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의 차가운 반응에, 바네린느의 눈에서는 결국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나를 원망하고 있었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라도 원망했을 거야.”
악마가 봐도 눈시울을 붉힐 만큼 가련한 얼굴로, 그녀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도 네가 나를 기억해서 진심으로 기쁘단다, 찰스.”
상대방이 저렇게 연약해 보이니, 무작정 화를 내기도 쉽지 않았다. 찰스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고. 당신, 벌 받는 중일 거 아니야.”
“작은 꼬마였던 네가 이렇게 어른이 될 정도의 시간이 흘렀단다, 찰스. 내가 그 정도 벌을 받았으면 됐지, 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거니?”
“하, 진짜.”
뻔뻔하게 그리 말하니 기가 막혔다. 어물쩍 둘러대고 있지만, 그냥 덮어 두고 도망쳤다는 소리였다.
‘도대체 상황 파악을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는 찰스의 옆얼굴에는, 어린 시절의 유약했던 심성과 통통한 젖살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 훌륭하게 컸구나, 찰스. 멋진 어른이 되었어.”
바네린느는 황홀한 표정으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로라도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겠지? 로라는 어디 있니?”
로라, 세이지 남작 부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바네린느는 파르메 대공 옆에서 우아하고 명랑하게 손을 흔들던 보니타를 떠올렸다. 보니타와 찰스가 동시에 파르메 대공 곁에 있다는 건.
“서, 설마 파르메 대공과…….”
재혼한 건가?
파르메 대공비 자리를 노리고 온 바네린느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을 때였다. 찰스는 행여 누가 들을까 서둘러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쳤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엄마는 죽었어. 아주 오래전에 말이야.”
“뭐? 로라가 죽었다고?”
“그래. 당신 때문에.”
찰스의 원망 섞인 말에 바네린느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때문이라니. 오해가 있는 거 같구나.”
로라, 그 찢어 죽일 년.
‘마지막에 내게 진실을 듣고서 수렁에 빠져들어 가는 모습은 그럭저럭 재미있었어.’
이미 자신의 불쌍한 처지만 여러 해 동안 반추해 온 바네린느에게는 별로 감흥도 없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미 죽었다니, 더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바네린느는 성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로라와 자신 사이의 일을 포장했다.
“나는 끝까지 로라를 비호했어. 로라는 나를 배신했지만, 나는 끝까지 로라의 편을 들었단다. 그래서 로라는 벌을 받지 않았잖니.”
“그건!”
찰스는 발끈했지만 따지지는 못했다. 바네린느와 그의 어머니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바네린느의 말처럼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악마였어. 그 여자의 말에 속은 내가 바보였어.”
찰스가 입을 꾹 다물었을 때였다. 찰스의 마음에 틈이 생겼다는 걸 눈치챈 바네린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찰스, 보니는 내 딸이야.”
“……!”
그 말에 찰스는 굳고 말았다. 바네린느는 조곤조곤하지만 힘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굴을 보면 알잖니. 보니는 내 딸이란다. 그건 아무리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리고 난 그 애 앞에 나타날 권리가 있어.”
네가 그 아이에게서 어머니란 존재를 빼앗을 수 있니? 네가 무슨 자격으로?
바네린느의 말간 얼굴이, 찰스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찰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 묻는다면 찰스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니까.’
고개를 숙인 찰스를 보며, 바네린느는 내심 환호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힘없는 척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제 별 욕심 없단다. 그저 내 딸, 내 남편과 오순도순 살고 싶을 뿐이야.”
오순도순이라, 여러 사람을 나락에 빠뜨린 범죄자가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찰스는 딱딱한 목소리로 그 부분을 지적했다.
“당신은 죄인이야.”
“그래서 보니에게서 엄마를 빼앗겠다고?”
바네린느는 찰스가 보니의 이야기를 꺼내면 마음이 약해진다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녀가 여태까지 타인을 조종할 수 있게 만든 힘이기도 했다.
“그 가엾은 아이는 여태까지 엄마 없이 살았어. 그런데 지금 엄마가 나타났는데 네가 빼앗겠다고?”
“……보니가 당신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그때는 보니의 뜻대로 사라져 줄게. 하지만 보니의 의견을 듣는 게 우선 아니겠니. 적어도 엄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 아이도 알아야지.”
사라져 주기는 개뿔. 보니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바네린느는 지독하게 물고 늘어질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살길은 이제 보니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려면 우선 찰스를 붙들어야 했다. 일단 보니를 만나야 물고 늘어지든 말든 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바네린느는 사근사근한 어조로 찰스를 꼬드겼다.
“너는 기사잖니. 나와 보니가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렴. 네가 도와주면 아무도 모르게 슬쩍 만날 수 있을 거야.”
“……잠깐만 기다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찰스는 바네린느에게 손짓했다. 걸어가는 방향은 다름 아닌 대공성 쪽이었다.
‘우스울 정도로 쉽게 풀리는군.’
찰스의 등 뒤에서 바네린느는 악마처럼 사악하게 웃었다. 로라가 살아 있었다면 구슬리는 데 애를 먹었을 것이다. 로라에게는 자신의 민낯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하지만 바네린느의 눈에 찰스는 아직도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래. 어차피 과거의 일이다. 이 아이가 그때 일로 앙심을 품고 있을 리가 없지.’
상대방이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저 우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기사가 된 모습을 보니, 이 아이도 별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자란 거 같았다.
‘젠장, 테오도르. 그놈이 나만 이렇게 시궁창에 박아 두고.’
자신이 로라를 어떤 시궁창에 처박았는지는 까맣게 잊은 모습이 지극히 바네린느다웠다.
다시 말해, 아무리 벌을 받은들, 사람은 쉽게 개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라가 얼마나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고, 찰스가 보니타를 만나기 전까지 얼마나 괴롭게 지냈는지를 모르는 바네린느에게는 모든 것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 끝났어. 보니를 만나면 그 아이는 분명 나를 엄마로 인정할 거야. 보니가 나를 원하면 파르메 대공도 나를 거절할 명분이 없을 거고.’
그리고 파르메 대공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내들은 첫사랑을 잘 잊지 못하는 법이니, 바네린느가 그때의 기억을 조금만 떠올리게 하면 홀라당 넘어올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대공가를 차지하면 끝이지. 황위 계승에 대한 정당성은 이쪽에 있으니.’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되어 지내 왔으면서도, 막상 부와 명예를 다시 두 눈으로 보니 묻어 두었던 야심이 활활 타올랐다.
바네린느는 서늘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보았다.
‘테오도르 오라버니에게 복수할 거다.’
어떻게 복수를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났다. 두 사람은 어느새 대공성 앞에 서 있었다.
찰스가 바네린느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이 아니라, 집사가 안내할 때처럼 방향을 가리킨 것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갑자기 정중해진 말투에 바네린느의 입술이 씰룩였다.
‘건방진 놈, 처음부터 존댓말을 썼어야지.’
보니를 만날 방법이 이 녀석뿐이었으니 참았지, 그게 아니라면 당장 혼쭐을 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걷는 사이, 성의 사람들이 찰스에게 친근히 말을 붙였다. 찰스가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화였다.
“찰스 경, 일찍 오셨네요.”
“아직 대공 전하께서는 오시지 않으셨는데.”
“그분은 누구십니까?”
“손님이시다.”
찰스는 굳이 바네린느를 소개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대공녀의 친엄마라고 스스로 소개하고 싶어서 들썩거리는 바네린느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하지만 바네린느는 들뜨는 마음을 꾹 눌렀다.
‘보니가 온 다음에 그 앨 끌어안고 소리쳐도 늦지 않아.’
오히려 그게 더 극적이겠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힘들게 딸을 찾아 대공령까지 찾아온 황녀.
찰스는 바네린느를 어떤 방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처럼 화려하진 않은, 작은 서재처럼 꾸며진 방이었다. 바네린느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평민들이 사용하는 공간은 아니야.’
가구는 몇 없지만 잘 정돈된 방이었다. 바네린느가 의자에 적당히 앉자, 찰스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죠. 대공께선 광장을 좀 더 돌아보셔야 하니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그 정도 기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바네린느는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보낼 화려한 나날이 눈앞에서 반짝였다.
‘이제 다시 부드러운 빵을 먹을 수 있을 거야.’
밀가루에 물만 가지고 만든 빵은 돌처럼 딱딱했다. 밀가루를 반죽하면 저절로 빵이 부풀어 부드럽고 폭신해지는 줄 알았던 바네린느에게 현실은 가혹하기만 했다.
‘따뜻한 차도 마실 수 있고, 따뜻한 물에 목욕도 할 수 있겠지.’
수년 동안 잃어버렸던 부귀영화를 떠올리며 그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문이 다시 열렸다. 찰스가 얼굴을 내밀었지만, 그와 함께 온 사람은 파르메 대공이 아니었다.
“이쪽입니다.”
“고맙습니다, 찰스 경. 덕분에 죄인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바네린느를 잡으러 온 병사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바네린느가 자리에서 일어나 악을 질렀다.
“찰스! 네가 어떻게!”
찰스는 냉정한 어조로 바네린느에게 말했다.
“보니타 아가씨는 제 선택을 존중해 주실 겁니다. 애초부터 당신은 보니타 아가씨의 어머니도 뭣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나는 그 애 엄마야! 얼굴을 봐! 그 예쁜 얼굴은 내가 준 거라고!”
바네린느는 억울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런 그녀에게 찰스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고작 그런 걸로, 부모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