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4)
* * *
꼬르륵.
꼬르르르륵.
“꼬륵…….”
아까부터 요란하게 울려대는 뱃고동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하던 유리는 이건 뭐냐는 표정으로 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한 막냇동생이 있었다.
“마지막 건 입으로 낸 소리잖아.”
“우웅.”
일부러 누나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한 알렌은 기다렸다는 듯 유리의 팔에 매달려 칭얼대기 시작했다.
“누님, 알렌 배고파요.”
“너 내가 준 사과파이 먹은 지 5분도 안 지났어.”
미리 작정하고 숨겨놨던 비상식량들을 틈틈이 줬음에도 알렌은 여전히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유리가 그 점을 지적하고 나오자 살짝 당황하던 알렌이 아예 제 누나의 팔에 얼굴을 묻으며 칭얼댔다.
“그치만 배고픈걸.”
꼬르르르륵.
배고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알렌의 배에서는 끊임없이 신호가 울렸다.
“저거 한 개만 먹으면 안 돼요?”
저 나이에는 잘 먹긴 해야 하는데.
요란한 뱃고동 소리에 유리의 마음이 약해질 즈음, 알렌이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심코 시선을 가져간 곳에는 유리와 알렌이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가득 찬 테이블이 있다.
방 한가운데 떡하니 차려진 휘황찬란한 식사와 디저트들은 노골적으로 유리와 알렌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래도 안 먹을 거야? 진짜? 너희가 좋아 죽는 것들로만 다 차려놨는데?
그 테이블을 보고 있자니 입에 절로 침이 고였다. 제 팔에 매달린 알렌은 아예 침을 줄줄 흘리며 테이블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키던 유리는 제 소리에 제가 놀라 펄쩍 뛰었다.
“안 돼, 저기서 하나라도 먹으면 우리가 지는 거야!”
유리는 단호하게 테이블을 외면하고는 다시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지금 제가 왜 3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귀염둥이 막내까지 끌어들여서!
이제 와서 그걸 전부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순 없었다.
“알렌 너무 배고파요, 누님.”
“어휴, 진짜.”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지원군이 그리 협조적이진 않았다. 아예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 알렌을 보며 유리는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와 옷장을 뒤적이던 그녀는 알렌의 얼굴만한 빵을 가져와 내밀었다.
“자, 이거 얼른 몰래 먹어.”
“꺄아!”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을 빵 하나에 크게 기뻐하는 동생의 모습이 짠했다. 밀려드는 죄책감에 마음이 흔들리자 유리는 얌냠냠 맛있게 빵을 먹는 동생을 빠르게 외면했다.
괜히 어린 동생까지 끌어들였나 싶긴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제 둘째 오빠는 꿈쩍도 하지 않을 테니까.
전형적인 시스터 콤플렉스인 다른 오빠들과 달리, 둘째 오빠인 레이몬드 2황자는 하나뿐인 여동생에게도 아주 엄격하고 냉철하며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하나뿐인 여동생이 내 평생의 소원이라며 펑펑 울어대도, 갑자기 마음에도 없는 여성과 미래를 약속할 만큼 줏대 없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거 같이 먹어요.”
알렌까지 끌어들여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를 안절부절못하게 만든 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변명을 해보고 있을 때였다. 알렌이 먹던 빵의 반을 떼어내 유리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배가 고프대서 빵을 줬더니, 그나마도 나눠 먹고 싶은 모양이다. 착한 녀석 같으니.
“난 됐어. 너나 실컷 먹어.”
유리는 빵을 내미는 작은 손을 밀어내고는 다시 머리맡에 있던 양피지를 당겨 눈앞으로 가져왔다. 진지하게 깃펜까지 들고서 뭔가를 쓰고 줄을 그으면서 중얼거리고 있으니, 옆에서 알렌도 슬쩍 관심을 보여왔다.
“둘째 오빠랑 여주랑 만나게 되는 게 열흘 뒤고, 그 개새끼는 이미 여주 쪽으로 갈아탔을 거고…….”
“누님, 개새끼가 모에요?”
흠칫.
알렌이 커다란 눈망울로 순진하게 시선을 마주쳐오자, 유리는 당황하여 입을 합 다물었다.
맨날 혀짧은 소리 내는 게 갑자기 발음도 정확하게 하고 난리야.
“그, 그거 아주 아주 나쁜 말이야. 얼른 지금 당장 잊어버려.”
“누님도 써짜나요!”
“나도 잘못 쓴 거야! 퉤퉤, 취소!”
유리는 알렌의 입가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털어주는 척 귀여운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방금 제가 무심코 내뱉은 개새끼란 단어를 알렌이 머릿속에서 싹싹 지워버리길 바라면서.
“근데 이건 모에요?”
알렌은 제 누나의 손길에 간지럽다며 한 차례 꺄하하 웃고는 다시 배가 고파졌는지 얼른 빵을 입에 물었다. 그러면서도 유리가 들고 있는 양피지에는 계속 관심이 가는지, 재차 질문을 던져왔다.
유리는 오늘따라 제게 관심이 많은 알렌의 질문을 못 들은 척 다시 양피지로 시선을 내렸다.
고급스러운 양피지에는 제가 깃펜으로 아무렇게나 휘갈긴 글자들이 어지럽게 나열돼 있었다. 양피지의 제일 윗부분에는 「둘째 오빠와 예비 새언니 결혼시키기 프로젝트」란 글자가 위풍당당하게 쓰여있다.
부제로는 「거지발싸개 같은 전개와 결말로 사람 기분 잡치게 한 로판 바로잡기」.
“누님, 이고 모야아.”
유리는 귀여운 막냇동생의 애교에도 익숙해진 듯 담담히 상념에 잠기기 시작했다.
지금 제가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라는 이름의 황녀가 되기까지의 황당한 여정과 함께 「둘째 오빠와 예비 새언니 결혼시키기 프로젝트」라는 원대한 포부를 세우게 된 그 시발점에 대해.
* * *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아니, 진짜 이름은 김유리.
현재 유리 황녀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김유리는 원래 대한민국의 17세 여고생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순탄하게 흘러가던 김유리의 인생은 고1 여름방학의 시작과 함께 천지가 개벽할만한 변화를 겪어야 했다.
김유리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하디 평범한 대한민국의 여고생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밝고 쾌활하며, 아주 조금 더 오지랖이 넓을 뿐인 평범한 여고생.
여느 때처럼 평범하고 평화로운 매일을 보내던 김유리는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이세계 소녀, 성녀 되다?!』라는 인소 느낌 낭낭한 제목의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어떻게 이 소설을 발견하게 되었는지, 자신은 어떤 경위로 이 소설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이상하게 모호했다.
제일 확실한 마지막 기억은 자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던 트럭의 헤드라이트 빛. 아마 자신은 분명 흔히들 말하는 환생 트럭에 치여 죽었고, 이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게 틀림없었다. 『이세계 소녀, 성녀 되다?!』의 여주인공처럼.
그리고 드문드문 떠오르는 그 이전의 기억을 되짚어보자면…… 학교 안에서 우연히 이 소설을 발견했던 것 같고, 척 보기에도 유치찬란하고 개막장 느낌이 솔솔 풍기는 책이 의외로 재미있어 보였고, 그걸 제법 흥미롭게 읽었을 뿐이었다.
소설의 시작은 김유리 자신과 같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여고생이 환생 트럭에 치여 이세계로 차원 이동을 하게 되는 클리셰 가득한 이야기였다. 원래도 판타지 소설이라면 사족을 못 썼던 김유리는 눈을 빛내며 책을 펼쳐 들었었다. 발견한 즉시 그 자리에서 앞부분을 잠깐 읽어보는데, 이거 시작과 달리 전개되는 내용이 사람을 상당히 짜증스럽게 했다.
초반에는 「문」이라는 독특한 소재와 마탑과 마물들, 초월자에 가까운 힘을 지닌 먼치킨 남주 후보들의 등장으로 정통 판타지도 제대로 섞인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기대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일단 남주와 여주가 너무 구렸다. 얼굴밖에 볼 거 없는 이기적인 남주와 여주는 지들끼리 천년의 사랑을 하고 자빠졌고, 주변의 인물들은 무슨 소모품마냥 쓰다 버리는 전개가 상당히 거지 같았다. 오히려 서브 남주와 여자 조연 쪽에 더 마음이 가는 이상한 구조라고 할까.
이야기는 대한민국에 살던 평범한 여고생이 트럭에 치여 차원이동을 하게 되고, 이세계에서 성녀로 추앙받게 되는 진부한 전개로 시작된다. 여주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네, 나는 성녀가 아니네 울고 불고 난리를 치지만 결국 현실에 순응해 성녀로서 점차 자격을 갖춰나간다.
그러던 중에 여주는 자신이 지닌 예지의 힘을 노린 세력들을 피해 성국을 떠나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는데, 황실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서 직접 호위차 나타난 남주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남주는 이 여자 저 여자 넘나들며 바람둥이 인생을 즐기던 놈인데, 여주를 만나자마자 갑자기 운명처럼 진정한 사랑을 찾았네 어쩌네 하며 그동안 제가 만나던 여자들을 쓰레기 버리듯 정리해버린다.
그 과정에서 남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 조연 하나가 등장하게 되는데, 여조가 남주를 잊지 못하고 계속 남주의 주위를 맴도는 장면들이 나온다. 남주는 당연히 그런 여조를 냉정히 외면하고 자신은 이제 오로지 여주만을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는 전개가 나온다.
그러던 중 남주의 주변을 맴돌던 여조는 위험에 처한 남주를 구하려다 대신 목숨을 잃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 속에서 퇴장한다.
고작 바람둥이 남주가 완전히 개과천선하여 여주 외에 다른 여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그 여자 조연은 그렇게 소모되고 사라진다.
여주 쪽도 별로인 건 마찬가지다. 여주 캐릭터 자체는 그리 나쁘진 않은데, 누가 봐도 가슴 설렐 만큼 멋진 벤츠 서브 남주와 실컷 썸만 타다, 누가 봐도 똥차인 남주를 택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남주와 여주가 서로 첫눈에 반했다는 거 외에는 감정선도 영 설득력이 없었다. 오히려 여주와 서브 남주, 남주와 여자 조연 쪽이 훨씬 서사가 더 깊고 자연스럽다고 할까. 애초에 저딴 식으로 전개할 거면 둘과의 과거나 서사를 그렇게 깊이 파고들지나 말지. 더 짜증이 치밀었다.
남주보다 1000배는 더 멋진 서브 남주가 여주에게 선택받지 못한 것도 이해가 안 되고, 그렇게 완벽한 남주상인 서브 남주가 여주를 평생 못 잊어 혼자 살게 두는 전개도 말이 안 됐다.
거기다 판타지 세계관에서 시아버지니 올케니 노골적으로 한국식 호칭이나 문화도 툭툭 튀어나오는데 이건 뭐 아주 혼종도 이런 혼종이 없다. 이러다 나중엔 공작부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앉아 하하호호 김치도 담글 기세였다.
세상에. 요즘도 이런 전개가 먹히나, 작가가 본인 필명을 GOD로 지은 것치곤 스토리 전개 능력이 너무 후진 느낌이었다. 구한말 시대에도 이딴 전개는 안 먹혔겠다, 미친.
정신을 차려보니 그새 시간이 꽤 지나있었다. 스토리는 거지 같은데 이상하게 뒷내용을 궁금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선, 그 자리에 선 채로 책을 거의 다 읽어버린 탓이었다. 완결까지 조금 남긴 채로 시간을 확인했던 김유리는 이딴 소설을 읽느라 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걸 한탄했었다. 아마 그때 책을 뺏기지 않았더라면…….
‘빼앗겨? 내가 책을 뺏겼었나? 선생님께? 아니면 친구였나?’
여기서부터 또 기억의 연결이 모호해졌다.
책의 내용은 정확히 기억하면서도 책을 발견했던 기억과 책을 읽고 난 이후의 기억들이 어째서인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 부근의 기억들을 흐릿하게 지워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