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마의 예상과 달리 결혼은 무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맞선을 끝내고 난 뒤에도, 칼리마는 자신의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걸 체감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별말이 없었고, 기사단에서는 평소와 같은 칼리마 경이었다.
그녀가 달라진 것을 체감한 것은 맞선 이후 일주일 뒤, 루크 공작가에 과자를 들고 방문했을 때였다.
그사이 뜨개질 솜씨가 더 늘어서 이제는 예술 작품에 가까운 곰 인형을 만들고 있던 에델이 싱긋 웃으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신혼집은 저희 옆집으로 정했어요.”
신혼집이라니. 그리고 옆집이라니.
‘일주일 만에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들으면 한 반년은 지난 줄 알겠다. 심지어 부모도 관심 없는 신혼집을 에델이 챙기고 있다니.
차를 뿜을 뻔했던 칼리마는 가까스로 차를 삼켰다. 그리고 당분간 에델과 차는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투덜거렸다.
“……사실 저를 결혼시키려고 가장 안달 나 있던 사람은 마님이었던 걸까요?”
“아닛! 어찌 그런 오해를! 저는 칼리마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해서 옆집으로 정한 건데.”
에델은 격하게 부정했지만, 이미 칼리마의 마음에는 의심이 싹텄다.
‘처음부터 테오도르 오라버니의 사주를 받았던 거지.’
테오도르와 에델은 이상할 정도로 죽이 잘 맞았다. 황제의 심복으로 급부상한 에델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인사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출산휴가에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들도 있었다.
‘내가 설마 호랑이 새끼를 보호하고 있었나!’
평민 출신의 평범한 아가씨라서 걱정된다더니, 알고 보니 루크 공작가의 적통에 행정 실무에도 정통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에델을 응시하고 있으니 에델이 울상을 짓고 말했다.
“진짜로 아니에요. 사실은 집 자체는 더 전에 샀다고요. 등기필증 보여 드릴까요?”
“마님께서 집을 왜 사시는데요? 곧 태어나는 아기에게 주려고요?”
그것도 그럴듯했다. 자식이라도 독립은 필요하니 가까운 곳에 두는 게 좋겠지.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칼리마가 가까이 살았으면 해서 알아보고 있었던 거라고요!”
“……저요?”
칼리마는 깜짝 놀랐다. 에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마가 혹시나 독립하고 싶을 때…… 내가 살던 집은 너무 작으니까, 칼리마가 지낼 만한 곳으로 미리 알아봤을 뿐이에요.”
“세상에.”
자신을 위해서 집을 알아보고 미리 준비해 주다니!
“만약 결혼 생활을 하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우리 집으로 달려와요. 제가 칼리마의 결혼을 막아 주진 못했지만, 힘들 때 함께해 줄 순 있어요.”
“마님! 역시 마님을 제일 사랑해요!”
“계속 의심했으면서.”
“아니에요! 사랑해요!”
칼리마는 에델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속으로 에델을 아내로 맞은 행운아를 떠올렸다.
‘하여간 단장님은 운도 좋다니까.’
결국 이런 아내를 맞이한 세루리안이 승자였다. 칼리마가 두 사람의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짧게 웃었을 때였다.
“칼리마가 보기에 마르셀 왕자님은 어땠어요?”
“네?”
찻잔을 내려놓기를 잘했다. 안 그랬으면 당황해서 지금 차를 엎질렀을 것이다.
‘바깥어른이라고 불렸지.’
어떤 해프닝이 있었는지 에델은 모를 테니, 죄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칼리마는 살짝 눈을 찌푸리며 애매한 대답을 내놓았다.
“……조금 독특한 사람이랄까?”
“어머, 박한 표현이네요. 저와는 다르게 봤군요.”
“네? 에델은 어땠는데요?”
칼리마와 달리, 에델의 평은 무척이나 후했다.
“마르셀 왕자님은 그 나이대 소년답지 않게 차분하고 상냥한 분이시더군요. 제게는 아기 침대에 대한 새롭고 중요한 조언을 해 주셨답니다.”
아기 침대라니. 기가 막혀서 칼리마는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 언제 그렇게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어요?”
“신혼집 가구를 고르면서 이야기했지요. 아무리 급하게 사들이는 거라고 해도 사용할 당사자의 마음에는 들어야 할 거 아닌가요.”
“그럼 왕자님은 신혼집도 알고, 신혼집에 들어간 가구도 안다는 건가요? ……왜 저는 안 불렀는데요?”
“칼리마는 귀찮아할 거 같아서요. 집이라면 황궁 정원에 텐트 치고 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잖아요.”
“윽.”
칼리마는 에델의 무시무시한 통찰력에 놀라고 말았다. 실제로도 반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다.
‘그래도 아기 침대라니. 그렇게 딱딱하고 무기력해 보이던 남자가 무슨 조언을 했다는 걸까.’
칼리마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에델을 보니 마르셀과의 대화가 즐거웠던 모양인데, 참 억울한 일이었다.
“나랑은 대화가 하나도 안 통했는데. 다른 나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보니 사실 투덜거릴 일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다른 나라 사람이 맞으니 말이다.
에델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원래 직업상 누구하고든 잘 친해져요. 애초에 그런 거 못 하면 취재를 할 수가 없지요.”
“그래도 어쩐지 억울하네요.”
뭐가 억울한지도 모르면서 에델은 억울해했다. 그런 칼리마를 보며 에델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호감이군요. 곧 사랑이 되겠어요.”
“이제 와서 보니 이 사람이 적이었네! 마님이 적이었어!”
얼렁뚱땅 세기의 사랑으로 몰아가는 에델에게 칼리마가 엄지를 바닥으로 향하며 야유했다.
에델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칼리마는 뚱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결국 제 결혼은 마님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거네요. 저희 아버지는 별말씀 없으셨어요?”
아예 말도 없이 진행 중이진 않겠지. 설마설마하면서 물은 것이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또 파격적이었다.
“그럼요. 포텐샤 공작님도 제 진심을 알아주시고 어제 제게 그간 오해해서 미안했다고 사과하셨답니다.”
“네? 아버지가요?”
바로 얼마 전까지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더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응시했더니, 에델은 배시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하고는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말이 통한다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신 거예요? 각하라도 파셨어요?”
폴 루크의 약점이라도 폭로한 것이 아니고서야, 저런 태세 전환이 불가능한데 말이다.
칼리마가 얼른 이야기해 보라는 뜻으로 재촉하니, 에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그렇게 되어서! 칼리마의 결혼식도 제가 준비하기로 했어요. 제가 출산하기 전 마지막으로 맡는 일이 되겠군요.”
“저기요, 설마 결혼식 날짜가 정해져 있는 건…….”
“네. 정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소식이에요. 다음 달 말일이랍니다. 왕자님을 모시고 온 루스 왕국의 사절단도 참석해야 하니까요.”
“다음 달?”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웃음만 나왔다. 칼리마는 마른세수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진행되는군요.”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자는 루스 왕국의 요청과 황제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에델의 배후에 결국 황제가 있다는 소리였다. 칼리마는 팔짱을 꼈다. 시근거리고 있으니,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델의 배에 닿았다. 부푼 배가 무거워 보였다.
“마님은 괜찮으시겠어요?”
그러자 에델은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결혼식 전반을 준비하는 건 아니니까요. 식장을 꾸미는 것과 신혼집 정하는 정도가 제 일이고, 다른 일은 포텐샤 부인께서 하실 거예요.”
“식장을 꾸미는 게 큰일이잖아요.”
“신부가 별로 예민하지 않아서 괜찮아요.”
“갑자기 예민해지고 싶네요.”
결혼식이 언제고 신혼집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신부가 별말을 다 한다.
에델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더니 세루리안이 얼굴을 내밀었다.
“세루리안.”
“여기 있다는 말을 듣고 왔습니다.”
세루리안은 저벅저벅 걸어와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칼리마가 눈썹을 휘며 손을 흔들었다.
“저기요, 저도 여기 있거든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인사를 하란 말이지. 칼리마는 팔짱을 끼고 세루리안을 흘겨보았다. 세루리안은 딱딱한 얼굴로 칼리마를 타박했다.
“어째서 내 부인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냐?”
“이, 이 사람 좀 봐! 지금 누구 덕분에 그 부인하고 결혼했는지 아세요?”
사람이 들어갈 때 마음과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이렇게 자신을 타박할 수가 있는 건가.
칼리마가 큰 소리로 그 부분을 따지니, 세루리안은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에델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 봐라. 우리 아내는 쉬어야 한다.”
“저 온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내가 아내를 본 시간보다 훨씬 많이 보았지 않나.”
“단장님이 이제 퇴근했으니까 그렇지요! 억울하면 일도 그만두시던가!”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칼리마!”
칼리마의 도발에 에델은 정말로 세루리안이 사표 내고 돌아올까 봐, 기겁하고 말렸다.
어쨌든 세루리안이 돌아온 집에 더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칼리마는 폴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일을 챙겨 주시는 건 고마워요, 마님. 하지만 앞으로 저한테 귀띔은 해 주세요.”
“그렇게 할게요.”
차분히 대답하는 에델을 보며 칼리마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델이 무슨 죄람. 사실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오라버니가 문제이지.’
결혼만 아니면 루크 공작가와 가까운 저택을 선물 받고 에델에게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건네며 충성을 맹세했을 텐데 말이다.
‘결국 그게 신혼집이 되다니. 모처럼 에델이 날 생각해 준 건데 말이야.’
칼리마는 속으로 테오도르에 대해 욕을 한 바가지 퍼부은 뒤, 돌아섰다.
“그럼 자주 찾아올게요.”
칼리마의 배웅을 나온 에델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왕자님은 먼저 신혼집에 들어가 사실 거라고 했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방문하세요.”
‘그 사람은 또 왜 그런대.’
칼리마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황실에서 어련히 극진히 대우할까.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굳이 빈집에서 지내는 이유를 모르겠다.
‘황궁이 불편한가? 생활하기엔 그쪽에서 지내는 편이 훨씬 괜찮을 텐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칼리마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을 때였다. 에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외국에서 혼자 지내는 건 외로우실 테니까요.”
어쩐지 등을 떠미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 * *
결국 칼리마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신혼집, 루크 공작가의 바로 옆에 있는 저택에 찾아갔다.
‘용케 이런 곳이 있었네.’
연한 푸른색으로 칠해진 저택은 우아하면서도 이국적이었다. 루스 왕국의 사절단 전체가 여기 머무는가 했더니, 왕자 혼자 머무는지 저택에는 일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내 집인데 내 집 아닌 내 집 같은 느낌으로 들어서니, 1층 테라스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남자가 보였다. 하녀를 따라가다 말고 걸음을 멈춘 칼리마는 테라스 난간에 턱을 괴고 마르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군요, 왕자님.”
마르셀은 둔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칼리마를 보고도 놀란 기색도 없이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