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말썽꾸러기들의 계략 (1)
반쪽짜리 귀족, 헤더 자작가의 이름 없는 영애.
대부분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터다. 「클레어 헤더」라는 내 이름 따윈 기억해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뭐, 사실이 그렇기도 했고.
20년 전, 헤더 자작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던 내 아버지는 가난한 평민이었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돈도 권력도 뭣도 없어도 귀족은 귀족. 거기에 내 아버지는 누가 뭐래도 헤더 자작가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다.
당연히 가문에선 두 사람의 사이를 반대했다. 아버지는 둘을 억지로 떨어뜨려 놓으려는 가문에 반발해 무작정 뛰쳐나와 내 어머니와 둘만의 식을 올리고 가정을 꾸렸다.
아버지가 가진 능력을 놓칠 수 없어 사람을 풀어 찾으려는 가문의 눈길을 피해 긴 시간 죄인처럼 숨어 살았다고 한다. 수도와 멀리 떨어진 지방의 작은 마을의, 산지기가 버리고 간 낡은 오두막에서.
낡고 추운 오두막에서 덜덜 떨며 서로 꼭 끌어안고, 먹을 게 없어 배를 곯아도, 두 사람은 행복했다고 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대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두 사람 다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내게 말했던 기억이 났다.
두 사람이 둘만의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기 시작한 그 해 겨울 내가 태어나고, 아마 내가 여덟 살이 될 무렵까지는 셋 다 나름 행복하게 지내왔던 것 같다. 나는 어렸던 터라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도 내 부모님은 항상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고, 나도 그런 부모님을 보며 행복했던 감정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여덟 살이 되던 해에 먹을 걸 구해오겠다던 아버지가 하루가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런 아버지를 찾아 잠깐 나갔다 오겠다던 어머니마저 돌아오지 않으면서 모든 게 끝나고 말았다.
무척 춥고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잠깐만 나갔다 돌아오겠다던 어머니도 돌아오지 않고, 해가 뜨고 지기를 세 번쯤 반복한 어느 날이었다. 먹을 건 일찌감치 떨어졌고, 벽난로의 불도 꺼진 지 오래였다. 배고픔과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눈을 쉽게 뜨지 못했다.
“진짜 구역질 나는군. 잘난 듯이 뛰쳐나가더니 고작 이따위로 살려고 그랬던가.”
여자의 음성이었지만 어머니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나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나이가 든 것 같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떠서 상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미 의식마저 가물가물한 상태였기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건 또 뭐야?”
누군가 문가를 지나 내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내 이마를 툭 치듯 건드리는 게 느껴졌다.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인데. 일으켜 세워봐.”
여자의 명령에 또 다른 사람의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내 팔을 양옆에서 잡고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힘겹게 눈을 떠서 눈앞의 상대를 확인했다.
눈앞에는 내 아버지와 무척 닮은 여자가 있었다. 조금 더 인상이 날카롭고, 주름이 많은 얼굴이었지만 신기할 정도로 내 아버지와 많은 닮은 얼굴이었다. 그 여자는 상품을 품평하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제 아비와 꼭 닮았네.”
그러고는 더 이상 내게 관심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나를 들어올렸던 사람들도 내 팔을 놓아주었다. 나는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힘없이 스르륵 주저앉았다.
“지금쯤이면 오른손을 거의 못 쓸 텐데 이건 다 그 전에 그려둔 건가.”
여자는 낡은 오두막의 벽 여기저기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캔버스 하나 살 돈도 없어서.”
“여기 쓸만한 것도 있는데요.”
여자의 일행인 듯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한쪽 구석에 세워져 있던 캔버스들을 가리켰다. 남자가 지저분한 천을 걷어내자 쌓여있던 먼지가 날렸다.
여자는 불쾌한 듯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가 먼지가 조금 가라앉자 캔버스 쪽으로 걸어가 그림들을 확인했다. 시종일관 서늘하게 굳어있던 여자의 표정이 그제야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캔버스를 전부 확인한 여자는 눈에 띄게 기쁜 얼굴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예전에 비하면 형편없지만 이 정도라도 그릴 수 있는 거면 아직 가치는 충분해.”
여자는 캔버스를 아주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매만졌다.
“둘 다 지금은 집을 비운 모양이니 돌아오는 대로 억지로라도 끌고 가. 아니면 저걸 미끼로 써도 좋고.”
여자의 명령에 남자들 중 하나가 다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이, 아가야. 눈 좀 떠봐라.”
남자가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내 뺨을 툭툭 가볍게 쳤다.
“엄마 아빠는 어디 갔냐.”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다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안 와. 엄마 아빠.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아직 안 와.”
남자의 미간이 구겨졌다.
“얘 좀 오락가락 하는 모양인데요?”
“비켜.”
이번엔 여자가 직접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네 부모 어디 갔어?”
“몰라.”
짜악! 여자의 손이 날아와 내 뺨을 때렸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정도의 충격에 나는 크게 휘청였다. 뺨이 너무 아프고, 갑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무섭고 겁이 났다. 나는 잔뜩 움츠러든 채 겨우 눈을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이제야 내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빙긋 웃었다.
“윗사람에게는 존댓말을 쓰는 거다.”
아파. 뺨이 너무 아파. 존댓말이 뭐지. 겨우 다섯 살이었던 나는 여자가 하는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고 그저 겁에 질려 있었다.
“네 부모가 지금 어디 있는지 말해.”
“몰라, 몰라. 레나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여자가 또 나를 때릴까 무서워 고개를 저으며 다급히 대답했다.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것 같진 않은데요. 혹시 애를 두고 가버린 거 아닙니까?”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
아니야, 아빠도 엄마도 분명히 돌아온다고 했어. 레나를 두고 가지 않아.
낯선 여자와 남자가 주고 받는 대화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또 뺨을 맞을까 봐 너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가, 고개 들어봐.”
나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저 그림들을 그릴 때 네 아빠가 어느 손으로 그린 건지 봤니?”
여자의 손이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깜짝 놀라서 움찔 몸을 움츠리자 여자가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내 양손을 붙들어왔다.
“그러니까 이쪽 손인지, 아니면 이쪽 손으로 그렸는지 봤느냐고.”
여자는 내게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양손을 붙들린 채로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사람이 뭐라고 한 거지. 그림, 그림을 아빠가 어느 손으로 그린 거냐고. 대답, 대답을 빨리해야 해. 나는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여자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벙긋거렸다.
“아, 아빠가 그린 거 아니야.”
여자의 얼굴이 또 찌푸려졌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맞지 않기 위해 무슨 말이든 더 해야할 것 같아 여자가 묻지 않은 것까지 대답하고 말았다.
“레나가 그린 거야.”
“뭐?”
여자의 표정이 또 변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여자의 손이 내 손을 놓아주고 이번엔 내 어깨를 힘껏 붙들어왔다. 여자가 너무 세게 잡아서 어깨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지금 뭐라고 했냐고!”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겁에 질려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 여자의 말에 대답했다.
“레, 레나가 그린 거야. 저 그림들.”
여자가 잠시 잠잠해졌다. 여자의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는데, 여자가 방금 전과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을 하는 거면 또 뺨을 맞을 줄 알아라.”
“거짓말 아, 아니야. 진짜야. 레, 레나가 그린 거 맞아.”
어느새 눈물이 뚝뚝 흘렀다. 여자는 너무 무섭고,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게 억울하고, 또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엄마와 아빠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여자는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붙잡고 있던 내 어깨를 놓아주고 일어섰다. 여자의 움직임에 따라 움찔거리던 나는 어깨가 풀려나자마자 뒤로 주춤주춤 몸을 물렸다.
최대한 여자로부터 멀어지려는 내 움직임이 웃겼는지 여자가 그런 나를 보며 픽 웃었다.
“계획이 바뀌었다.”
여자는 남자들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다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가, 잘 들어라. 나는 네 할머님이고, 앞으로 함께 살게 될 사람이다. 네 할머니로서 네가 입을 것, 먹을 것, 배울 것, 모든 걸 책임질 생각이야. 넌 이제 이 지저분한 마굿간 같은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곳에서 나와 함께 지내게 될 거다.”
여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나는 작고 낡은 오두막에서 그보다 몇 배는 큰 저택으로 옮겨졌다. 나를 데리고 온 여자와 많이 닮은 남자와 음울한 인상의 여자, 그리고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맞이했다는 표현은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아도 그들 중 누구도 나를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들은 내 친척이었다. 내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내게는 숙부와 숙모, 사촌 남동생과 사촌 여동생이 되는 사람들.
“오늘부터 가족이 될 아이다. 인사하렴.”
가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마치 이 저택에 새로 들여온 가구와 같다고 생각했다. 혹은 예쁘고 멀쩡한 새 옷들 사이에 끼어있는 누더기 같기도 했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 애 이름은…….”
다시 나를 품평하듯 여자의 시선이 내게 떨어졌다. 분명 몇 번이고 그녀에게 내 이름을 말했던 것 같은데 여자는 내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에 내가 다시 내 이름을 말하려는 순간 여자가 말했다.
“클레어. 클레어 헤더가 좋겠구나.”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겠다며 나를 헤더 자작저로 데려왔을 때처럼, 퍽 다정하게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