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8) (9/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8)

레이몬드는 그녀에 대한 보고서의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재빨리 되짚어보며 혹시 제가 놓친 부분들이 더 있는 것인지 조사를 지시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저 낡은 저택으로 뛰쳐 들어가 에이든 헤더의 얼굴에 장갑을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새어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다시 클레어를 바라보자 여전히 불안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연갈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간절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자연히 그의 기세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그녀의 마음을 무시한 채 당장 자신의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쾌한 감정들을 토해내는 것에만 급급한 제 행동이 과연 옳은 것일까.

잠시 갈등하던 레이몬드가 딱딱하게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에이든 헤더가 재작년 황실 기사단에 입단했다는 사실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듯 한 번 더 상기해낸 후, 클레어를 향해 고개를 한 번 작게 끄덕였다. 우선은 그녀를 안심시키는 게 먼저. 이후의 에이든 헤어에 대한 처벌은 따로 조용히 생각해 보는 게 나을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은 일단…… 헤더 영애가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제야 안도한 듯 밝아지는 눈동자를 보니 제 판단이 완전히 틀린 것 같지는 않아 조금 마음이 풀렸다.

그녀는 제가 잘못한 것도 그에게 감사할 이유도 없음에도,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나 눈동자가 더 가냘프고 연약해보여 레이몬드의 기분을 다시 가라앉게 만들었다.

자신이 그리 긴 시간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동안 수많은 인간 군상을 겪어온 결과 제법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눈앞에 있는 여성은 누군가를 해하거나 상처를 입힐 사람이 아니었고, 설령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여성을 향한 폭력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저 상처는 뭔가. 누가 봐도 있는 힘껏 뺨을 내리친 모양새가 아닌가. 어쩌면 눈에 보이는 저 상처 외에도 다른 상처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겨우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치밀어올랐다.

황실 기사단에 입단했다면 당연히 기사 서약도 마친 기사일 터인데. 어찌 기사된 자로서 여성을 때릴 수가 있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에이든 헤더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처우를 검토할 예정이었다. 굳이 클레어 헤더에 대한 얘기를 수면 위로 띄우지 않더라도, 기사단 소속의 말단 기사 하나를 다시는 황성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건 그에게 숨 쉬는 것만큼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에이든 헤더가 그녀의 사촌 동생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원치 않는 거라면 굳이 그가 나서서 에이든 헤더를 처벌해도 괜찮은 것인지, 오히려 그녀를 더 상처입히게 되는 건 아닌지, 그런 것들이 레이몬드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레이몬드는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머릿속을 감춘 채 클레어가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왔다. 그녀가 먼저 의자에 앉고, 레이몬드도 조금 거리를 둔 채 나란히 앉았다. 필요 이상으로 움츠러든 채 창문 쪽으로 바짝 붙어앉은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클레어는 온몸으로 그가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울 만큼 창밖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마차가 출발할 때 잠깐 움찔한 것 말고는 그 뒤로 계속 인형처럼 가만히 창밖만 응시했다.

레이몬드는 안 보는 척 그런 클레어를 홀깃 바라보았다. 아마 그녀는 모르는 것 같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뺨이 아까보다 더 부어올라 있는 게 보였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새하얀 피부에 보기 싫은 피멍이 자리하게 될 것 같았다.

‘빌어먹을 아스텔.’

레이몬드는 무릎 위에 놓인 손가락을 까딱거리다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300년 전, 성전이 끝난 후 성국 아스텔이 신성력을 앞세워 치유 계열의 마법을 금기시하고 마법서를 불태워버린 만행을 떠올리자 새삼 이가 갈렸다. 성국은 신관들이 지닌 신성력을 무기화하기 위해 마법사들을 탄압하고 기어이 저들의 뜻대로 치유 계열의 마법 자체를 은폐하고 사장시켜버렸다. 그로 인해 현대에 와서는 치유 마법 자체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이들도 많았다.

수천 세타르에 달하는 거대한 결계를 세우고, 얼어붙은 바다를 불로 뒤덮을 수 있는 마탑의 주인인 레이몬드 그 자신조차 간단한 치유 마법 하나 쉽게 사용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기본적인 원리는 알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에 입력된 수많은 마법 조약과 규율이 발목을 잡았다. 덧붙여 수백 년간 사장되어 실제로 사람에게 적용해본 적도 없는 마법을 실험하듯 그녀에게 사용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고.

그녀를 실험쥐로 만들 바에야 황성으로 돌아가자마자 신관을 불러들여 상처를 없애는 게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최근엔 저쪽에서도 이쪽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판이니 제 이름으로 요청을 보내면 상급 신관을 내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만 저 상처를 볼 때마다 치미는 화를 억누르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황실까지는 꽤 거리가 있어 시간이 제법 걸릴 터였다. 그동안 오손도손 대화를 계속 나눌 분위기도 아닌 것 같아 레이몬드는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유리의 일만 잘 해결되면 더는 만날 일도 없는 상대였다. 보아하니 저쪽도 자신을 불편하게만 여기는 듯한데 굳이 친해지려 억지로 말을 걸어 서로 더 불편해질 필요는 없었다. ……라고 분명 생각은 하는데,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렇게까지 자신을 꺼리며 온전히 불편하게만 여기는 상대가 처음이라 조금 신기하기도 했고. 늘 에이든 헤더처럼 어떻게든 제게 잘 보이려 허리를 굽실거리는 사람만 상대해왔던 레이몬드에게 클레어 헤더는 어쩔 수 없이 호기심이 생기고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러다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그녀의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레이몬드는 겨우 시선을 돌려 바로 옆의 창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클레어는 단 한 번도 자신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레이몬드는 애써 그녀 쪽을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마찬가지로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그의 시야에 눈처럼 새하얀 건물이 들어왔다. 아직은 건물이라기보다는 형태를 갖춰가고 있는 중이라고 봐야 했지만. 이 땅에선 언제 봐도 한없이 이질적이기만한 건물의 외형에 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일그러뜨린 순간이었다.

끼긱,하는 소리와 함께 기묘한 위화감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오며 마차가 옆으로 크게 기울었다. 히히히힝! 놀란 말들의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헤더 영애!”

영문을 몰라 놀란 눈으로 저를 돌아보는 클레어를 레이몬드는 반사적으로 끌어안으며 마법을 발동시켰다.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수준으로 마법 수식을 완성해 그녀와 제 몸 위로 은빛 막을 둘렀다.

콰앙!

순식간에 마차가 전복되어 바닥을 굴렀다. 깨진 유리가 쏟아지고 부서진 문과 천장이 두 사람을 덮쳤다. 레이몬드가 전신에 두른 실드가 두 사람을 보호했지만 완전히 충격을 흡수하진 못했다. 레이몬드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며 클레어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전하!”

뒤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고 있던 데니스 백작의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왔다. 데니스 백작과 다른 기사들이 다급히 두 사람을 깔아뭉갠 마차의 파편들을 치워내는 소리도 들렸다.

레이몬드는 실드를 유지한 채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후 제 팔 안에 있는 클레어가 괜찮은지부터 확인했다. 숨소리도 내지 않고 얌전히 있기에 의식을 잃은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그저 창백한 얼굴로 굳어서 꼼짝도 하지 않고 제게 안겨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크게 다친 곳도 없다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 레이몬드가 고개를 들어 데니스 백작을 향해 외쳤다.

“뒤로 물러나 있도록.”

제 말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후다닥 마차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레이몬드는 조용히 수식을 완성시켜 부서져 나뒹구는 마차와 파편들을 허공에 들어 올려 저 멀리 내던져버렸다.

쿠콰앙! 거친 굉음과 함께 망가진 마차가 다시 한번 땅에 처박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전하!”

마차가 날아가는 걸 확인한 데니스 백작과 기사들이 허둥지둥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레이몬드는 그 외침들을 무시한 채 클레어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서 다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헤더 영애, 괜찮습니까?”

나직한 물음에 클레어는 그제야 움직임을 보였다. 굳은 눈동자를 들어 레이몬드를 올려다본 연갈색의 눈동자에 혼란과 충격이 가득했다. 클레어가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다 입을 다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싶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레이몬드는 클레어의 팔을 붙든 채로 몸을 일으켰다. 형식상의 질문을 던지고 그녀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려했다. 그런데 클레어는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면서도 혼자 힘으로 섰다. 그런 그녀를 의외라는 듯 바라보고 있는데 데니스 백작이 초조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전하,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어떻게 된 거지?”

레이몬드는 손을 들어 이리저리 제 몸을 살피는 시선을 차단하고는 무표정하게 되물었다. 그에 데니스 백작이 허둥대던 태도를 지우고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자세한 건 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뒤쪽에서 봤을 때는 갑자기 마차 바퀴가 빠지는 걸로 보였습니다.”

“바퀴가?”

레이몬드가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데니스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럼 처음에 끼긱,하고 들렸던 소리가 바퀴가 빠지는 소리였나.

“죄송합니다. 제가 한 번 더 점검을 지시했어야 했는데, 제 불찰입니다. 황성으로 돌아가는 즉시 마부를 포함해 마차를 관리했던 시종들을 전부 불러들여 심문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차후에 어떤 처벌을 내려주시든 달게 받겠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