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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갑작스러운 방문자들 (1/152)

00. 갑작스러운 방문자들

달그락 달그락.

조심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어린 탓인지 케이크를 뜨는 포크 소리가 제법 요란하게 울렸다. 조그만 손이 야무지게 쥐고 있는 포크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자니, 한순간 내가 어디서 무얼 하던 중인지도 잊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우리 오빠 어떠세요?”

이제부터 본론인데요, 하고 뜸을 들이다 꺼낸 화제치고는 어딘가 뜬금없고 이상하다.

갑자기 나타나선 「날씨가 좋네요, 헤더 영애는 자고 일어난 얼굴도 정말 아리따우시네요, 요즘 같은 날씨가 딱 결혼식 올리기 좋은데.」 같은 실없는 얘기만 꺼내다 뜬금없이 제 오빠가 어떠냐니. 맥락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니, 뜬금없고 이상한 건 이 황녀의 등장 자체부터가 그런가.

나는 이른 아침부터 완벽한 차림새로 눈앞에 앉아 있는 금발의 소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유리 크리스틴 카지스.

카지스 제국의 사람이라면 결코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다. 올해 열여섯의 나이로, 사교계의 다음 대 꽃으로 불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소녀는 황실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이 나라의 하나뿐인 황녀다.

본인의 아름다운 외모도 외모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 냉혹하기로 유명했던 황제를 아내 바보에서 딸 바보로 만든 막내딸이라는 타이틀로 더 화제의 중심이 되었던 소녀였다. 지금은 그 밑으로 또 동생이 생기는 바람에 막내 자리는 빼앗겼다고 들었으나, 여전히 그녀는 여러모로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를 쫓아다니며 구애하는 에젠탈 왕국의 왕태자도 그렇고, 그녀의 말이라면 죽은 시늉도 한다는 오라버니들의 존재도 그렇고. 그녀 본인도, 그녀의 주변도 항상 화려한 사람들로 가득한 탓이었다.

금발에 금안, 우수한 혈통을 증명하듯 희귀한 색과 뛰어난 미색을 드러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여전히 의문을 가득 담긴 시선을 던졌다.

오늘 아침 나는 갑작스레 이 일면식도 없는 황녀로부터의 방문을 받았다.

평소엔 나를 벌레 보듯 하는 헤더 자작부인이 내 방에 뛰쳐 들어와 네가 어떻게 황녀 전하와 친분이 있는 거냐며 호들갑스럽게 굴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그에 내가 나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니, 옷을 채 갖춰 입기도 나를 응접실로 떠밀던 다급한 손길도.

감히 황녀 전하를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며, 머리를 빗을 여유조차 받지 못한 채 응접실로 강제 소환된 나는 내심 긴장한 채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녀와 함께 방문한 또 한 명의 귀여운 손님에게도.

다행히 그녀는 화려하고 도도한 인상의 외모와 달리, 소탈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의외로 그녀 쪽이 더 긴장해선 어버버 인사를 하는 모습이 귀여워 덕분에 긴장이 많이 풀려 편안한 분위기가 흐르던 것도 잠시였다.

유리 황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나는 혼란과 의문이 뒤섞인 시선을 그녀에게 보냈다.

“그게요. 우리 둘째 오빠가 진짜 괜찮거든요. 얼굴 개존잘……이 아니고, 엄청 잘생겼고! 키도 크고, 어깨 떡 벌어지고, 몸 진짜 좋고! 대충 들어서 아시겠지만 능력도 짱짱하고요!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서 연애 경험도 없고 무뚝뚝한 게 조금 걱정이긴 한데, 결혼하면 아내 외에 다른 여자한테는 눈길도 안 주고 잘할 거예요! 거기다 집안도 어디 견줄 데 없이 최고죠! 무려 황가니까요! 후작가고 공작가고 다 갖다 붙여도 상대가 안 되죠!”

뜬금없이 내 앞에 나타난 것처럼 뜬금없이 제 오라버니 자랑을 시작한 그녀를 나는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대체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가중되는 혼란 속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쪽을 봐주시죠!”

한참을 이어지던 오라버니 자랑이 겨우 끝났나 했더니 이번엔 그녀가 팔을 쫙 펼쳐 제 옆자리를 가리켰다.

무심코 그녀가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가져가자, 아까부터 열심히 포크로 케이크를 떠먹고 있던 귀여운 방문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눈을 맞춰왔다.

누가 봐도 황녀의 동생이 분명한 외모의 어린 황자가 호다닥 포크를 내려놓고는 다시 한번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형슈님. 잘 부탁드림미다!”

이미 제 누나와 사전에 다 얘기가 된 것인지, 어째 처음 인사할 때와는 호칭이 많이 달라져 있다.

형수님이라니……?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호칭이 당혹스러우면서도, 분홍빛 뺨 가득한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말하는 아이가 너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살짝 지어졌다.

저 같은 것에게 존대를 하실 필요 없습니다, 라는 조심스러운 지적은 둘 다에게 처음부터 했었다. 돌아온 답변은 곧 저희 형님과 결혼하실 분이니 미리 존대하겠습니다, 였다.

당혹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으나, 내게는 이 상황 자체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아예 뭔가를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포기해버린 나였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네, 저도 정말 반가워요. 황자 전하.” 하고 대답해주자, 기쁜 듯 더 활짝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사랑스러워 걱정이었다.

만지면 정말 부드러울 것 같은 금색 머리칼에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외모, 꼭 끌어안고 싶은 자그마한 몸, 수줍게 웃으며 시선을 맞춰오는 커다란 눈동자를 냉정히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내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본 걸까. 왠지 아까보다 훨씬 자신만만해진 유리 황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올해 5살의 우리 황실 늦둥이 막내 알렌입니다. 우리 오빠랑 결혼해주시면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도련님이랑 매일 티타임도 가능하십니다.”

유리 황녀는 회심의 일격이라도 날리는 듯한 표정으로 당당히 외쳤고, 나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눈빛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네?”

차마 뒤에 덧붙이지는 못한 「제가…… 왜요?」가 무사히 전해졌던 걸까. 순간 그녀가 나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어, 어? 벼,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었나요?”

“아뇨, 그…… 무척 매력적이긴 한데요…….”

내가 거절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걸까, 지나치게 당황해하는 그녀로 인해 나까지 당혹스러워졌다.

“저와 2황자 전하 사이에 어째서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저는 이해가 잘 안 가서요.”

정확히는 「나 같은 것과 왜 하필」이라는 말까지 들어가야 했으나, 그렇게까지 말하기엔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해지는 기분이라 애써 삼켰다.

그렇지 않은가.

이름도 없는 자작가의 영애와 제국 황실의 적통 황자의 결혼이라니. 현실적으로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차이가 심해도 너무 심했다. 이건 허구의 소설이라도 너무 과한 설정이라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다.

나는 정확히 그런 부분을 짚은 것이었는데, 유리 황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 그거라면!”

그녀는 도리어 그런 거라면 전혀 문제없다는 듯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외쳤다.

“우리 오빠가 아직도 장가를 못 간 노총각이기 때문이죠!”

그 노총각이 올해 23세의 제국의 적통 황자이며, 천재라 불리는 마법사로서 최연소 마탑주가 된 인물이며, 제국의 모든 귀족 여성들이 꿈꾸는 신랑감이라는 수식어는 왜 빼시나요.

“그리고 저는 헤더 영애가 꼭 제 새언니가 되어주셨으면 하고요! 물론 여기 제 동생 알렌도요!”

“네, 넷! 여기 알렌두요!”

말 끝에 유리 황녀가 팔을 툭 치자, 다시 케이크에 집중하던 어린 황자 전하가 화들짝 놀라며 덩달아 외쳤다.

그 모습이 퍽 귀엽긴 했지만, 왠지 머리가 아파 왔다.

묘하게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거기에 2황자 전하의 의견도 들어있나요?”

“오빠 의견은 필요 없습니다. 헤더 영애만 허락해주시면 됩니다!”

“댐미다!”

필요 없다, 즉 동의를 구한 건 아니란 뜻이었다.

더더욱 의문이 커졌다.

당사자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대단한 가문의 여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소에 눈앞의 남매와 특별한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닌데…….

대체 이 남매는 왜 내게 와서 이러는 것일까.

‘어디선가 내 소문이라도 들은 건가?’

내가 만만해 보이니, 애들이 장난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지루하고 권태로운 황실 생활에 이 어린 남매가 갖고 놀기 만만한 장난감을 찾고 있는 거라면……. 불쾌하지만, 차라리 그쪽이 더 말이 되는 듯했다.

지켜보고 있으면 귀엽긴 하겠으나, 지금은 이런 애들 장난에 어울려줄 기분이 아니었다.

“황녀 전하, 황자 전하.”

나는 부러 웃음기 하나 없이 가라앉은 표정과 목소리로 두 사람을 불렀다.

어둡게 변한 내 얼굴을 보고는 눈치를 보듯 불안한 표정을 짓는 게 안쓰러웠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이렇게 방문해주신 건 정말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황실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2황자 전하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단호히 내 의사를 전하고는 앉아있던 티 테이블 의자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오늘 들은 얘긴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이렇게 내 의사를 말한다는 것 자체가 참 우스웠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이런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어디 감히 나 같은 사람이 황실 적통의 황자와 결혼을 논하고, 그걸 거절한다는 상황을 상상이나 해본 적 있겠는가.

어쨌든 다행히 남매에게는 내 단호한 거절 의사가 통했던 모양이다. 시무룩해져선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너무 냉정하게 말했던가 내심 후회도 됐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끝까지 웃지도 않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여기서 받아주면 또다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며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흑흑, 나 포기 안 할 거야.”

“누님, 우지 마요. 알렌이 이짜나요.”

대체 왜 저러는 걸까 이해가 안 되면서도, 열한 살이나 어린 동생의 위로를 받으며 터덜터덜 걸어가는 유리 황녀의 짠한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열한 살이나 많은 누나의 등을 토닥여주는 어린 황자의 작고 사랑스러운 손도.

며칠 동안 틈만 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사람의 막강한 존재감이 정말이지 곤란했다. 그래도 덕분에 또 다른 한 사람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조금은 상냥하게 말해줄 걸 그랬나. 상처받은 건 아니겠지. 다신 만날 일도 없는 상대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황녀 전하가 널 왜 찾아온 거냐,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냐. 닦달해대는 헤더 자작부인에게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는데 시간을 써야 하는 것에 대한 성가심은 둘째치고서라도 말이다.

어떻게든 다른 곳에 정신을 두려, 오랫동안 내려놓았던 붓을 억지로 쥔 3일째의 아침이었다.

“미리 방문 의사를 묻지도 않고 불쑥 찾아와 죄송합니다. 사태가 너무 심각한지라 시간을 지체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온통 내 머릿속을 장악해버린 두 남매가 나타났을 때처럼.

“잠깐 대화를 나눌 시간을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정확히 이틀 뒤, 당사자가 직접 찾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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