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9) (10/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9)

풀썩.

말이 심문이지, 필요하다면 고문도 불사할 듯한 데니스 백작의 서늘한 눈동자를 보며 레이몬드가 대답을 잠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갑자기 뭔가 바닥에 엎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니 방금까지 혼자 잘 서 있던 클레어가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본인도 무척 당혹스러워하는 얼굴로.

괜찮다고 했던 건 역시 거짓말이었나.

가뜩이나 뺨의 상처가 더 부어오르고 검붉은 피멍까지 들고 있어 신경이 쓰이던 참이라 놀란 레이몬드가 즉각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클레어와 시선을 맞췄다.

“헤더 영애, 솔직하게 어디가 아픈지 말해주십시오. 혹 다리나 발목이 다친 거면…….”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생각보다 심각한 그의 표정에 더 당황한 클레어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민망한 듯 시선을 떨어뜨린 채 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그…… 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하필 그렇게 요란하게 주저앉아서는.

클레어는 밀려드는 민망함에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힘겹게 말을 꺼내고는 차마 황당해하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죄송해요.”

레이몬드는 그런 클레어를 조금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친 게 아니라니 안도감이 드는 한편. 민망해 죽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던 클레어가 웅얼거리듯 죄송해요, 하고 내뱉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입가가 간질간질했다.

뺨의 상처를 볼 때마다 드는 안쓰러운 마음과 저 상처를 만든 이에게 화가 치미는 감정 사이로, 조금 다른 감정이 불쑥 섞여드는 게 느껴졌다.

큽.

무심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레이몬드는 재빨리 고개를 틀어 데니스 백작을 바라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클레어로부터 의문과 미심쩍음이 섞인 시선이 날아드는 게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그녀를 보고 웃음을 흘렸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심각한 표정으로 데니스 백작에게 말했다.

“근처에 말이나 마차를 빌릴 수 있는 곳이 알아봐.”

“예, 최대한 빨리 구해오겠습니다.”

그 사이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클레어를 돌아보자, 연갈색의 눈동자가 아직도 살짝 의심하는 듯한 눈동자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내 시선을 피해버리긴 했지만.

“마차가 갑자기 전복된 게 바퀴가 부서져서 그런 것 같아요. 저건 저 지경이 됐으니 새 마차를 구해올 때까지 잠깐 기다려야겠어요.”

레이몬드는 한 때는 마차였으나 지금은 그저 조각조각난 나무 판자에 불과한 형태의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미안함이 담긴 어조로 상황을 설명해주자, 클레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하고 대답했다.

레이몬드의 명령에 데니스 백작과 다른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그는 다시 클레어를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뭐가 뭔지 정신없는 상황에서 그녀는 의외로 침착해 보였다. 놀란 것 같긴 해도 겁에 질려 벌벌 떨거나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헤더 자작저에서 사용인들의 실수로 머리를 조아리던 모습과는 또 전혀 달랐다. 보면 볼수록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라 그런지, 묘하게 자꾸 시선이 가는 느낌이었다.

무의식중에 클레어를 빤히 응시하고 있던 레이몬드는 그녀가 제 시선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서 아차 했다.

“이번엔 내가 도와줄 수 있게 해줄래요?”

레이몬드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떠올리며 클레어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행히 클레어도 아까처럼 혼자 일어날 수 있다며 고집을 부리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안전하게 일어섰다.

혹시 또 그녀가 넘어질까, 레이몬드는 계속 자기 팔을 잡고 있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클레어는 손사래를 치며 물러나 이제 진짜 괜찮다며 질린 얼굴을 했다.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맹렬한 거부는 또 처음이었기에 레이몬드는 살짝 얼이 빠졌다.

“전하.”

때마침 마부를 부축해 다가온 기사가 말을 걸어오기에 레이몬드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내가 그렇게 불편한 거냐고 물었을지도 몰랐다. 그녀 입장에선 제가 불편한 게 너무도 당연한데도.

다행히 그런 추태를 보이기 전에 정신이 들었다. 레이몬드는 혹시라도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일까, 얼른 클레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기사와 마부를 돌아보았다.

* * *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를 조용히 지켜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차가 수도 외곽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전복된 터라 길 주변은 대부분이 허허벌판이었다.

원래 마차가 다니던 길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곳에 완전히 박살이 난 채로 널브러져 있는 마차의 잔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멀쩡히 잘 달리던 마차가 갑자기 전복되고, 어찌된 일인지 그 큰 사고에도 우리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 싶었고, 뒤늦게 그게 레이몬드 2황자가 나를 보호해준 덕분이라는 걸 알았고, 마지막엔 부서진 마차가 허공을 날아 땅에 내리꽂히는 모습까지 보고 나니……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모든 상황들이 정말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고가 제대로 따라가질 못하는 상태였다.

마차에 막 올라탈 때까지만 해도 뺨의 상처를 들켜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럽다는 생각만 들었었다. 저 집안에서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얼마나 벌레처럼 하찮은 취급을 당하고 살았는지를 전부 들킨 것만 같아서. 이런 여자와 엮인다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고 여겨질 것 같아서. 내가 잘못한 게 아님에도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이렇게 무사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기울던 순간 내 몸을 힘껏 끌어안았던 팔이 떠올랐다.

레이몬드 2황자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마차에 깔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등골이 오싹하기도 했다. 옷을 그리 얇게 입은 것도 아닌데 순간 팔에 소름이 쫙 끼쳤다. 나는 손을 들어 소름이 돋아난 팔을 문지르며 부서진 마차로부터 억지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헤더 가의 저택에서 출발할 때도 다시 몇 번이고 확인을 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전하를 모시는 일에 있어 무엇 하나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그럼 멀쩡하던 마차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그리됐단 말인가?”

고작 해야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내 귀에도 저쪽의 대화 내용이 들어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희게 질린 얼굴로 벌벌 떨며 제 억울함을 호소하는 마부와 그런 마부를 다그치는 기사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부 역시 마차가 넘어갈 때 다친 듯 찢어진 옷 사이로 상처들이 제법 보였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웠다.

레이몬드 2황자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정말 저 마부에게도 억울한 점이 있다면 원만한 방향으로 일이 해결되길 바랐다.

마부에게 잘못이 있든 없든 황족인 레이몬드 2황자를 위험에 처하게 만든 순간부터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게 가능할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레이몬드 2황자로부터 거리를 벌리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대화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벌리고 멈춰선 나는 저 멀리 유독 눈에 띄는 흰색의 건물 하나를 발견했다. 스산할 정도로 텅 빈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문득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 하나에 눈길을 빼앗겼다.

그건 정확히는 아직 지어지고 있는 단계의 건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의 발길도 거의 없는 외진 공간에 뜬금없이 거대한 건축물이 지어지고 있으니 자연히 시선이 갔다. 아직 한참 미완성 단계임에도 완공되었을 때 전체적인 크기가 상당해보이는 건축물이라 나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서 쳐다보게 되었다.

새하얀 벽돌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건축물은 현재 제국 내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두꺼워지는 형태의 기둥이라든가, 건물 기단과 지붕선이 솟아오른 구조라든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되지만, 가끔 책에서 보았던 성국 아스텔의 대신전과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어 신기했다.

‘아무리 봐도 신전을 짓는 것 같은데…….’

“신전을 짓고 있는 겁니다.”

불쑥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옆을 돌아보았다. 레이몬드 2황자가 저 멀리 보이는 순백색의 건물에 시선을 둔 채로, 마치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걸어왔다.

레이몬드 2황자가 다가오는 것도 전혀 몰랐던 나는 놀란 눈만 깜빡이다 한 박자 늦게 그가 꺼낸 말을 알아듣고 고개를 기울였다.

신전을 짓다니?

다른 나라면 모를까, 이 카지스 제국에서? 어떻게?

의문만이 가득한 내 표정을 본 레이몬드 2황자가 눈꼬리를 살짝 휘며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잠깐 나도 모르게 넋이 나갔다.

“현 황제 폐하께선 더 이상 신전과 척을 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분이라.”

지나가듯 말을 꺼내며 그가 다시 건물로 시선을 돌렸다. 냉소를 흘리는 금색 눈동자에 설핏 경멸과 혐오의 감정이 스쳤다.

“이번 대에 들어서부터 신전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제국 쪽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그중 하나가 저 대신전입니다. 완공은 2년 뒤로 예정되어 있고요.”

낡고 좁은 방에 틀어박혀 그림만 그려왔던 터라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던 나였다. 그래서 레이몬드 2황자가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해주는 것들이 내겐 무척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건국 이후 카지스 제국은 쭉 성국과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관계가 악화된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타국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성국으로부터 신관들을 지원 받지 못해 전쟁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그 사실을 주변국들도 잘 알고 있기에 그걸 이용해 괜한 시비를 거는 일도 잦았다고.

그런데 어느새 황제 위가 바뀌고 지금은 성국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니, 내가 모르는 새에 세상이 확 뒤집혀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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