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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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만나 보니 어떠십니까?”
피곤한 얼굴로 저택을 나오니 제 보좌 겸 호위로 따라온 데니스 백작이 즉시 옆으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평소엔 저보다 더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그도 어지간히 그녀의 존재가 궁금하긴 했던 모양이다.
레이몬드는 방금까지 억지로 만들어 냈던 웃음을 깨끗이 지운 채 무표정하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뭔가 한차례 일을 해결하고 나니, 며칠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한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유리 황녀가 알렌 4황자까지 끌어들여 그토록 난리를 쳐대면서까지 원하는 여인이 누구인지를 두고, 지금 황실 내에서도 말이 많았다. 머지않아 사교계에도 얘기가 퍼져 「클레어 헤더」라는 이름이 유명세를 타는 건 일도 아닐 터였다.
대책 없이 일을 벌인 제 여동생 탓에 죄 없는 귀족 영애의 혼삿길이 완전히 막히지 않을까 처음엔 걱정도 했었다. 한 여인의 인생을 망쳐놓는 건 아닌가, 이걸 어떻게 보상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고민도 많았고.
하지만 하루도 채 지나기 전에 제 앞에 도착한 「클레어 헤더」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런 쪽으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간신히 귀족의 타이틀을 달고 있긴 하나 제 집안에서조차 귀족 취급도 받지 못하는 영애, 그리고 아델 공작의 정부. 특히 마지막 특이사항 때문에 알만한 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여인이었다. 대부분 썩 좋지 않은 의미로써 말이다.
그래서 솔직히 이 보고서를 받아 읽었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직접 이 여인을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사람을 시켜 유리 황녀를 설득해달라고, 설득에 성공하기만 하면 필요한 보상은 뭐든 해주겠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이런 여자와 얽히고 싶지도 않았을뿐더러, 직접 찾아갔다가 괜한 기대를 품게 만들어 아델 공작을 대신할 상대로 인식되는 것도 불쾌할 테니까.
그랬던 자신이 도중에 마음을 바꾼 건, 연락용 마력구를 통해 마주했던 여동생의 표정이 쓸데없이 진지하고 간절했던 탓이다. 워낙 싫증도 잘 내고 까다로워선 저보다 더 사람을 가리는 여동생이 그토록 원하는 사람이라니. 당연히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보고서에 올라온 게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면서, 마음을 바꿔 그녀를 직접 찾아온 거였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하지만 직접 대면한 그녀에 대해 말하라고 한다면…….
유리 녀석이 그렇게까지 집착할 만한 상대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긴 했지만, 그 녀석이 황실을 한바탕 뒤집어놓으면서까지 원할 만큼 특별히 매력적인 여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분명 아름다운 여성이긴 하나, 이 제국 내에서만 그녀보다 아름다운 귀족 여성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성격이 특별히 밝아 잘 웃는다거나 말을 재치있게 한다거나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넘쳐흐르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어둡고, 말수가 적고, 자기 의견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 하는 게 조금 답답해 보일 지경이었다.
‘아니, 아예 그런 건 아니던가.’
헤더 자작가의 또다른 영애로 보이는 이가 몰래 대화를 엿듣던 것을 들키자마자, 곧바로 제 앞에 엎드려 사죄하던 그녀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줄곧 조용조용 낮게 울려 잘 들리지도 않던 목소리를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자신은 처음부터 웬 버러지 같은 것들이 모여들어 대화를 엿들으려 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알면서도 묵과하고 있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었다. 애초에 그렇게 시끄러워질 걸 알면서도 직접 당당하게 헤더 자작가로 찾아간 것이었으니, 그 정도는 용서해주려 했다. 어차피 공간에 마법을 걸어 대화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녀로서는 자신이 그 자들을 해할지도 모른다 여긴 탓인지, 지나치게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었다. 힘없고 약한 여성을 겁먹게 하고 억지로 무릎 꿇게 한 것 같아 썩 보기 좋지 않았다.
그보다 제 이미지가 그렇게나 좋지 않았던가. 뒤에선 알게 모르게 피에 미친 악마 같은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 건 아닌가 잠시 의심도 들었다.
그리고 그 즈음에 와서는 이 정도면 그녀가 설마 자신이 제게 마음이 있다는 착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녀는 제 방문을 달가워하지도 않았고, 마주하고 있는 내내 자신이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런 사람이 설마 제게 괜한 마음을 품을 것 같지도 않았기에, 그때부터 레이몬드는 훨씬 편해진 기분으로 그녀를 상대했다.
딱딱하던 말투도 그 애들을 대할 때처럼 부드럽게 풀어 말하니, 그녀는 살짝 헷갈리는 표정이었다. 그 반응이 왠지 재미있어서 일부러 더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을 덧붙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은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는 아주 평범하디 평범한 여성. 그게 레이몬드가 그녀와의 만남에서 생각한 전부였다. 뭐,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실례되는 행동이겠지만.
“글쎄, 잘 모르겠군.”
그렇다고 그걸 일일이 누군가에게 말해줄 만큼 그는 친절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는 질문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화제로 삼는 것 자체를 거부해버렸다. 그런 레이몬드의 분위기를 눈치 빠르게 읽어낸 데니스 백작도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후에는 수도의 외곽에 위치한 헤더 자작저에서 다시 황성으로 돌아갈 길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예상대로 클레어 헤더가 자신들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라진 점이라면 그녀는 원래 입고 있던 원피스와 조금 다른 패턴의 원피스를 입고 있고 그 위에 겉옷을 하나 더 걸친 모습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오는 모습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레이몬드는 말없이 그녀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잠시 머뭇거리다 제 손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려놓는 그녀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래서 무심코 그 손을 감싸 쥐자 깜짝 놀란 듯 클레어의 시선이 제게 향했다. 덕분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어 잘 보이지 않던 그녀의 뺨이 심상치 않음을 레이몬드는 뒤늦게 발견했다.
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과 입가의 상처를 본 레이몬드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표정이 굳는 걸 본 클레어가 황급히 다시 고개를 숙였지만 그런다고 이미 본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제가 관여하길 원치 않으시는 듯하나.”
레이몬드는 손을 떼고 물러나려는 클레어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붙들었다.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상처를 가리기에 급급한 그녀의 모습에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모른 척하긴 힘든 상처입니다.”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클레어의 몸이 작게 떨렸다. 한없이 연약해보이는 어깨가 움츠러든 모습에 레이몬드도 멈칫했다. 결코 그녀를 겁주고자 한 의도는 없었는데, 그녀의 입장에선 제 태도가 자신을 윽박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레이몬드의 눈동자가 방금 그녀가 걸어 나온 낡은 저택으로 향했다. 길어봤자 30분 정도였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택 안에서 그녀에게 이따위 짓을 저지를 만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헤더 자작 부부는 오늘 나란히 집을 비운 상태였다. 그걸 알고서 일부러 이 시간에 조용히 찾아온 것이니 그 둘은 아니었다. 그럼 자연히 시선은 오늘 이 저택 안에 남아있던 인물들에게로 옮겨간다.
레이몬드는 오늘 저택을 비운 헤더 자작 부부를 대신해 자신을 맞이하러 뛰어나왔던 헤더 가의 장남을 떠올렸다.
에이든 헤더라고 했던가. 허리를 굽실거리며 제 눈치를 살피고, 그 잠깐 동안에도 어떻게 하면 제게 잘 보일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대는 게 훤히 보이는 계산적인 눈동자가 역겨웠던 게 기억났다.
―그런데 그 계…… 아니, 클레어는 어째서 찾으시는지…….
무례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방문 목적에 대해 호기심을 드러내는 남자의 질문을 싸늘히 일축하자, 새파랗게 질려서도 자존심이 상한 듯 이를 악무는 모양새도 떠올랐다.
그 순간에야 그저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인간이라는 느낌만 받았었지만, 그 커다란 덩치로 힘의 차이가 명백한 여성에게 무력으로 위해를 가하는 인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언제 어느 때든 반드시 보호받아야할 레이디가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건 자신이 클레어 헤더와 어떤 특별한 사이든 아니든 그의 신념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제가 에이든 헤더 경과 직접 대화를 해봐도 되겠습니까.”
혹시나 했던 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에이든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녀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를 벌하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연갈색의 눈동자가 불안의 빛을 띤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시선을 떨어뜨린 클레어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못 본 척, 해주실 수 없을까요.”
직접 본 것도 아닐 터인데 레이몬드는 곧바로 에이든 헤더부터 언급해왔다. 그런 그에게 어찌나 놀랐던지 클레어는 에이든이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제가 못 본 척한다 해도 아마 유리 녀석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클레어의 말에 레이몬드가 즉각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에이든 헤더가 당신의 뺨을 때린 게 사실이라면, 그 녀석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달려올지도 모른다는 말은 간신히 덧붙이지 않고 참았다.
“잠깐만 시간을 더 주시면 황녀 전하께 거슬리지 않도록 상처를 가려서…….”
“상처를 보이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헤더 영애가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레이몬드는 클레어가 겁먹지 않도록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애썼지만,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목소리가 높아진 정도였으나 또다시 클레어의 어깨가 더 움츠러드는 게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죄송합니다.”하고 사과를 하고는 손을 들어 잘 정돈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레이몬드가 무심코 내뱉은 한숨에도 움츠러든 클레어가 애원하는 듯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자신이 폭행당했다는 사실도, 자신을 폭행한 상대를 처벌하기도 바라지 않는 듯했다. 단순히 그 상대가 자신의 사촌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