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24)화 (124/138)

‘그래도 거의 다 왔어. 사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어.’

헛것이 들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빨리 내려올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드디어 사람 사는 곳에!’

곧 나무가 사라지고 시야가 탁 트인 곳으로 나왔다. 바네린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정말 마을이었다.

작지만, 분명한 마을.

‘드디어 사람을 만나는 거야.’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도, 죄인 취급하는 사람도 아닌,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에너지를 뿜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드디어 탈출했어.’

바네린느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휘청휘청 마을을 걸었다. 국경 근처의 작은 마을인지라, 금세 마을 중앙에 닿았다.

그런데 오늘이 무슨 날인가, 마을 중앙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서 소리치고 있었다.

“마녀를 죽여라!”

“죄인을 내쫓아 버려!”

고개를 갸웃하며 그쪽으로 다가간 바네린느는 손에 나무 수갑을 차고 걷고 있는 꾀죄죄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엉겁결에 옆에 선 사내에게 물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사내는 다짜고짜 반말로 묻는 바네린느를 고까운 눈으로 흘겨보며 대답했다.

“죄인이 끌려가는 거 처음 보슈?”

“죄, 죄인이라니.”

바네린느는 입술을 떨었다. 얼굴이 시커메진 저 여자가 아는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는데,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에는 꼭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

“베로니카…….”

저택에 갇혀 있는 내내 자신의 수족들이 하나하나 테오도르에게 붙들려서 처벌받는 상상을 했기 때문일까.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는 여자가 베로니카 부인으로만 보였다.

사내는 정신이 이상한 여자처럼 보이는 바네린느를 흘겨보다가 순순히 설명해 주었다.

원래 이렇게 외진 곳에 사는 아저씨들은 대부분 이야기하는 걸 즐기기 마련이다.

“저 여자는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도 모자라, 그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고 탈옥을 하려고 했소. 아주 악질적인 죄인이지. 그래서 국경 너머로 쫓겨나게 되었네.”

그리고 그는 거드름 부리듯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탈옥만 하지 않았어도, 사람 사는 동네에서는 지낼 수 있었을 텐데.”

“헉!”

그 이야기가 바네린느에게는 자기 자신을 향한 조언처럼 들렸다. 그녀는 자신을 수상하게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겨우겨우 도착한 마을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지? 나도 도망치다가 들키면 저 꼴이 되는 건가? 그러면 다시 돌아가야 하나?’

여태껏 갇혀 있던 저택으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바네린느는 등 뒤를 돌아보았다. 저택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내려올 때보다 더 컴컴하고 무섭게만 보였다.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던 바네린느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비관적인 생각이 스쳤다.

‘이미 알았을지도 몰라.’

지금 시간이 얼마나 되었지? 식료품을 가지고 올 시간이지 않나?

바네린느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그녀는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이미 알았을 거야. 나를 비웃고, 감시하던 자들이니까.’

선택지는 애초부터 한 가지뿐이었다.

‘도망가는 수밖에.’

바네린느는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도, 갇혀 있던 저택도 아닌 다른 길을 향해서였다.

하지만 한 번도 바깥 생활을 해 본 적 없는 바네린느에게, 무일푼으로 떠돌며 지내는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벌써 사흘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고파.’

물이야 아무 데서나 떠서 마셨지만, 먹을 것만큼은 구할 수가 없었다. 저택에서 지낼 때도 항상 식료품은 누군가가 가져다주었으니 말이다.

‘이대로는 쓰러질 것 같아.’

비틀거리며 걷던 바네린느의 눈이, 가판대에 있는 빵을 보고 회까닥 뒤집혔다.

“빵!”

갑자기 달려들어서 빵을 물어뜯는 바네린느를 보고 가판대 주인이 빗자루를 들고 그녀를 쫓으려 했다.

“이 미친 여자가!”

“배가, 배가 너무 고프오.”

“배가 고프면 일을 해야지!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처음에는 이런 대우를 받으면 눈물이 찔끔 났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슬프지도 않았다. 빗자루를 휘두르든 말든 빵을 우걱우걱 먹는 바네린느를 보며 주인은 혀를 찼다.

“한두 번 한 짓이 아닌가 본데, 아무래도 치안대에 끌고 가야겠군.”

“아, 안 돼!”

제게 따라붙은 추격자가 없다고 해도, 치안대에 끌려가면 그녀가 누구인지 금세 들통날 것이다. 바네린느가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지고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바네린느 황녀가 길바닥에서 빵을 훔치며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릴 수 없었다.

‘도대체 누굴 찾아가야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줄까.’

길고양이처럼 도망친 바네린느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친 나머지, 누구에게든 몸을 의탁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바네린느는 다시 이를 빠드득 갈았다. 결국 피어나는 건 원망뿐이었다.

‘테오도르, 역시 아바마마께 말씀드려서 진작에 네놈을 축출시켰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나 물렀어.’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가 황제가 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막을 수 없었다면, 그가 손을 댈 수 없는 지위를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까지 가졌던 건데.

‘파르메 대공.’

그녀가 한때 가졌었던 선택지가 뒤늦게 떠올랐다. 바네린느는 눈을 빛냈다.

‘그 남자라면, 내게 다정하게 대해 줄 거야.’

이제 남은 희망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바네린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새로운 선택지가 생겼다고 해도 막막한 것은 여전했다.

‘어디로 가야 파르메 대공령이지?’

그녀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하늘은 그녀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길을 헤매는 바네린느를 어느 마음씨 좋은 부부가 보살펴 주었다.

“저런, 가엾어라. 집을 잃어버렸나 봐요. 우리가 마침 대공령으로 가는 길이니, 태워다 줄게요.”

부부 덕분에 바네린느는 일주일 만에 파르메 대공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은 이렇게나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었다.

* * *

대공령에 들어선 바네린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원래라면 황궁에서 고귀하게 자란 그녀에겐 놀라울 것도 없는 풍경이었지만, 황량한 저택 안에만 갇혀 있다가 나와서 그런가, 초입부터 그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여기가…….”

“네. 여기가 파르메 대공령이에요.”

오는 내내 부부에게는 적당히 거짓말을 한 참이었다.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러서, 남편이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노라고.

‘어차피 다시 만나면 나와 혼인하자고 할 테니 거짓말도 아니지.’

바닥까지 떨어지고서도 바네린느는 여전히 자신의 모습에 과거의 자신을 겹쳐 보았다. 누구든 그녀를 사랑하고 추앙하던 그 시절의 모습으로 말이다.

파르메 대공령의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름다운 꽃이 거리 곳곳을 장식했다. 바네린느는 신기한 눈으로 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주 번화한 곳인가 보군.”

어쩐지 고압적인 바네린느의 말투에 익숙해진 부부는 상냥하게 바네린느에게 대답해 주었다.

“하하, 늘 그런 건 아니고 축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에요.”

“축제라니?”

“대공령의 유일한 대공녀이신 보니타 아가씨의 생신이시거든요.”

“……보니타?”

그 이름이 너무나 익숙했다.

혼란스러워하는 바네린느의 옷자락을 젊은 부부가 잡아당겼다. 그리고 인파의 한쪽 끝을 가리켰다.

“아, 마침 대공 전하와 함께 인사하고 계시네요.”

“저 아이는…….”

바네린느의 눈이 커졌다. 멀리, 지붕이 없는 마차에 올라탄 채 손을 흔드는 흰색 담비 털 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가 보였다.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까만 눈동자는 그 옆에 선 대공을 쏙 빼닮았다. 그럼에도 바네린느는 단숨에 그녀가 보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색은 달라도, 저 생김새는.

‘나를 닮았어.’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바네린느의 얼굴이 탐욕으로 일그러졌다.

‘저 얼굴을 준 건 나야! 저 혈통도! 저 지위도! 내가 준 거란 말이야!’

그런데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한데 너는 그리 행복해.

‘이건 불공평해. 네가 가진 것은 모두 나에게 나누어 주어야 마땅해. 내가 준 거니까.’

바네린느가 광기로 물든 눈으로 보니타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그 마차를 향해 달려들어서 자신이 저 아이의 엄마라고 외치려 할 때였다.

“!!”

마차 근처를 지키던 기사 중 한 청년과 바네린느의 눈이 마주쳤다. 벌꿀처럼 짙은 금빛 머리카락에,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동자를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 또한 바네린느는 거짓말처럼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찰스.”

그리고 그녀를 알아본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옆에 선 동료에게 뭐라고 소곤거린 뒤, 그는 저벅저벅 바네린느를 향해 걸어왔다. 칼날처럼 차가운 시선이 바네린느를 향했다.

“당신.”

한 줌 온기도 없는 시선이건만, 바네린느는 그저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만으로도 활짝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소름이 끼친 찰스가 입을 열었다가,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많다는 것을 눈치채고 바네린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잠깐만, 이리 와.”

찰스가 그녀를 끌고 온 곳은 소란스러운 광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뒷골목이었다. 비척거리는 그녀를 끌고 온 찰스는 사람이 없는 곳에 오자마자 손목을 놓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당신,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찰스의 말에 바네린느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금세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자, 동그란 눈이 세상 가련해 보였다.

무일푼으로 세상에 던져지고서도 아무 대가 없이 대공령까지 데려다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했던, 그 외모였다.

“당신이라니, 너무 서운하구나. 엄마잖니, 찰스.”

“엄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 말에 찰스는 코웃음을 쳤다. 친자 검사를 위해 수많은 어른들이 바라보는 중에 손가락 끝을 베어서 피를 냈던 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로 소름 끼치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엄마라니. 그렇게 수많은 사람 앞에서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토록 뻔뻔하게 자신을 엄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그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