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쁜 며느리가 되고 싶어요 (120)화 (120/138)

하지만 한 해, 두 해가 흘러도 대공은 여전히 혼인하지 않았다. 혼인을 청하는 가신들의 상소가 높은 탑을 쌓을 정도가 되어서야, 그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나는 나이가 많으니, 상대도 원숙한 여인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고르는 여성들이 죄, 제 고모뻘이라 결국 가신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이러다가 대공령이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대공 전하께서 계속 미혼을 고집하는 건 결국 보니타 아가씨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보니타 아가씨를 그냥 입적합시다.”

그렇게 해서 파르메 대공령에 온 지 7년 만에 보니타는 정식으로 파르메의 성을 얻을 수 있었다. 보니타가 열두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보니타의 봉작식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겨울의 어느 날.

보니타의 드레스를 몸소 고르겠다며 대공은 보니타의 손을 붙들고 거리로 나왔다. 평소 대공성으로 제가 찾아가야 했던 양장사는 갑자기 나타난 대공 부녀를 보고 깜짝 놀라서 머리가 바닥에 닿도록 절을 했다.

“아이고, 대공 전하! 공녀님!”

공녀님이라니. 그 호칭이 낯선 보니타는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아가씨가 더 나은 호칭 같아요. 공녀님은 과하게 들려요.”

대공은 그런 보니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공녀님을 공녀님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르겠니.”

“아버지한테야 그렇겠지만요.”

보니타는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파르메 대공은 사랑스러운 딸을 보며 방긋 미소지었다.

“다행이구나. 이제라도 다들 납득해 주어서.”

바로 보니타의 처우에 대한 것이었다. 제 아버지가 얼마나 가신들의 속을 썩였는지 아는 보니타는 활짝 웃을 수가 없었다.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했나요?”

파르메 대공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열다섯 살 연상의 부인과 결혼했겠지.”

태연자약한 파르메 대공의 대답에, 보니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는 아가씨라고 불리는 게 좋다니까요.”

“내 딸이 아가씨라 불리다니, 절대로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얼떨떨한걸요. 저랑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에요.”

“보니.”

보니타의 대답에 대공은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 보니타는 헤헤, 하고 작게 웃었다.

보니타가 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머나먼 파르메 대공령까지 왔을 때가 다섯 살.

벌써 그때의 나이보다도 긴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 열두 살이 되었지만, 보니타는 여전히 자신이 그냥 ‘보니’였던 시절을 기억했다.

보니타는 파르메 대공의 커다란 손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버지가 생겨서 너무 좋아요. 저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인 줄 알았어요.”

7년 전 일을 마치 어제 일처럼 말하는 딸을, 파르메 대공은 안쓰러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나도 딸이 없는 줄 알았단다.”

두 사람이 이렇게 엇갈린 것은, 친모인 바네린느 황녀가 보니타의 출생 사실을 감춘 탓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바네린느 황녀인지 모르는 보니타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엄마는요? 엄마는 어떻게 지내고 계셔요?”

“그 사람이야 늘 똑같겠지.”

파르메 대공은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는 바네린느 황녀가 어떻게 지내는지 몰랐다. 일부러 알아보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심경이 어떻든, 보니타가 엄마에 대해 묻는 건 아이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파르메 대공은 착잡함을 속으로 꾹 눌러 숨기며 물었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으니?”

“아니요. 아버지가 계신걸요.”

“기특하기도 하지.”

보니타의 얼굴에 그림자가 없다는 걸 꼼꼼히 확인한 뒤에야 대공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대공의 손을 조용히 붙들고 있던 보니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생각나는 아이가 있어요.”

“아이?”

보니타의 입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대공이 눈살을 찌푸리자, 보니타는 빠른 말씨로 설명했다.

“네, 같은 집에서 살던 아이인데 도련님이었어요. 엄마가 저랑은 다른 아이니까 너는 얼굴도 마주 보면 안 된다고 말했었거든요.”

“아아.”

대공은 듣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이 아이와 바꿔치기했다는 그 사내아이겠지.’

세이지 남작 부인은 증언에 대한 대가로 큰 벌은 받지 않았다. 하지만 바네린느의 악행에 동참했던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딱히 상도 받지 않았다. 그냥 자신의 영지로 돌아간 걸로 알고 있는데.

‘알아서 잘 지내고 있겠지. 악행을 폭로할 정도면 어련히 도망칠 준비도 했으려고.’

세이지 남작 부인과 그 아들은 파르메 대공의 안중에도 없는 존재들이었다. 오히려 그들 때문에 그의 자식이 오랫동안 갇혀서 가엾게 지냈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보니타의 기억 속에 찰스는, 꽤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보니타는 멍한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상냥했어요. 저에게 예쁜 꽃반지도 만들어 주었었고요.”

“꽃반지라.”

“제가 갇힌 방으로 찾아왔을 때는 왕자님 같았어요. 달리기도 나보다 못하고, 나무도 못 타면서 무슨 용기가 난 건지.”

“그랬구나.”

보니타의 이야기를 들은 대공은, 대공성에 돌아와 가신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내 딸이 친구를 사귀고 싶은 듯하니, 영지 내의 또래 귀족들 중에 말벗을 찾아 보아라.”

“예.”

몇 년 동안 언급도 하지 않던 아이를 갑자기 입에 올리는 이유가 뭐겠나. 파르메 대공은 그저 보니타도 친구 사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 *

친구를 만들 생각이 없던 보니타에게 아버지의 간섭은 정말 귀찮은 것이었다. 보니타는 제 부정적인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을 만들며, 속으로 이렇게 툴툴거렸다.

‘클라리네는 정말 시끄러워. 도대체 자랑할 것이 뭐 그렇게 많담.’

대공의 명에 의해서 걸러지고, 또 걸러져서 최종적으로 선택된 말벗은 클라리네 바셋 영애였다. 클라리네를 매주 수요일에 마주할 때마다 보니타는 그녀를 말벗으로 선발한 사람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클라리네를 뽑았을까? 저 아이는 예의 바르지 않은 데다가 나에 대한 존중도 느껴지지 않는걸.’

클라리네와의 대화는 대체로 클라리네 혼자 떠들고 보니타가 들어 주는 식이었다.

오늘도 그랬다. 둘둘 말아 올린 머리카락을 반묶음 하고, 바보처럼 커다란 리본을 달고 온 클라리네는 보니타의 인사도 듣지 않고 자신의 근황을 쏟아 냈다.

“최근 집에 군식구가 생겨서 너무 귀찮아. 다 아버지가 내쫓아 버리셨으면 좋겠는데, 아버지의 먼 친척이라 내쫓기 그러신가 봐.”

“먼 친척?”

클라리네가 주로 이야기하는 건 보석이나 드레스, 그리고 클라리네가 키우는 바보 같은 개에 대한 것이었는데, 오늘은 뜻밖의 화제가 튀어나왔다. 보니타가 눈을 깜빡거리자, 클라리네는 귀찮아 죽겠다는-사실은 보니타의 반응이 즐거우면서-표정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아버지에게 사촌 동생이 있었는데, 그 동생분께서 일찍 돌아가셨다나 봐. 나는 얼굴도 본 적 없어. 근데 그분의 아이가 최근에 우리 집으로 왔어. 의탁할 곳을 찾아서 말이야.”

“가족이니까, 거두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 정도면 퍽 가까운 혈족 아닌가? 사촌의 아이니까 오촌 조카 아닌가.

하지만 클라리네의 의견은 달랐다. 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툴툴거렸다.

“그럼 적당한 저택을 내주고 하인을 좀 보내 주면 되잖아. 굳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필요가 뭐가 있냐고. 그것 때문에 엄마도 신경이 날카롭고 좀 그래.”

“그렇구나.”

성의 없이 대답하면서 보니타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좋을 거 같은데.’

넓은 대공성에서, 가족은 보니타와 아버지 단 둘뿐이었다. 보니타는 한 번이라도 가족이 북적북적한 곳에서 살아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클라리네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렸다.

“그냥 빈털터리 군식구면 우리 엄마도 그렇게까지 싫어하진 않겠지. 듣기로는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나 봐.”

“구린 구석?”

“응. 큰 죄를 지은 거지. 그래서 거두었다가는 괜히 우리 집안까지 이미지가 나빠질 거 같은 거야.”

보니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들어 보니 클라리네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어린아이인 모양인데, 큰 죄를 저지를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말에 동조해 줄 때까지, 이 바보 같은 티타임이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보니타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렇게까지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니, 한 지붕 아래 있는 게 무섭긴 하겠다.”

“내 말이 그거야!”

큰 소리로 보니타의 말에 맞장구를 친 클라리네는 보니타를 와락 끌어안으며 말했다.

“하여간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마워, 보니. 나는 대공성에 올 때가 가장 좋더라. 내 또래 아이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너는 모를 거야.”

“하하.”

보아하니 보니타의 말벗이 되었다고 여기저기 꽤나 자랑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보니타는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말씀드려야겠어. 친구는 필요 없고, 말벗과 티타임을 가질 시간에 차라리 책을 한 권 더 읽겠다고 말이야.’

클라리네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보니타는 대공을 찾아갔다. 하지만 막상 대공을 마주하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바셋 영애와 잘 지낸다면서? 바셋 가문에서 이번에 너를 초대했단다.”

“……네?”

실컷 제 할 말만 하다가 떠나는 것 같더니, 언제 대공에게 초대장까지 넘겼단 말인가.

보니타는 가기 싫었다. 말벗도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보니타가 친구를 사귀어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대공을 보니 차마 그 말이 나오질 않았다.

결국 보니타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저도 좋아요. 다녀올게요.”

0