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티는 결국 그렇게 시작도 하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힘들어 보니타는 준비되어 있던 연회석 한구석 자리에 앉아서 두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분명 티파티를 처음 계획할 때는 이런 걸 예상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보니타가 그렇게 가쁜 숨을 내쉬며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누군가가 보니타를 향해 손수건을 내밀었다.
울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거절하려고 고개를 들었던 보니타는, 그 손수건을 내민 사람을 보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바로 찰스였다.
찰스를 보는 순간 다시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내 욕심이었던 거야.’
차라리 대공에게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고 찰스를 데려올 것을.
하지만 은연중에 대공이 찰스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보니타는 최대한 우연을 가장해서 만남을 만들려고 했다. 결국 이런 처참한 결과가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보니타는 고개를 숙였다.
“미, 미안해, 찰스. 너를 상처 입히려고 한 건 아니었어. 일단 네가 대공성에 와야 너와 함께 지내겠다고 떼를 쓸 수 있으니까…….”
말하다 보니 울컥, 울음이 나오려고 했다. 보니타는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참았다.
‘뭘 잘했다고 울어. 울지 말자, 보니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비집고 나와서는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찰스는 손수건으로 보니타의 눈을 덮어 주었다. 문질러 눈물을 닦는 것이 아니라 덮어서 없었던 일로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괜찮아. 다 알고 있어, 네 마음.”
찰스의 다정한 말에 더더욱 눈물이 흘러나와서, 보니타는 한참을 울었다.
결국 붕어처럼 눈이 퉁퉁 붓고 나서야 보니타는 울음을 그쳤다. 멀리서 안절부절못하고 보니타를 쳐다보고 있던 하녀가 그제야 다가와서 보니타에게 물었다.
“공녀님, 이러다가 탈수 오시겠어요. 미지근한 홍차를 올릴까요?”
“응, 찰스 것도 부탁할게.”
“예.”
하녀는 처음 보는, 행색이 남루한 소년을 흘금거리다가 공녀의 명대로 두 잔의 홍차를 가져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 둔 다과 중 흰 크림이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도 내왔다. 그것을 본 찰스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보니타는 훌쩍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네가 좋아하잖아. 복숭아 케이크.”
“……!”
찰스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케이크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시울 또한 조금씩 붉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는 동안 찰스를 걱정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니를 제외하고 말이다.
‘한없이 절망에 빠져 있었어.’
이 사람에게 버려지고, 저 사람에게 버려지고.
그렇게 이 대공령 끝자락까지 밀려왔을 때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데, 세상에서 나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를 생각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거짓말처럼 다리에 힘이 생기고, 앞날을 향해 나아갈 용기가 피어났다.
찰스는 보니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날 생각해 줘서 고마워, 보니.”
과거, 보니타에게 찰스가 자신을 구해 준 왕자님이었던 것처럼 찰스에게도 보니는 빛이었다.
말 한마디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답답한 공작저에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던 상냥한 여자아이.
그 아이가 훌쩍 자라서는 다시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랑 대공성에서 함께 살자.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릴게. 너 하나 지낼 곳은 많아.”
그건 참 달콤한 제안이었다. 보니타의 뒤를 따라가면 분명 편안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보니.”
“왜? 어째서?”
찰스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보니타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찰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거절의 이유를 밝혔다.
“내가 이대로 대공성에 눌러앉으면 나는 네 놀이 친구나 시종이 될 뿐이야.”
“그게 어때서?”
“나는 네 곁에 그렇게 머물고 싶지 않아.”
보니타는 도통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찰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마음의 나침반이 가야 할 방향을 명료하게 알려 주었다.
보니의 곁에서 그녀를 돌보다가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이 되기보다, 그녀와 대등하게 마주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찰스는 결연한 눈빛으로 보니에게 약속했다.
“내 힘으로 내 위치를 만들고 난 뒤, 네 곁으로 돌아갈게.”
“찰스.”
보니타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찰스는 고개를 숙여서 보니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정말 고마워, 보니.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해야 해.”
그리고 찰스는 휙 돌아서서 달렸다. 보니타가 그를 붙들면, 모처럼 다잡은 결심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이리 무력하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그리 다짐하고 다짐한 그는, 보니타의 시선이 닿지 않을 만한 곳에 와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헉헉거리는 그의 머리 위로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정말 그대로 물러갈 생각인가?”
보니타의 아버지인 파르메 대공이었다. 자신에게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당당하게 마주하며 찰스가 대답했다.
“힘을 길러 당당하게 보니 곁에 설 생각이니까요.”
찰스는 파르메 대공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찰스를 얕잡아 봤던 파르메 대공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보니가 한없이 자네를 기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보니의 인생은 그녀의 것이니까요.”
“……의외로군.”
저 아이의 어미는 바네린느가 악행을 저지를 때, 허수아비처럼 휘둘렸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 아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더니만.
‘그래도 멋진 사내가 되려면 아직 멀었지.’
파르메 대공은 몸을 휙 돌리며 말했다.
“얼른 가 보게. 다른 소년병 지원자들은 진작에 다 모여 있으니.”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찰스는 고개를 숙이고 가야 할 곳으로 달려갔다.
소년병 생활이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을 쉬이 세울 수 있을 거라고는 더더욱 기대하지 않았다. 보니타의 곁에 서기 위해서는 그저 그런 전공으로는 불가능할 테니.
‘그래도 이제는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예전에는 검술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싫었는데, 해내고 싶은 일이 생기니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찰스는 소년병 모집에 통과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니 결격사유랄 게 없었다.
“몰락 귀족이라니. 너도 사연이 많구나.”
교관의 말에 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자, 숙소로 바로 이동한다.”
소년병들은 한 달 동안 훈련을 받은 뒤, 그들이 필요한 곳에 나뉘어 배치될 예정이었다. 모두 함께 숙소를 향해 가려는데 밝은 목소리가 찰스를 불렀다.
“찰스! 건강하게 돌아와야 해!”
언제 왔는지, 보니타가 손을 흔들며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나도 내 자리에서 힘낼 거야. 공부도 많이 하고!”
‘나도 최선을 다할 거야.’
찰스는 속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 * *
보니타와 찰스가 그렇게 재회한 뒤로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두 사람이 미래를 향해 내달리는 동안, 그들의 운명을 꼬아 놓은 사람은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공교롭게도, 바네린느는 두 사람과 다르게 완전히 정지한 시간 속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갇혀 있었던 걸까.
저택에 혼자 유폐되는 벌을 받은 바네린느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잊어버렸다. 보급품에 달력은 없었던 데다가, 물품을 가져다주는 병사도 날짜 같은 걸 알려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
‘다 미워. 다 죽었으면 좋겠어.’
한 해, 두 해가 흐르면서 그런 생각은 어느새 이렇게 바뀌었다.
‘내가 여기 갇혀 있다는 걸 잊은 건 아닐까?’
생필품을 가져오는 병사들이 바뀌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해졌다. 처음에는 그녀를 더러운 오물 보듯 하던 병사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바네린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로 바뀌었던 것이다.
‘나를 잊어버려서 내 죄를 사면해 주는 걸 잊었다면 어떻게 하지?’
어느 날 바네린느는 병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부탁했다.
“오라버니께서 나를 잊으신 것 같아. 내가 여기 있다고 오라버니께 알려 주게.”
“이거 놔요, 아줌마.”
“아, 아줌마?”
생각지도 못한 호칭에 충격을 받은 건 바네린느였다. 저도 모르게 바네린느를 모질게 뿌리친 병사는 도망치듯 산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아줌마라니. 생각도 못 해 본 호칭이야.’
바네린느는 멍했다. 그녀의 시간은 줄곧 멈춰 있었으니,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바네린느에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자유가 찾아왔다.
자신이 잊혔을까 불안해하던 바네린느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제 손으로 닫혀 있던 문을 밀었다.
‘문이 열려?’
굳건하게 잠겨 있을 것 같던 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바네린느는 떨리는 눈으로 캄캄한 산길을 쳐다보았다. 고민은 오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이 안에서 말라 죽을 거야. 일단 여기를 나가야 해.’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천천히 앞으로 내딛었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가서, 도와줄 사람을 찾자. 베로니카 부인이라든가.’
베로니카 부인이 그동안 그녀를 돕지 않았다는 건 도울 수 없었다는 뜻이라는 걸, 바네린느는 잊은 지 오래였다. 오랜 시간 버려진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녀는 이성적인 판단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짐이라도 챙겨서 떠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몸으로 어두운 숲속으로 나섰다.
해가 떠 있었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나무 때문에 햇볕이 가려져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산짐승 소리가 나면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꺄아!”
비명을 지르며 웅크렸더니, 풀숲에서 튀어나온 것은 작은 새였다. 바네린느는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