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6) (7/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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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뭐야 진짜?”

옷을 갈아입으려 방으로 돌아와 옷장 앞에 서자마자, 노크도 없이 문이 벌컥 열렸다. 당연하다는 듯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문을 박차고 내 방 안으로 들어온 사촌 에이든 헤더의 모습에 나는 옅은 한숨을 내뱉었다.

분명 이 난리가 났으니 헤더 부인이든 누구든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중에서도 제일 성가신 인간이 왔다. 예상했던 상황이긴 하나 달갑진 않았다.

팔짱까지 척하니 낀 채로 버티고 선 모습을 보아하니 며칠 전에 헤더 자작부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대충 얼버무려 넘기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보다 이 시간에 저 인간이 왜 여기 있는 거지. 2년 전에 겨우 겨우 에젯트 헤더의 연줄로 황실 기사단에 들어갔다고 한 것 같은데, 그새 또 잘리기라도 한 걸까.

한동안 마주칠 일이 없어서 좋았던 얼굴이 불쑥 눈앞에 들이밀어지자 내 기분도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간신히 잊고 있던 역겨운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고 하니까.

“내 말 안 들려? 대체 뭔 짓거릴 하고 다니길래 황녀 전하며 황가 사람들이 자꾸 널 찾아와? 저 사람들이 너 같은 걸 찾을 일이 뭐가 있냐고?”

커다란 덩치로 위협하듯 바짝 다가와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딱히 대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는 에이든 헤더의 말을 무시하며 옷장을 열어 적당한 외출복을 찾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내가 계속 제 말을 무시하니 또다시 못된 성질머리가 발동된 모양이었다. 갑자기 뻗어온 손이 내 몸을 강하게 밀쳤고, 무방비하게 서 있던 나는 그대로 옷장 문 모서리에 쿵 부딪히고 말았다. 어깨와 머리를 세게 부딪히는 바람에 순간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의 통증이 밀려들었다.

신음을 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무는데, 고통스러워하는 내 표정에 그나마 속이 풀렸는지 에이든 헤더가 픽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괴로워하는 걸 볼수록 저 기분 나쁜 눈동자가 실실 웃으며 기뻐한다는 걸 알기에 애써 표정을 감췄지만, 뒤로 감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날 이후로 몇 년간은 이 개새끼가 그래도 최소한 내 몸에 손을 대거나 하진 않았었는데. 이제 리하르트 아델의 이름이 아예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는 걸 안 덕분인지, 다시 예전처럼 함부로 손을 놀리고 있었다.

내가 힘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예전처럼 다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비겁하고 치졸한 개새끼.

“또 무슨 더러운 짓거릴 하고 다니는진 몰라도 우리 집안에 폐를 끼치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이미 내 존재가 이 집안의 민폐 그 자체라는 투였다. 그 말에 딱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난 그런 취급을 받아왔고, 또 그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저 애가 아무리 날 욕하고 괴롭히고 때려도, 저 애를 이해해보려고 하던 때도 있었다. 언제나 숨을 죽이고, 저 애가 분풀이하듯 소리를 지르고 때리는 손길들을 가만히 견디던 때도 있었다.

하다못해 3년 전 이 빌어먹을 개새끼가 내게 그딴 짓을 저질렀을 때조차 나는 이 애를 벌하길 바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줄곧 악몽 같기만 했던 사촌이 밉지 않아서가 아니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럽지 않아서가 아니라…… 끔찍한 기억 밖에 없는 이 저택이, 그래도 내게는 유일하게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니까. 그저 조용히, 앞으로도 내가 이 집안에서 조용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서늘한 눈을 들어 에이든을 쳐다보았다.

―너야말로 좀 조심하지 그래.

―2황자 전하께서 너그럽게 용서해주셨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까 네 추태로 그 자리에서 너도 나도 다 목이 잘려 죽었어도 할 말 없어.

―네가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는데,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 튀게 하지 마.

나는 입안에서 맴도는 말들을 꾹 눌러 참고는 어두운색의 상의를 옷장에서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써 담담한 척 손을 움직였다. 옆에 저 개새끼가 있든 말든 입고 있던 옷 위로 상의를 겹쳐 입으려는데 들고 있던 옷을 그새 빼앗기고 말았다.

뻗어온 손에 반사적으로 움츠러드는 몸을 펴고 옆을 돌아보자 어디 뺏을 테면 뺏어보라는 듯 비웃음을 띤 에이든이 이죽거렸다.

“그리고 충고하는데 너, 또 쓸데없이 착각하지 마.”

항상 이 인간을 대할 때는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나였다. 내가 괴로워하거나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수록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는 인간이니까. 최대한 표정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그나마 빨리 이 인간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내가 뭐랬어? 아델 공작 때도 내가 일찌감치 정신 차리라고 했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한도 끝도 없이 나를 상처 입히려고 드니까.

“주제도 모르고 공작과 붙어먹더니, 본전도 못 챙기고 떨려 난 것 보라지.”

겨우 멈췄던 몸의 떨림이 심해졌다.

힘들게 유지하고 있던 무표정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더는 표정 관리가 힘들어진 걸 깨달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 멍청아. 아델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너 같은 걸 진지하게 상대나 할 것 같아? 당연히 그냥 적당히 갖고 놀기 좋은 심심풀이지. 얼굴이나 몸도 쓸만하고 뒤탈도 없어 보이니까. 그런데 넌 그것도 모르고 혼자 사랑 타령하다 공작을 질리게 했겠지. 안 봐도 뻔하다. 그때 우연히 한 번 구해준 걸로 무슨 운명의 사람이라도 만난 양 맹목적으로 매달렸겠지. 공작 입장에서 보면 네가 얼마나 웃겼을까? 내가 다 창피해 죽겠네.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 꼴에 공작부인으로 신분 상승이라도 꿈꾸고 있었냐?”

“……나가.”

“뭐?”

무의식중에 치마를 움켜쥔 손이 떨렸다. 딱지조차 앉지 않은 상처에 유리 조각이 파고드는 듯한 통증에 순간 감정 조절이 되질 않았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눈으로 에이든을 노려보며 소리 질렀다.

“당장 내 방에서 나가!”

짜악!

왼쪽 뺨에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덕분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입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나는 익숙하다는 듯 놀라지도 않았다. 담담히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고서 에이든의 손에 있던 옷을 되찾아왔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옷을 척척 걸쳐 입었다.

“이게 돌았나? 어디 감히 나한테 소리를 질러?”

뺨을 때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에이든이 씩씩대며 소리를 질러댔다.

“갑자기 저 대단한 황족들이랑 붙어먹으니 너도 뭔가 된 거 같냐? 그래서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지? 어?”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머리가 다 아파서, 뺨을 한 대 더 맞아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똑똑.

이미 활짝 열려있던 문을 두드리며 집사가 제 존재를 알려왔다. 그는 에이든의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말을 전했다.

“아가씨, 아래층에서 2황자 전하께서 계속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가 보기에도 이대로는 내가 이 방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걸 알았던 모양이다. 나는 내심 살았다는 표정으로 에이든을 피해 옆으로 걸어 나왔다. 성난 소처럼 콧김을 뿜어내면서도 2황자의 존재는 두려운지, 다행히 저 에이든 헤더도 더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서 무언가가 처참히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로 봐선 아마 내가 아끼던 화병 중 하나를 바닥에 집어던져 깨뜨린 것 같았다. 그 화병 대신 나를 집어던져 부숴버리고 싶다는 듯이.

‘황녀 전하를 설득하는 것만 생각하자.’

내심 에이든이 다시 다가오지 않을까, 아까처럼 억지로 나를 밀어붙이거나 하진 않을까 무서워 가슴이 쿵쿵 뛰었다. 나는 조금 비참할 정도로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양손을 꾹 마주잡아 떨림을 멈추려 애썼다.

그리고 모른 척 외면하고 있던 감정들도, 겨우 잊은 척하고 있던 그 사람의 존재도, 그 사람에게 내가 버려졌다는 사실도, 다시 떠오르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았다.

레이몬드 2황자는 나에게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를 설득해달라고 했다. 유리 황녀와 알렌 4황자가 나와 레이몬드 2황자의 결혼을 원한다며 식사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만나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생각하려 했다.

이 이상 레이몬드 2황자를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급해졌다. 뛰듯이 계단을 내려가 저택의 입구로 향하는데, 도중에 보이는 거울이 눈에 띄었다.

급히 내려오느라 옷만 겨우 갈아입은 걸 떠올린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뒤늦게 점검했다.

머리는 산발에 왼쪽 뺨은 벌겋게 부어오르고 입가와 입술도 터져선 제대로 흉측한 몰골이었다. 생각보다 더 상처가 심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러고 어떻게 황자와 황녀 앞에 서란 말인가. 사람인 이상 갑자기 생긴 상처가 궁금하지 않을 리 없는데.

그렇다고 사촌 동생에게 화풀이 당하듯 맞아서 그렇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부끄러운 집안사를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것도 아니고.

다시 올라가서 화장이라도 좀 하면 가려지려나. 머뭇거리던 나는 그냥 최대한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리는 걸로 타협해버렸다. 고작 분 좀 칠한다고 가려질 상태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고작 내 상처 따위를 신경 쓰느라 2황자를 기다리게 하는 게 말이 안 되니까.

차라리 2황자의 눈을 피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으면 어떻게 가려지긴 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애초에 레이몬드 2황자가 그 정도로 내게 관심을 가질 것 같지도 않았고.

괜한 걱정 대신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택 입구를 지나쳐 나오자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호위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레이몬드 2황자가 보였다.

나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려 얼굴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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