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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21)화 (121/138)

그리고 닷새 뒤, 보니타는 클라리네의 집으로 찾아갔다. 단둘이서 시간을 보낼 줄 알았더니, 이미 클라리네의 집에는 초대객이 바글바글했다.

많은 사람 앞에서 클라리네는 보란 듯이 보니타를 끌어안았다.

“보니! 와 줘서 고마워!”

“클라리네.”

반말하는 것이 주변에 들리라고 일부러 크게 말하는 게 분명했다. 이 정도로 친한 사이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말이다.

모두 보니타에게는 불편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클라리네가 멋대로 말을 놓은 것이었고, 보니타는 그것을 지적해서 옹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원숭이 보듯 구경하는 시선들을 마주하니, 나빴던 기분은 더더욱 나빠졌다.

‘역시 불편해.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씀드리는 게 낫겠어.’

클라리네에게 붙들려서 손님들에게 인사하는 내내 보니타는 대공에게 할 말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실컷 보니타를 자랑한 클라리네는 그제야 보니타를 놔 주고 제가 어울리는 영애들과 자랑 대회를 시작했다.

그제야 그 무리에서 빠져나온 보니타는 사람이 없는 분수대 근처에 앉았다. 한숨 돌리고 있으니 뒤꿈치가 따끔했다.

“언제 뒤꿈치가 이렇게 쓸렸담.”

모두 다 클라리네가 무식하게 끌고 다닌 탓이었다. 보니타는 눈살을 찌푸리며 구두를 벗었다. 바로 그때였다.

“보니?”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된 소년 특유의, 무겁고 갈라지는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파르메 대공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부르지 않는 애칭이었다.

도대체 어느 누가 공녀에게 이리 무례하게 애칭을 마음대로 부른단 말인가. 따끔하게 한마디를 하려고 고개를 들었던 보니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순금을 녹인 것 같은 찬란한 금빛 머리카락, 그리고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그녀를 멍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보니 또한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찰스?”

찰스가 분명했다!

보니타가 찰스라고 부르자, 소년의 몸이 가볍게 움찔거렸다. 찰스가 아니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보니타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스! 너무 오랜만이다!”

“보니가 맞구나.”

찰스는 자신이 먼저 보니를 알아봤으면서도 얼떨떨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앞에 선 보니타의 구불구불한 갈색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 변해서, 내가 잘못 본 줄 알았어.”

그 말에 보니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변하지 않았으니까 한눈에 알아본 거지. 나는 똑같아. 너도 여전히 멋지구나.”

“멋…….”

보니타의 자연스러운 칭찬에, 찰스는 당황한 듯 굳어졌다. 보니타는 그런 찰스의 손목을 잡아끌어서 아까 앉았던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구두가 달랑달랑 발끝에 걸치게 구두를 벗는 보니타를 찰스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니타는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미안. 예의가 아닌 건 아는데 봐줄래? 지금 뒤꿈치가 까져서 너무 아프거든.”

“새 구두를 신은 모양이구나.”

“그런 것보다는 클라리네가 막무가내로 끌고 다녀서…….”

무심코 대답하던 보니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찰스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데 괜히 그 앞에서 투덜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찰스의 시선이 보니타를 천천히 훑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프릴이 가득 달린 원피스는 힐긋 보기에도 몹시 값진 것이었다. 머리카락은 짧은 망토처럼 보일 만큼 길고 풍성했지만 엉킨 곳 하나 없었다. 누군가가 관리해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으로 보니타의 건강한 혈색까지 확인한 뒤에, 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으리라. 그건 보니타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찰스가 얼마나 신중하게 그 질문을 건넸는지 모르는 보니타는 어깨를 으쓱하며 명랑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머니가 사라지셨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왔어.”

“아버지?”

“응, 친아버지. 나랑 똑같은 갈색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진 분이셔.”

“아버지가 계셨구나, 다행이다.”

아버지. 그 단어가 나오니 찰스의 가슴 한구석이 따끔했다. 찰스에게도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까.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에게 사죄하셨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어린 찰스는 물을 수도 없었다.

숨을 거둘 때까지 쓸쓸히 살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찰스가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보니타가 활짝 웃으며 찰스를 돌아보았다.

“찰스, 너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너를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려고 그랬나 봐.”

“나를 생각했었어?”

그 말에 찰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니타는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럼. 함께 꽃반지를 만들고 웃었던 건 내게도 행복한 추억인걸.”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굉장히 먼 옛날 일 같다.”

“굉장히 먼 옛날 일 맞아.”

보니타의 웃음소리는 명랑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아서 듣기 좋았다. 마치 청량한 오르골 소리 같았다.

찰스는 누군가와 오랜만에 마주 미소 지으며 보니타에게 대답했다.

“다시 만나서 좋다, 보니.”

“나도.”

어릴 때였다면 주저하지 않고 마주 안았을 테지만, 이제 다 큰 아이들인지라 얌전히 손을 붙들고 악수를 했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찰스의 손을 잡고 붕붕 흔들던 보니타가 고개를 들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 어디 살아? 여기에는 초대받아서 온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찰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여기 살아.”

“여기? 여기는 클라리네 바셋 영애의 집인데?”

“응. 우리 아버지가 바셋 백작님과 가까운 친척이라더라.”

“뭐?”

찰스의 대답에 보니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교롭게도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최근 집에 군식구가 생겨서 너무 귀찮아.”

바로 얼마 전에 클라리네가 잔뜩 투덜거렸던 그 아이가 찰스였던 것이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감히 상상할 수도 없어서 보니타는 어색하게 굳어졌다. 찰스는 보니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계속 혼자 지내고 있어. 맡아 줄 친척이 없어서 여기저기 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이제는 보니타보다 한 마디씩은 더 긴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찰스는 의젓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너는 잘 지낸 거 같아서 다행이야. 걱정했어.”

보니타는 멍하니 찰스의 얼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파르메 대공은 바셋 백작가에 초대된 딸이 잔뜩 신이 나서 돌아올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뭐, 우리 보니타는 워낙 얌전한 아이니까.’

처음 어울리는 친구들과의 모임에 흥분해서 달려올 아이가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었어요’라고 한마디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공주님, 왜 이렇게 멍해 보이니?”

“아니…….”

보니타는 꼭 누군가에게 뺨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멍해서 돌아왔다.

얼마나 멍했는지, 마중을 나온 파르메 대공이 보니타를 안아 들고 본관으로 오는 내내, 제가 아버지에게 안겨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는 거 같았다.

‘도대체 우리 아이가 왜 이럴까.’

잠자코 보니타의 얼굴을 살피던 파르메 대공은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했지만 짚이는 건 이것뿐이었다.

“바셋 영애가 너를 불쾌하게 만들었니?”

“그건…….”

보니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클라리네가 정말 귀찮고 싫은 건 사실이었지만, 아버지에게 일러바칠 정도로 나쁜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고개를 끄덕이면 아버지가 엄청 오해하실지도 몰라.’

이미 반쯤 굳어진 얼굴이, 당장이라도 바셋 백작가로 항의 서한을 보낼 기세였다. 보니타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있으니 불현듯 좋은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게 아니라…… 이번에는 대공성에서 제가 티파티를 열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 생각을 하느라고 그랬어요, 아버지.”

“네가?”

“네. 오늘 바셋 백작가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거든요. 문득, 대공성은 너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보니, 우리 딸.”

파르메 대공의 마음을 여는 비밀의 열쇠가 있다면 바로 딸 입에서 나오는 ‘외로움’이라는 단어였다. 공허 혹은 허전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파르메 대공은 마음이 아파왔다.

그는 보니타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허락했다.

“물론이지. 뭐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감사해요, 아버지.”

처음 만남은 우연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은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안다.

보니타는 있는 힘껏 파르메 대공의 목을 끌어안았다.

보니타는 집사에게 티파티를 주최하고 싶다고 말을 전했다. 집사도, 주방장도 모두 이제까지 대공성에서 이런 행사를 연 적이 없었다면서 기뻐했다.

그다음 보니타가 한 일은 바로 클라리네를 대공성에 초대한 것이었다.

보니타의 이야기를 들은 클라리네는 찻물을 주르륵 흘리며 반문했다.

“티파티라고? 대공성에서?”

“응. 내 첫 티파티야.”

이렇게 말하면 남들에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클라리네가 대번에 아름다운 드레스를 맞춰야겠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러나 클라리네는 뜻밖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대공성은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이잖아. 현재는 안주인도 안 계시는데.”

얼핏 듣기에는 보니타를 배려해서 대공성에서 티파티를 여는 것을 반대하는 거 같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명확했다.

‘저 혼자만 오고 싶다는 소리군.’

대공성에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어린 영애. 그 지위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속내가 뻔했다. 보면 볼수록 얄미운 아이였다.

그냥 무례하다고 소리를 지르고 대공성에서 내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보니타는 꾹 참았다. 이미 클라리네를 여러 번 달래 본지라 어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찰스를 부르려면 클라리네가 꼭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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