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네린느가 그동안의 악행으로 인해 처벌을 받은 것은 합당한 결과였고, 그로 인해 테오도르는 청렴하고 공정한 황제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상황제가 결단력은 있었으나, 욕심이 많고 지나치게 제멋대로였다는 평을 받는 것과 대조적이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혼인 시장에서 형제들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것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아바마마의 이미지를 망쳤으니, 자연스럽게 내 형제들의 이미지까지 떨어진 거지.’
정확히는 다른 남자의 자식을 임신해 와서 바꿔치기까지 한 바네린느의 일탈이 귀족 사회에 큰 충격을 준 것이었다.
외교적 수완이 아무리 훌륭해도 혼인이나 혈연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관계가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 나라 루스, 마르틴 같은 곳이 그러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이 내 형제들과는 혼인하지 않겠다고 거절하고 있으니.’
형제가 안 된다고 해도 아예 답이 없는 건 아니었다. 테오도르 황제는 젊었고, 그의 소생인 황자, 황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황족의 혼인은 보통 8세 전후로 정해지기 때문에, 황자와 황녀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해도 혼사를 치르기에 지나치게 이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수가 문제였다.
‘함부로 혼인시키는 건 곤란해. 일단 내 소생의 자녀가 몇이나 될지 모르는걸.’
상황제는 정력적인 사람이었다. 황후 말고도 수많은 정부와 애인이 있었다.
상황제와 반대 노선을 타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있는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아내를 많이 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 보니 황자와 황녀의 수가 한정적일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추론이었다.
‘다른 곳이야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미룰 수 있다고 해도, 루스 왕국과의 동맹은 시급한데.’
루스 왕국은 왕국대로 현재 왕위 다툼 중이었고, 가장 유력한 후보인 왕세자는 제국의 힘을 빌리고 싶어 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이런 서신까지 보냈을 정도였다.
<제 아우를 데릴사위로 데려가셔도 됩니다!>
다른 유력한 왕자를 혼인을 핑계로 제국에 보내 버릴 수 있고, 자신은 제국과의 친교를 돈독히 할 수 있는 교묘한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 아우라는 사람도 나이가 꽤 있을 거 아닌가.’
아무리 나이를 적게 잡아도 왕세자가 스물넷이니, 그 아우는 십 대 후반일 터.
‘내 딸이랑 열 살도 넘게 차이 나잖아. 그게 뭐냐고.’
이대로라면 데릴사위가 아기 부인을 키우는 상황이 될 것이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한단 말인가.
끙끙거리며 고심한 끝에 테오도르 황제는 과감하게 제 사촌들에게로 눈을 돌리기로 했다. 기왕이면 염문설이 없고, 가문이 좋은 영애로.
그 물망에 칼리마가 오른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제는 활짝 웃으면서 칼리마에게 혼처를 권했다.
“내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여, 내가 그대의 남편감을 구해 왔노라!”
* * *
사정을 모두 들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었다. 칼리마는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글쎄 저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대요.”
“아슬아슬하게 결혼 적령기군요.”
“그걸 적령기라고 할 수 있나요!”
성인이기만 하면 적령기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칼리마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제가 그런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는 싫다니까, 뭐라시는 줄 아세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칼리마는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대세는 연하남이래요.”
“……폐하다운 말씀이네요.”
황궁에만 계시는 분이 대세가 뭔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무 생각 없이 하신 말이겠지.’
하지만 저 말을 위로랍시고 듣고 온 칼리마의 마음도 이해는 되었다. 나 같아도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뭐, 객관적으로 나쁘진 않은데.’
왕족이니 집안 좋고, 여권이 더 강한 루스 왕국 출신이니 공작 영애인 칼리마가 기사단에서 복무하는 것에도 별로 편견이 없을 테고 말이다.
그리고 나는 칼리마가 알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었다.
‘엘머스 경보다는 훨씬 나은 혼처야.’
현재 포텐샤 공작가로 내무부의 엘머스 경이 청혼서를 넣었다는 걸 말이다.
엘머스 경은 젊은 야심가로, 동족 혐오처럼 테오도르는 그를 싫어했다. 그래서 나를 이용해서 엘머스 경을 견제하고 있었는데, 그 견제에 지친 엘머스 경이 생각해 낸 돌파구가 바로 칼리마와의 혼인이었다.
‘그 청혼에 포텐샤 공작님은 굉장히 호의적이었고 말이지.’
포텐샤 공작은 애초에 정쟁에 별 관심이 없고 칼리마의 결혼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으니 쌍수를 들고 환영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 적령기가 지나가는 딸에게, 좋은 집안, 멀쩡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관료가 청혼해 왔으니 마지막 기회처럼 보였겠지.
‘하지만 황제 폐하께 미운털이 박혔으니, 엘머스 경의 부인이 되면 괴로운 일이 많을 거라고.’
엘머스 경과 아직 이름을 모르는 루스 왕국의 왕자를 두고 저울질하면 차라리 저쪽이 나았다.
내가 팔짱을 끼고 흐음, 소리를 내었을 때였다. 칼리마는 어울리지 않게 도리질을 치며 떼를 썼다.
“저는 아직 아기예요. 결혼하기에는 이르다고요.”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란 말인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기 입으로 그 말을 하면 찔리지 않나요?”
“인간은 언제 어른이 되는데요?”
“그거야 물론 정해진 때는 없죠.”
“그러니까 저는 아기예요. 제가 그렇게 정했다고요.”
“어휴.”
아무래도 결혼 스트레스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내가 안쓰러운 눈으로 칼리마를 바라보고 있으니, 칼리마가 내 손을 꽉 붙들고 말했다.
“제가 마님의 결혼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 않습니까. 마님께서도 저를 도와주세요. 제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마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요.”
“음.”
그건 사실이었다. 칼리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와 세루리안이 이렇게 순탄하게 혼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턱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이대로는 아무것도 해결이 되지 않아.’
포텐샤 공작은 불안할 때마다 우리 집에 하소연할 것이고, 황제도 이용 가치가 있는 칼리마를 포기하려 들지 않으리라.
나는 강경한 해결책을 꺼내 들었다.
“칼리마, 일단 이 결혼을 하는 게 좋겠어요.”
“네?!”
명쾌한 해결책을 기다리고 있던 칼리마는 내 말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도 아무 이유 없이 정략결혼을 권한 게 아니었다.
“잘 생각해 봐요. 벌써 얼마나 많은 날을 혼인으로 압박받으면서 보냈나요.”
“맞아요! 이제야 자유로워졌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는 오라버니가 그 난리라니.”
내 말에 칼리마는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렇죠!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또 결혼하라는 압박이 들어오잖아요. 이제는 생각을 바꿔야 할 때라고요. 칼리마의 인생에서 결혼은 떼어 낼 수 없다고 말이에요.”
내 말에 칼리마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먹였다.
“……그래서 포기하고 결혼하라고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이 세상에는 아주 좋은 제도가 있잖아요.”
나라고 무작정 결혼하라는 건 아니었다. 일종의 전술상 후퇴로 결혼을 택하라는 거였지. 나와 세루리안도 선택했던 왕도가 있지 않나.
바로.
“이혼이요.”
내 당당한 대답에, 칼리마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니까 일단 결혼하고 적당한 때를 봐서 이혼을 하라고요?”
“그렇죠.”
“허어.”
칼리마는 혀를 찼지만, 듣고 보니 아주 실현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녀가 현재 받고 있는 스트레스는, 이렇게 시달릴 바에야 차라리 이혼 경력 한 줄 남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극심했고 말이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칼리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왕자님 쪽에서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그건 왕자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지요. 아직 만나 보지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거야 그렇지만.”
하긴, 직접 만나기 전에는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타인의 마음은 읽을 수 없고,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칼리마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었다.
“아직 대화도 해 본 적 없는 사람을 덮어놓고 거절하다니, 그 또한 칼리마답지 않아요. 한번 이야기하고 조율해 봅시다. 상대도 외국인이니 이혼을 더 기껍게 여길 수도 있어요.”
“그렇죠. 그 사람도 자기 나라에 가서 살고 싶을 테니.”
잠시 고민하던 칼리마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만나 볼게요.”
그렇게, 칼리마의 맞선이 정해졌다.
* * *
‘으으, 내가 등을 떠밀었으니 완전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꽤 오래 찾아가지 않았던 황궁으로 직접 걸음 했다. 칼리마와 마르셀 왕자의 맞선 장소를 내가 직접 꾸미기로 자원해서 말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을 보는 게 인간의 도리.’
그리 생각하며 나는 최선을 다해서 두 사람의 맞선 자리 준비를 지휘했다. 황제 폐하께서 ‘역시 루크 공작!’이라고 감탄한 건 여담이다.
내가 한참 맞선 장소를 꾸미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도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 우리 딸이 저렇게 순순히 선 자리에 나와 앉았지?”
바로 포텐샤 공작이었다.
무슨 수는 무슨 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양식 있는 대화를 나누었죠.”
그러자 포텐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설마 정략적 결혼, 이런 걸 권한 건 아니겠지?”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