쳐져 있다.

눈이 마주치고 유리 황녀는 왠지 잠깐 멈칫하는 기색이었다. 미소가 싹 사라진 채 내 얼굴을, 정확히는 내 뺨을 매섭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나도 멈칫했다. 아무래도 뺨의 상처를 발견하고 그러는 것 같아 설명을 하려는 찰나, 유리 황녀가 이내 다시 활짝 웃으며 외쳤다.

“언니!”

“형슈님!”

일부러 합창이라도 하듯 동시에 나를 향해 외치고는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웃는 남매의 모습에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부르는 호칭도 전보다 더 친근해져선,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슬쩍 눈을 굴려 주변을 보니, 지나가던 성의 시녀들이나 기사들이 하나같이 호기심과 의아함이 어린 눈동자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어쩌면 좋으냐는 눈으로 레이몬드 2황자를 돌아보았다. 그도 제 동생들의 이런 열렬한 반응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이었다.

“자, 둘 다 그만 떨어져.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얘기해.”

다행히 금세 정신을 차린 레이몬드 2황자가 억지로 내게서 남매를 떨어뜨리고는 남매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그러고는 내게도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에엑, 난 클레어 언니 손 잡고 가고 싶은데.”

“알렌두!”

어린 남매는 살짝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레이몬드 2황자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얌전히 세 남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둘째 오빠, 오늘 클레어 언니랑 같이 저녁 먹어도 되지?”

“헤더 영애가 허락한다면.”

“내 방에서 같이 자고 가는 건?”

“헤더 영애한테 먼저 허락을 구해.”

“둘째 오빠도 오늘 같이 저녁 먹고 가! 응? 응?”

“알았으니까 진정 좀 해.”

걸어가는 내내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제 오라버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유리 황녀와 그런 여동생의 질문을 하나 하나 다 받아주는 레이몬드 2황자의 모습이 무척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중간에 알렌 4황자가 다리가 아프다며 칭얼거리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알렌 4황자를 번쩍 안아 올리는 레이몬드 2황자의 행동도.

자연스러운 그 모습들에서 평소에 세 사람이 얼마나 사이좋은 남매인지 알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도.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단란하고 행복한 풍경이 죽을 만큼 부럽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을 부럽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인 것 같아 이내 그 마음도 꺾어버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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