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3)
그보다는 괜히 나와 마주하고 있는 동안 그의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 안타까웠다. 눈앞에 있는 레이몬드 2황자는 황제 부부조차도 1년에 몇 번 만나기 힘들 만큼 바쁜 사람이 아니던가.
“아, 그건.”
주제 넘는다 싶을지도 모르나, 본론부터 알려달라는 내 요청에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내 말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지금부터 자신이 꺼낼 말이 꽤나 난처한 형태의 것인 듯했다.
“3일 전쯤에 제 동생들이 다녀갔다고 들었습니다. 혹 그때 그 말썽꾸러기들이 헤더 영애께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이번엔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지을 차례였다.
설마 내게 질문을 되돌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나는 당황하여 입술을 열었다 급히 닫았다.
당연히 기억이야 하고 있지만, 그때 그 남매가 했던 말들을 내 입으로 직접 말하려니 당혹스러웠다. 혹 레이몬드 2황자가 불쾌하게 여기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고.
내가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잠시 내 대답을 기다려주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저와의 결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반사적으로 움찔 놀라 눈을 드니 시선이 마주친 레이몬드 2황자가 「그럼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잘못한 것도 없이 괜스레 움츠러들어 불안하게 시선을 찻잔에 두고 있는데, 그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허리를 숙여 보이는 바람에 너무 놀라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불쾌하셨을 줄은 알지만 부디 그 아이들을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영애께 일부러 불쾌함을 심어주고자 그런 식으로 무례하게 군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 어떤 연유에선지 헤더 영애가 무척 마음에 든 듯한데…….”
그는 진지하게 제 동생들의 무례에 대해 사과하고 변명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가슴 설렐 만큼 멋진 중저음의 목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다가 겨우 정신이 든 나는 덩달아 일어나선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다급히 말했다.
“이러지 마세요, 전하.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주제넘지만 두 분께 분명히 거절의 의사도 밝혔고요. 혹 제가 착각하여 괜한 기대라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거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른 고개를 드시라 재촉하니 그제야 허리를 든 레이몬드 2황자가 한없이 진중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폭력적이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그 기세에 또다시 움츠러들어 무심코 한 걸음 물러나는데, 레이몬드 2황자의 목소리가 다시 내 발목을 붙들었다.
“아뇨, 그 얘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만.”
나는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조금은 무례하다 싶은 내 시선에도 레이몬드 2황자는 화를 내긴커녕 오히려 내게 미안함이 담긴 눈길을 던져왔다. 본인도 머리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뒷말을 더 덧붙이려 할 때였다.
“꺄악!”
“으아악!”
벌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쏟아지듯 응접실 입구에 엎어졌다. 지금껏 우리 대화 내용을 엿듣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로.
그 속에는 꽤 익숙한 얼굴의 사용인도 있었다. 헤더 자작부인과 에이든 헤더가 제일 믿고 가까이 두는 하녀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설마 레이몬드 2황자가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오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걸까. 기가 막혔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히 불청객들을 내려다보는 레이몬드 2황자와 달리, 나는 순간 사색이 되어 그의 안색부터 살폈다. 차갑게 내리깔리는 그의 시선이 사용인들에게 향하는 걸 깨닫자마자 나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렸다.
아무리 사람이 좋아 보인다고 해도, 결국 눈앞에 있는 사람은 황족이었다. 그것도 적통의 황자. 그런 존재 앞에서 이게 감히 무슨 짓이란 말인가. 저들 모두 누가 봐도 대화를 엿들으려 했던 모양새였다. 지금 당장 자신을 포함해 이 자리의 모두가 황족모독죄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전하, 제가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부, 부디 용서를…….”
차분히 용서를 구하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 돌아보니, 이 사태를 만든 원흉들은 하나같이 죽을상을 한 채 벌벌 떨고 있기만 했다. 저럴 거면 애초에 왜 그딴 짓을 했는지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장 바닥에 머리를 대고 엎드리라고 외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고 있는데,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어깨와 팔을 살며시 잡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실례.”
크게 힘을 들이는 기색도 아니었건만,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레이몬드 2황자와 마주 서 있는 상태였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자니,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해오던 레이몬드 2황자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예쁜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졌잖습니까.”
그가 앞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치워주고는 다시 살며시 미소지었다.
왜 자꾸 웃는 거지. 내가 그렇게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나. 넋이 나가 그런 생각만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멀찍이 손을 치운 그가 응접실 문을 돌아보았다.
그 와중에도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엎어져 있는 저택의 사용인들이 그렇게 한심하고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레이몬드 2황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는 꼴도 그렇고.
“저 사람들, 차나 다과를 새로 내온 것 같진 않죠?”
그렇게 묻는 레이몬드 2황자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너무 평온해서, 나도 모르게 긴장이 살짝 풀렸다. 왠지 딱딱하고 정중하던 말투도 아까보다 훨씬 부드럽고 편해진 분위기였고.
그리 화가 나진 않은 건가? 신기해하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다시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갑자기 응접실 문턱에 엎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짓에 또 한 번 움찔 긴장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의 몸이 허공에 부유하듯 붕 떠오르더니 완전히 문밖으로 훅 밀려났다. 동시에 문이 쾅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한순간에 불청객들이 모조리 쫓겨난 채 다시 둘만 남겨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레이몬드 2황자가 또다시 웃음을 흘렸다.
“유리 녀석이 나에 대해 이건 자랑하지 않던가요?”
그러면서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티테이블에 있던 찻잔이 공중에 떠올라 빙글빙글 돌다 다시 제자리를 찾아 안착했다. 찻잔 속에 있던 차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은 채로.
그제야 나는 그가 마법을 사용했다는 걸 알았다.
레이몬드 2황자가 천재 마법사로 대륙 전체에 이름을 알린 최연소 마탑주라는 사실을 나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순간 곧바로 눈앞의 기현상과 일치시키지 못했던 건, 그가 최소한의 시동어조차 외치지 않은 채 마법을 발동시킨 탓이었다.
신이나 드래곤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영역이 아니던가. 아무리 마법에 대한 문외한인 나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때는 마법사 협회가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의심했다고 했다고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경악한 나는 입까지 헤 벌리고서 그의 얼굴만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런 반응은 오랜만이라 조금 즐겁긴 한데, 일단 하던 얘기를 계속 이어서 했으면 해요.”
다행히 아까부터 계속되는 내 무례한 행동에도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기만 했다.
그의 지적에 나는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며 시선을 내렸다.
“죄…….”
“아, 이제 죄송하다는 말은 그만해요.”
벌써 몇 번째인지 사죄의 말을 입에 올리는데, 그보다 먼저 레이몬드 2황자가 말을 잘랐다.
“방금 그건…… 기분이 썩 좋진 않지만, 헤더 영애가 그리 겁에 질릴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마요. 사과할 사람도 헤더 영애가 아니고.”
그는 자연스럽게 내게 다시 앉기를 권하고는 본인도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그래도 호위를 저택 입구에 세워두고 오길 잘한 듯하네요. 그 녀석이라면 분명 목을 치네 마네 했을지도.”
어쩐지 호위도 하나 없이 혼자 온 건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일부러 저택 안으로는 데려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응접실 문밖에서 쓸데없이 호기심 많은 인간들이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 있었던 거고.
“어쨌든 아까 그 일이라면 난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요. 처음부터 알고 있기도 했고. 아! 우리가 나눈 대화 내용도 전혀 새 나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 부분도 걱정하지 말고요.”
그는 내가 걱정하던 부분들을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척척 해결책을 내어놓았다. 그에 나는 뭐가 뭔지 다 파악하기도 전에 그저 열심히 고개만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이제 정말 앞서 하던 얘기를 이어서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쪽도 설명이 필요하던 참이다.
중간에 말도 안 되는 방해꾼들이 끼어들어 들기 직전에 들었던 그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다.
나는 분명히 유리 황녀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녀가 했던 말들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답했다. 그거면 레이몬드 2황자가 충분히 안심하고 돌아갈 줄 알았으나, 돌아온 답변이 유리 황녀만큼이나 뜬금없고 이상했다.
오히려 그 얘기를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한다니.
조금 긴 얘기가 될 거라며 그가 제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지금 와서 자세히 보니 예쁜 얼굴이 누적된 피로에 무척이나 지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많이 피곤한가 봐, 이렇게 완벽한 사람도 나랑 똑같은 사람이긴 한가 보네, 하고 문득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내 시선을 알아챈 걸까 그가 머쓱한 듯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제가 처음 연락을 받은 게 3일 전 늦은 밤이었습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나는 호기심과 불안이 뒤섞인 마음으로 레이몬드 2황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황당하고, 무모하며, 난해할 거라는 건 상상도 못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