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애초에 내가 황궁까지 그를 마중 나온 것은, 요즘 그가 슬슬 내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너무 걱정되어서 그를 데리러 왔지.’
그리고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도 허심탄회하게 하려고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 잘 먹지 않았던 거였고, 아버지 말에 따르면 집안 내력이라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런데 완전 망했어.’
왜 수개월 동안 없었던 식욕이 하필 오늘 폭발했단 말인가. 그걸 못 먹어서 서러워 눈물까지 흘리고 말이다.
내가 입술을 내밀고 있으니, 세루리안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머쓱하게 물었다.
“제가 당신을 피하는 느낌이 들었습니까?”
“네. 정확히는 피한다기보다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듯한 느낌?”
“……정확하시군요.”
거짓말을 못 하는 남자는 순순히 나의 분석을 인정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차분해졌던 내 마음이 다시 파도처럼 출렁였다. 나는 세루리안을 추궁하듯 물었다.
“왜 그래요? 나 몰래 무슨 잘못을 했나요?”
“제 입으로 말하려니 심히 고통스럽군요.”
“도대체 뭔데 그래요?”
“…….”
세루리안은 고통스러운 표정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 남자가 이러는 거 보니까 어지간히 큰일인가 본데?’
잠시 세루리안의 흰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손가락을 두 개 펴 보였다.
“제가 현재 유통 가능한 금액은 2천 골드예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고 치면 2천 골드까지는 바로 해결 가능하니까 빨리 말하라는 거예요.”
내 말에 세루리안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반문했다.
“제가 금전적 사고를 칠 사람으로 보입니까?”
물론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에게 ‘반드시’라는 건 없지 않나.
“저도 제가 길바닥에서 길거리 음식 먹고 싶다고 서러워서 울 줄은 몰랐어요.”
“그리 말하니 또 매우 설득력이 있군요.”
울었던 때를 떠올리니 다시 뺨이 화끈거렸다. 나는 손바닥으로 내 얼굴에 부채질했다.
잠시 두 손을 모으고 꼼지락거리고 있던 세루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얼마 전 부하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애정이 지극한 남편 중에는 아내의 입덧을 대신 해 주는 남편도 있다더군요.”
“그래요? 저는 금시초문인데요?”
입덧을 대신 하다니 신묘하기도 하다.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한가? 사실 입덧은 산모와 태아 사이의 면역 충돌로 일어나는 거부반응이잖아?’
아이를 품고 있지 않은 아버지에게는 이론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증상인 것이다.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나는 설마, 하면서 입을 열었다.
“혹시 당신, 입덧을 대신 못 해 줘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
세루리안은 침묵했다. 이 경우에는 긍정의 표현이었다.
기가 막힌 이유에, 처음에는 입을 벌렸고, 그다음에는 웃음이 나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세루리안에게 물었다.
“당신, 이거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안 했죠?”
“네.”
“다행이에요. 팔불출이라고 온 세상에 광고할 뻔했네요.”
“제가 속은 겁니까?”
“당연하죠! 어디 소설 속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내가 가십지를 수년간 담당했어도, 남편이 대신 입덧했다는 사연은 없었다. 내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까딱하자, 세루리안이 여전히 눈살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그렇지만 여러 사람이 경험했다면 그건 가능하다는 뜻 아닙니까?”
“……진심으로 하는 말 아니죠? 이 세상에 완벽히 불가능한 일은 없어요. 아주아주 낮은 확률만 존재할 뿐이죠.”
0.0001% 같은 건 사실상 0%란 말이야! 그냥 표기만 그렇게 하는 거지.
입덧이 뭐라고. 고작 그런 이유로 며칠이나 마음고생을 했다니 내 속이 상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니, 그리고 애초에 저는 입덧을 하지 않았는걸요. 제가 해야지 대신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지만, 저는 속상합니다. 왜냐하면…….”
내 말에, 세루리안은 나와 고요히 시선을 맞추었다. 마차 안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의 눈동자는 짙은 바닷물처럼 보였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조곤조곤한 어조로 다섯 글자에 불과했던 사랑 고백을 더 길게 늘어놓았다.
“제 인생을 당신의 꿈을 이루는 데 고스란히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힘들 때 당신의 곁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고, 당신이 행복할 때 가장 먼저 웃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진솔하면서도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고백에, 고백이 진행될수록 내 얼굴도 점점 달아올랐다. 세루리안은 그런 내 속을 꿰뚫어 보듯 진지하게 나를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그 마음을 당신에게 전할 길이 없어서…….”
“그만요, 그만!”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세루리안의 입을 막았다. 세루리안은 왜 자신의 입을 막냐는 듯이 눈을 두 번 깜빡거렸다. 나는 빨간 얼굴로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제발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낯간지러운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그가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넘치는 사랑에 어쩔 줄 몰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열렬하게 사랑 고백까지 늘어놓고 있었다.
‘심장이 터지겠어.’
이러다가 빈맥증 걸리면 책임질 거냐고요.
“에델.”
세루리안은 가벼운 손길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내 손을 밀어냈다. 다시 고백이 시작될 거 같아서, 나는 그의 두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입덧 같은 거 대신 하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요.”
“어떻게 말입니까?”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애 같은 모습에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가 세루리안이 나를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까?
“그야 저도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가 내 힘이 되어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나 또한 그의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늘 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매일 그를 바라보는데, 그의 마음을 모를 리가 있나.
내 짧은 대답에, 세루리안의 눈동자가 파르르 흔들렸다. 잠시 내 두 손을 마주 잡고 가만히 있던 세루리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그의 말에 나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더한 것도 해도 될 거 같은데요?”
“마차 안입니다.”
“집까지 천천히 돌아서 가라고 하지요.”
나는 손가락을 세루리안의 턱에 대었다. 그의 목울대가 순간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유혹하는 아내, 싫으세요?”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제게는 언제나 최고의 유혹입니다.”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맞춰 오는 입술이 뜨거웠다. 마치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다급하게 입을 맞춰 오면서도, 내 등을 받쳐 주는 손길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이 사람은 알까? 자기가 이렇게 손짓 하나하나 다 조심스럽다는 걸.’
굳이 드러내어 무엇인가 할 필요는 없다. 그의 모든 것이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내게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좁은 마차 안에서,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발목에 입을 맞췄다. 잔 입맞춤을 피부에 발자국처럼 남기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몸, 어디에서든 단내가 납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헝클어뜨린 금빛 머리카락 때문에 그가 평소보다 더 육감적으로 보였다.
최근 아기를 생각해서 애정 표현을 삼갔던 탓인지, 한 번 불이 붙으니 계속 그의 품에 안겨만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돌아갔음에도 마차는 해가 지기 전 다시 루크 공작가에 도착했다.
감각이 예민한 세루리안은 마부가 도착을 알리기도 전에 나를 끌어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마중 나온 집사와 말 한마디 섞을 틈도 없이 곧장 우리는 다시 부부 침실에 틀어박혔다. 저녁 식사도 필요 없었다. 지금 내가 채우고 싶은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부드럽게 누워서 서로를 어루만지고, 다시 꽉 끌어안고. 잔뜩 지친 몸을 씻었다가 또다시 끌어안았다. 긴장과 이완이 반복되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가득 차는 것 같았다.
“사랑해요, 세루리안.”
어두운 밤, 나는 열에 달떠서 몇 번째인지 모를 고백을 내뱉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세루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달빛 아래 세루리안은 웃고 있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을 반달처럼 휜, 환한 미소였다.
‘그도 이제 이렇게 웃을 수 있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보석처럼 빛나는 그의 눈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얕게 눈을 감았던 그는 내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꼭 사람 손을 꺼리는 고양이를 길들인 것 같은, 묘한 간질거림이 마음속에 번졌다.
그러고 보면 퍽 많이 바뀌었지 않나. 처음 나를 마주했을 때 역겹다고 말했던 남자가, 이제는 나를 끌어안으면 달콤한 꽃향기가 난다고 말하고 있었다.
‘조금씩 찾아가는 거야. 자신의 감정도, 표현도.’
그리고 우리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는.
‘분명 모자람 없이 애정 표현을 해 줄 테지.’
그를 마주하고 있으니 엄마가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가 행복하면 엄만 다 괜찮아.”
나를 원망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수년간 맴돌던 엄마는 마지막까지 내 행복을 빌어 주었다.
이제 내가 아기를 가지게 되니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짤막한 인사에,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진심이 담겨 있었음을.
나는 눈을 꼭 감았다.
‘난 행복해요. 아니, 앞으로도 세루리안과 함께 행복할 거예요.’
속으로 조용히 약속하는 나를, 세루리안은 마주 안아 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머?”
“어?”
그와 맞닿아 있던 내 배가 미세하게 불규칙적으로 꿈틀거렸다.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지, 지금 배 속에서 움직인 거 맞지요?”
“맞는 거 같습니다.”
“태동…….”
그간 얌전하던 아기가 꿈틀대면서 자기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놀라서 배를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쿡쿡 웃으며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그래, 아가. 우리 아가까지 셋이 행복해야지.’
나는 세루리안의 팔을 베고 눈을 감았다.
영원한 행복을 꿈꾸기에 딱 좋은 밤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