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5) (6/152)

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5)

어쨌든 그 책을 읽고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웬 낯선 외국인들이 자신을 「황녀 전하」니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니 하는 이상한 호칭과 이름으로 불러대는 거였다.

유리가 내 이름이 맞긴 한데, 어딘가 좀 이상한데. 갑자기 내 이름이 왜 그렇게 길어졌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려하며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날 때쯤 김유리는 황당함에 허허허 헛웃음만 흘려야 했다. 어이가 없다 못해 저 멀리 하와이로 여행이라도 간 듯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이다.

김유리는 유치뽕짝 이세계 빙의물 『이세계 소녀, 성녀 되다?!』에 들어오게 되었다. 주인공도 조연도 아닌, 그저 이름만 몇 번 스치듯 나오는 서브 남주의 여동생으로. 게다가 어떻게 보면 이 소설에 실컷 이용만 당하다 버려진 여자 조연만큼이나 불행한 엑스트라로.

처음엔 김유리도 기존의 로판 소설 속 여주인공들처럼 집으로 돌아가겠다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어떻게든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돌아갈 방법은 보이지 않았고, 다들 저를 미친 사람 보듯하며 조심스럽게 대할 뿐이고, 소설 속에서의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울고불고 기도하고 하늘을 향해 화도 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김유리는 결국 이 믿기 힘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후 다시 한번 소설 내용들을 떠올리다 자신이 이 소설을 얼마나 질색했는지도 떠올렸다.

이 책을 읽고 났을 때 제가 느꼈던 분노, 그리고 제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을 이곳으로 끌고온 누군가에 대한 격렬한 증오와 반발심도 함께 떠올렸다.

지금 눈앞에 그 소설이 있다면 책의 형태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갈기갈기 찢고 싶다며 분노를 터뜨리던 김유리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소설에 대한 복수로써 소설의 결말을 제 손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차라리 서브 남주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와 이 망할 소설의 불운한 희생양인 「클레어 헤더」를 이어주자고.

어쩌면 자신은 그 사명을 띠고 이 책 속으로 들어온 걸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믿음도 생겨났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불타는 사명감과 의욕만으로는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거였다.

우선 자신이 새로운 남주와 여주로 꼽은 서브 남주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와 「클레어 헤더」 사이에는 접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서로의 존재조차도 몰랐던 사이니 당연한 거지만, 김유리에게는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만나게 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힘들었다.

레이몬드 2황자는 마탑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으로, 여동생인 자신조차도 1년에 몇 번 보기 힘든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클레어 헤더 영애 또한 남주와 관련된 일이 아니면 제 방에 콕 처박혀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는 집순이였다. 이름 없는 가문의 영애다 보니 황실이 주최하는 연회에 초대받지도 못하는 건 당연했고.

그런 두 사람을 대체 어떻게 만나게 해야 할까. 며칠 밤낮을 고민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그 와중에 드디어 여주인공인 성녀가 성국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유리의 뺨을 후려쳤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안 돼, 이대로면 건국기념일에 여주와 마주친 둘째 오빠가 거지 같은 짝사랑을 시작하게 된다고!’

상황은 책 속 전개대로 척척 진행됐다. 제국에서는 건국기념일을 맞아 성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직접 그녀를 제국으로 초대했고, 성국에서는 흔쾌히 그리하겠다 답변을 해왔다. 성녀를 호위할 인물로서 남주가 낙점됐고, 남주는 기사단과 함께 제국을 떠나 결국 성녀를 제국으로 모셔오고야 말았다.

그때까지도 레이몬드와 클레어, 두 사람을 만나게 할 그렇다 할 계획이 떠오르지 않아 고통에 몸부림치던 유리는 일단 대책 없이 무모하기만 한 계획 중 하나를 냅다 질러보기로 했다.

다짜고짜 클레어 헤더 영애를 찾아가 우리 오빠와 결혼해달라고 억지를 부려보았으나 실패였다.

의외로 그녀는 단호한 구석이 있는 사람으로, 귀염둥이 막내까지 데려가 열심히 어필을 해봐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원작 이야기 진행에 방해가 돼서인지, 상대가 바뀌어서인지, 그녀에게서 묘하게 철벽 여주의 향기가 풍겼다.

그래서 이번엔 방향을 바꿔, 연락용 마력구를 사용해 마탑에서 지내고 있는 둘째 오빠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나 평생의 소원이 있는데 들어주면 안 되냐고 당당하게 외쳐보았다. 소원이 뭐냐고 물어봐 주지도 않고 돌아온 대답은 「무조건 안 된다.」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대답에 실망하지 않고 유리는 다음 필살기를 준비했다.

“두째 형님, 안녕하세요!”

유일하게 시스터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있는 둘째 오빠가 무한한 애정을 쏟고 있는 막내 알렌 황자를 끌어들인 것이다.

알렌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의 견고한 성벽이 위태로워진 것을 알아챈 걸까, 둘째 오빠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찰나.

“둘째 오빠가 소원 안 들어주면 우리 아무것도 안 먹고 쫄쫄 굶어 죽을 거야!”

“주글 거에요!”

누구보다 저를 제일 따르는 막냇동생을 끌어들여 외치자 반응이 확연히 차이가 났다.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둘째 오빠를 확인한 유리는 곧바로 연락용 마력구를 차단해버렸다.

그러고는 그 전부터 계획해 숨겨둔 비상식량을 버팀목으로 알렌과 함께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당연히 황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물론, 다른 두 명의 오라버니까지 찾아와 울며불며 사정을 해와도 유리와 알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식을 이어갔다.

몰래 식사를 먹였지만 배고픈 연기가 일품인 막내의 효과도 상당했다.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곧바로 둘째 오빠에게 연락을 넣어 네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동생들의 소원 하나 못 들어주냐며 호통을 쳐댔고, 첫째 셋째 오라버니들도 막강한 지원사격을 해주었다.

결국 하루만에 백기를 든 둘째 오빠가 연락이 와선, 지친 얼굴로 대체 소원이 뭐냐고 물어왔다.

그에 유리는 간절하고 절절한 마음을 가득 담아 「둘째 오빠가 클레어 헤더 자작 영애와 결혼하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저로서는 상상도 못한 얘기가 나와 당혹스럽고 기가 막힌 지 잠시 말이 없던 둘째 오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여성과 내가 결혼하는 게 소원이라고?」 묻기에 유리는 「내 평생 소원이다.」라고 답했다.

한없이 진지한 제 표정에 둘째 오빠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연락이 두절됐다.

단식 3일 차. 슬슬 둘째 오빠에게서 반응이 올 시기가 됐는데도 별다른 소식이 없자 유리는 초조해졌다.

나름 든든한 지원군이 있긴 한데, 쬐끔 불안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빵을 또 먹였는데도 배고파 죽겠다는 눈으로 저를 빤히 응시해오는 막냇동생을 보며, 유리는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러고는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켜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래도 나름 눈치는 있는 알렌도 똑같이 정자세로 제 앞에 앉았다.

“알렌 스위티 카지스.”

“웅!”

유리가 근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한없이 해맑고 발랄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라고 해야지.”

“넷!”

“알렌 너도 클레어 헤더 영애가 마음에 들지?”

“웅! 넷!”

제 누나의 진지한 물음에 알렌은 며칠 전 누나를 따라 만나러 갔던 예쁜 형수님을 떠올렸다. 곤란해하면서도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던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알렌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헤헤 맑게 웃었다.

“헤더 영애가 알렌하테 웃어줘써. 헤더 영애 웃능거 에뻐써. 알렌은 헤더 영애 조아요.”

매우 만족스러운 대답이 돌아와 유리의 입가에도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옳지, 그럼 알렌도 클레어 헤더랑 레이몬드 오빠가 결혼했으면 좋겠지? 배고파도 조금 참을 수 있지?”

이때다 싶어 살짝 못을 박아주자, 멈칫 알렌의 커다란 눈동자에 망설임이 깃들었다.

“우웅.”

자신 없는 표정의 알렌은 슬쩍 눈동자를 굴려 방 한가운데 유혹적으로 차려진 식사들로 시선을 가져갔다. 이제 겨우 다섯 살에게는 얼마든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데도,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 참아야 하는 게 무척 괴로운 모양이었다.

결국 유리는 숨겨뒀던 빵 하나를 더 꺼내 가져와야 했다.

“이거 먹고 잘 참아보는 거다?”

대충 상황 보니 다들 난리가 나서 황실이 한바탕 뒤집힌 기색이었다. 이 정도면 분명 둘째 오빠도 뭔가 반응을 보여올 게 틀림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조금만 더.

꼬르르르륵.

이번엔 유리의 배 속에서 굉장한 소리가 울렸다.

확실히 저 진수성찬을 눈앞에 두고 참으려니 힘들긴 했다. 유리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알렌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있는 빵을 쳐다보았다. 입에 침이 고였다.

“누님도 줄까요?”

“응.”

알렌이 반을 떼어 내미는 빵을 유리는 냉큼 받아들어 입에 넣었다. 동생의 빵을 뺏어 먹는데에 대한 미안함과 민망함은 지금만 잠시 외면하기로 했다.

똑똑!

“황녀 전하, 황자 전하!”

만든 지 꽤 시간이 지나 딱딱하고 퍼석해진 빵도 맛있다며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을 때였다.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시녀장의 외침에 유리는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그토록 원하던 소식이 도착한 게 틀림없다는 촉이 왔다.

“지금 2황자 전하께서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헤더 자작가로 가셨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뭐라도 좀 드셔주세요! 제발요!”

“우리 아가, 들었지? 레이가 이제 다 해결하고 올 거란다. 그러니 얼른 나와서 같이 식사 좀 하자, 응?”

헐레벌떡 달려온 듯한 시녀장의 외침 뒤로 어마마마의 다급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둘째 오빠가 직접 헤더 영애를 찾아갔단다. 대박……, 대박 사건.

‘됐다!’

유리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문을 응시하다 침대 위를 방방 뛰며 허공에 주먹을 날렸다.

원작에서 클레어 헤더에게는 남주인 리하르트 아델이 유일한 남자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그녀에게 그 외에 다른 남자는 만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작에서는 접점도 없었던 두 사람이 일단 만나기라도 하면 이야기는 분명 달라질 것이다. 유리는 그에 확신이 있었다.

‘이제 둘째 오빠가 그 잘난 얼굴과 넘치는 매력으로 새언니를 꾀어 올 일만 남았다! 아자!’

물론 그날, 유리가 그토록 기뻐할 수 있었던 건 제 예상 범위 안에 두 가지의 골치 아픈 상황이 존재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작 남주의 진로 변경이라든가, 원작 여주라는 뜻하지 않은 복병 같은 것 말이다.

유리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골칫거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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