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2)
그 저택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나는 단 한 순간도 그녀의 허락 없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항상 곁에 감시하는 이가 붙어 있었고, 돌아가고 싶다며 울고 불고 애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울기만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매질이 날아들었다. 그 매질이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나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리가 살던 산속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아마 두 분 다 굶주린 산짐승들을 피하다 변을 당한 것 같다고, 헤더 자작저의 사용인들이 수군거리는 걸 얼핏 들었다.
처음 이 저택에 발을 들이고 여러 해가 지날 때까지 나는 좁은 방 안에 갇히다시피 한 채 그림만을 그렸다. 여자, 그러니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에젯트 헤더가 시키는 대로 수많은 캔버스와 양피지에 기계처럼 그리고 또 그렸다.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았다.
긴 시간 족쇄에 묶여있던 짐승은 족쇄를 풀어주어도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고 했던가. 에젯트 헤더는 내가 열두 살이 되던 해부터 감시를 붙이지도, 내 행동을 막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 이 저택에 왔을 때처럼 나를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던 곳으로 보내 달라는 말도, 스스로 이 저택을 나갈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더는 내겐 돌아갈 곳이 없다는 걸 알았던 탓일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인 것처럼 나는 얌전히 헤더 자작저의 가장 구석진 방에 얌전히 앉아 그림만 그렸다. 에젯트 헤더가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본 것이라고는 산속의 낡은 오두막에서 지낼 때 봤던 풍경들과 좁은 방안의 창밖 너머로 보이는 한정된 시야 탓에 내게서 점점 한계가 보였던 모양이다.
그후로 에젯트 헤더는 내게 책을 사주기도 하고, 억지로라도 나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이름 있는 화가들의 작품이 내걸린 살롱에 데려가는 건 물론, 연줄을 이용해 고위 귀족가의 연회에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자신이 바빠 시간을 내지 못할 때는 헤더 자작 부인이나 제 조카들을 시켜서라도 내게 다양한 사물과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구석진 방안에 처박혀 눈에 보이지는 않으니 거슬리지 않던 내 존재가 이 저택의 원래 주인인 그들에게 점점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내게는 숙모님이 되는 헤더 자작부인은 에젯트 헤더가 모르게 나를 굶기는 일이 잦아졌고, 사촌인 에이든 헤더는 제 할머님의 눈에 띄지 않는 곳만 골라 나를 이유 없이 때리거나 괴롭히기 시작했다.
에젯트 헤더가 멋대로 지어준 내 이름 대신 나를 거지 새끼라고 불렀고, 여러 음식을 뒤섞은 걸 가져와 먹으라며 내 입에 억지로 욱여넣은 적도 있었다. 한겨울에 찬물을 뒤집어씌운 채 저택 밖에 세워둘 때도 있었고, 며칠 동안 물 외엔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많았다.
덕분에 앓아누워 끙끙거릴 때도 밖에서 문을 걸어잠근 채 아무도 내 방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마치 그대로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에젯트 헤더는 이상할 정도로 저택을 비우는 일이 잦아 그렇게 세세하게 나를 신경 써줄 여력이 없는 듯했고, 내 아버지를 대신해 가문을 물려받은 헤더 자작은 이 사실을 다 알면서도 그냥 방관하는 느낌이 컸다. 내가 자기 형의 딸이 아니라, 에이든 헤더가 말하는 것처럼 나를 어디선가 주워온 거지새끼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나마 사촌 여동생인 리제 헤더는 나를 피한다고 해야 할지. 특별한 일이 아니면 나와 딱히 엮이지 않았고, 아주 가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주인에게 버려진 강아지 보듯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이따금 그 시선이 더 못 견디게 괴롭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리제 헤더는 내게 있어 좋은 사람에 속했다.
저택의 안주인이라 할 수 있는 헤더 자작부인과 그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다 보니 자연히 저택의 사용인들도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나중엔 헤더 자작부인이 용인한 내 식사조차도 저택의 하인들이 저들끼리 몰래 빼돌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런 부당한 처우들을 고스란히 감내했다. 어쩌면 에젯트 헤더에게 그 사실들을 말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딘가 확신과 같았다. 그녀에게 나는 그저 수레를 잘 끌기만 하면 되는 말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눈과 손이 멀쩡하기만 하다면 아무래도 좋다고 대답할 것 같아서.
나의 유일한 세계와 다름없던 부모님을 잃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변한 환경, 누구 하나 도움을 청할 어른이 하나도 없던 탓이었을까. 나는 남들보다 나 자신에 대한 주제 파악이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어릴 땐 너무 노골적으로 주변을 살펴댔던 탓에 눈치를 살살 보는 꼴이 보기 싫어 죽겠다며 숙모님인 헤더 자작부인으로부터 뺨을 맞은 적도 많았다. 몇 번 그렇게 혼난 뒤로는 최대한 숨을 죽이고 남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주변과 내 위치를 파악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 나란 존재는 빈민굴의 평민들보다 못할 터였다. 가뜩이나 이름도 없는 가문에 방치된 아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반푼이.
타인에게 나는 그저 손가락질당하고 비웃음을 사는 용도로만 비칠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에 억울함이나 분노를 느끼기엔 난 이미 그런 취급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상태였다.
화를 내는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다 여겨졌고, 조용히 참고 인내하는 것이 당연해져 있었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야. 넌 조용한 게 마음에 드네.
―내가 원할 때까지는 내 곁에 있어도 좋아.
처음으로 그런 내게 곁을 허락해준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도 이미 지난 얘기가 돼버렸다.
단순히 과거로 치부되는 것도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문득문득 치미는 감정은 그런 것이다.
이렇게 끝날 거라면, 이대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거라면…….
최소한 당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라도 새긴 채 사라지고 싶다고.
“……애, 헤더 영애!”
아.
“괜찮으십니까?”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어지럽던 머릿속을 힘이 실린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억지로 내 어깨를 붙들어 흔든 것도 아닌데, 단숨에 현실로 끌려 나온 느낌이었다.
달그락.
무심코 쥐고 손안에서 돌리던 티스푼이 테이블 위에 떨어지며 소리를 냈다.
나는 놀란 눈을 깜빡여 정면에 앉은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치 3일 전으로 되돌아간 듯, 낯선 상황에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내게 제 오라버니와의 결혼을 권하던 어린 남매와 닮은 아름다운 얼굴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의아함이 어린 금안이 내 안색을 살피는 있는 걸 알아챈 나는 얼른 표정을 바꿨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상념에 빠졌던 무례를 사죄하며 그 시선부터 피했다.
왠지 이 사람이라면, 내가 가진 생각마저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검은 물감에 짓이겨진 캔버스처럼 음습한 내 마음을 전부 들킬 것만 같았다.
잠시 내렸던 시선을 일부러 찻잔에 두었다가 겨우 진정이 되었을 즈음, 다시 시선을 들었다. 몇 번을 다시 보아도 쉬이 믿기지 않는 사람이 여전히 내 앞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레이몬드 알렉 카지스 2황자.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제 소개를 해주지 않았더라도,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금발에 금안. 3일 전 만났던 귀여운 황족 남매와 얼굴이 닮은 것도 닮은 것이지만, 그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황족 특유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 그랬다.
황실과 황족의 일거수일투족이 늘 화제가 되긴 하지만, 눈앞의 상대는 그 수준이 달랐다.
형님인 렉시드 황태자보다, 나라의 유일한 황녀인 유리 황녀보다, 북방의 수호자라 불리는 세자르 3황자보다,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외모의 알렌 4황자보다, 항상 더 많은 주목을 받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존재다.
기존에 마법사들이 갖고 있던 상식과 한계를 전부 부수고 태어난 천재 마법사로서 최연소 마탑주가 된 것이 그러했고, 수많은 전장에서 그가 보여줬던 압도적이며 경이로운 무력과 그 힘이 이끌어낸 승리가 그러했다. 거기에 유리 황녀가 말했던 것처럼 무서울 만큼 수려하고 잘난 외모까지 더해진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인간의 영혼을 탐내고 홀리는 악마가 있다면 그와 같은 외모를 하고 있을 것이라 했다. 영혼을 건 계약마저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존재라면, 필시 그와 같은 모습이리라.
눈앞에 있는 남자는 굳이 황족이 아니더라도, 존재 그 자체가 온통 비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반드시 어느 이야기 속에서든 주인공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것만 같은 존재.
원래라면 감히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도 못할 존재의 연이은 등장에 나는 그야말로 현실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나는 아직 무의식 속을 헤매고 있고, 3일 전부터 줄곧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우선,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전에 연락도 없이 불쑥 이렇게 찾아온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부디 거절하지 않고 제 대화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게는 존재 자체가 전설 속의 인물처럼 느껴지는 상대는 생각보다 더 진중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었다. 나 같은 사람이야 그가 부르기만 하면 어디든 불평 없이 달려가야 하는 힘없는 귀족에 불과한데 말이다. 황족인 그가 몇 번이나 사죄의 말을 할 가치조차 없는.
“아뇨, 전하께서 그리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 괜찮으니, 그보다는 급하게 하실 말씀이라는 걸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대충 오늘 그의 방문이 3일 전 나를 찾아왔던 어린 남매와 관련이 있다는 데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굳이 그가 나를 직접 찾아올 만한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